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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Sep 16. 2019

무대에서 내려오자 '진짜 삶'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민낯'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했다

20대 초반의 나는 모든게 분명했었다. 

오죽했으면 대학교 때, 교양필수로 글쓰기 시간이 있었는데 인생의 가치관을 다룬 내 글을 본 교수님의 피드백이 이러했었다.

인생에 대해서 조금만 더 여지를 두고 고민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조금만 더 여지를 두고 고민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교수님이 지금의 내 나이쯤 혹은 그 이상 되셨을까. 난 이제서야 그 분의 피드백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있다.     

이십대 초반의 나는 무엇이 사랑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철저하게 학습된 가치관이었기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교회와 가정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강도 높게 학습했던 나는 주입된 그것들이 곧 ‘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말하는 것이 곧 ‘나’라고 생각했으며, 그로 인한 자존감이 높았다. 삶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으며 말에는 항상 힘이 실려있었다.     



삼십대 중반의 나는 어떠할까.  이제 나는 무엇 하나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세상에는 이런 측면이 있는가 하면 저런 측면이 있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절대적으로 옳은 길이 없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나이를 들수록 그에 대한 책임을 하나 둘씩 맞닥뜨린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 


이십대 초반의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이 나의 실체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행동을 낳고, 그 행동들이 모여 인생이 되므로 언어로 옮겨지는 나의 생각들이 곧 ‘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로 표현되는 나를 많이 좋아했었다. 그것은 아직 ‘나’의 실체와 제대로 부딪히기 전의 환상에 불과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말은 말이고, 생각은 생각일 뿐, 그것이 ‘나’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내가 말하던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었다. 여전히 내 말에는 좋은 가치관을 담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내 삶과는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쩌다 한 번 보는 사람들은 말과 태도로 속일 수 있다. 하지만 함께 사는 가족은 속일 수 없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말은 말이고, 생각은 생각일 뿐, 그것이 ‘나’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자 한다면 학교의 생활기록부나 회사의 인사고과, 친구들의 평판을 둘러볼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것들에 어쩌면 우리는 기만당하고 있는지도. 나를 숨쉬듯이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내 가족들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나의 모습을 실감나게 직관하고 있는 내 인생의 진짜 심사위원들.    


나는 변했는데 세상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세상에는 너무나 분명한 가치관들이 우주선에 떠다니는 물방울들처럼 부유한다. 어떤 이들은 J를 장관에 앉히는 것이 애국이라 하고, 누군가는 매국이라 한다. 교회를 세습하는 것에 대해 어떤 이들은 세상 부끄러운줄 알라고 하고, 누군가는 하나님의 뜻이라 한다. 각종 SNS에는 듣고 싶은 말을 듣고자 찾아오는 네티즌들로 가득하다. 보수 진영 SNS에는 보수가 모이고, 진보 진영 SNS에는 진보들이 모여 각자 자화자찬한다. 어떤 팩트가 나와도 각자의 진영 논리대로 해석되어 유통되기 때문에 어떤 정보도 신뢰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점점 힘들다. 고향이든 어떤 공동체에서든 일치된 의견 속에 들어가면 소속감을 느끼며 살겠지만, 점점 그런 곳이 없어진다. 나는 어느 진영도 아닌, 남의 인생에 참견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저 나 하나의 삶도 건사하기 힘든 나약한 소시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분명했던 그 때가 그립지는 않다. 

그 분명함이 다름 아닌 ‘무지(無知)’에서 나온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반대되는 의견들을 고의로 차단하며 철저하게 고립되어 확립된 확신은 사실 힘이 없는 것이었다. 글로 배운 지식과 주입된 가치관은 ‘진짜’가 아니었다. 

나는 내 밑바닥을 경험하면서 ‘진짜’가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나’의 별 볼 일 없는 모습에 직면하며 나는 진짜 ‘나’를 찾아다니는 여행을 다니고 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예전의 내가 이 글을 보았다면 물었을 질문이다.

이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냥 그렇다구요’    





무얼 주장하고 싶은 마음도, 입장을 표명할 마음도 없다.

나는 그저 피상적이고 보여지는 삶에 담긴 ‘나’에만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그렇게 스스로를 치장하기에 바빴던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이제야 마음 밑바닥을 갈아엎고 나 스스로를 개혁해야 할 기로에 놓여있다는 것을 안다.


혹자들은 인생이 연극 무대에 올려진 배우의 연기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90%는 맞는 이야기이다. 홀로 살아가지 않는 한, 사람들은 그 사회에서 요구되는 행동양식에 맞추어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한다. 그 연기를 실감나게 할 수록 칭찬을 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삶은 칭찬받고 인정받을수록 '공허'하다. 그 속이 비어있기 십상이며, 군중의 박수를 받을수록 가족이나 연인, 친구 같은 '진짜 관계'들을 잃기 시작한다. 


'진면(眞面, true character)'으로 사는 삶은 무게는 무거울지 몰라도 '진짜 삶'이다. 

무대에서 내려와서 진짜 자신의 삶을 사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박수를 받는 사람들일수록 '진면'의 삶을 시작하는데에는 그동안 가짜로 만들어낸 허구의 자아를 부숴내야 하기에 큰 기회비용을 치르게 마련이다. 


'진면(眞面, true character)'으로 사는 삶은 무게는 무거울지 몰라도 '진짜 삶'이다.


나는 그것이 진짜 삶이라고 믿는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약을 먹고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듯,

나의 삼십대는 이제야 진짜 인생의 시작점이다. 

진짜 심사위원인 가족들이 그 시작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이 글을 이십대 초반에 내 작문에 피드백을 주셨던 교수님께 보여드리고 싶다.

그 분의 첨삭은 어떠할까?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약을 먹고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듯,나의 삼십대는 이제야 진짜 인생의 시작점이다.


나는 과연 잘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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