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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Jul 04. 2019

당근을 향해 달려드는 토끼를 나무라지 말라

당근을 옮겨놓으면 된다

자사고 폐지 논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명문으로 알려진 자립형 사립고등학교가 있다. 최근 이 학교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 해당 지역의 교육청이 이 학교에 대해서 점수 미달로 자립형사립고의 재지정을 취소한 것이다. 

자립형사립고등학교는 정부의 보조금을 받지 않고 학교 스스로 교과과정을 운영한다. 학생과 교사의 선발, 교육비 책정에 있어서도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 학교에 자유를 준 취지는 천편일률적인 교과과정을 탈피해서 ‘교육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지역의 교육청은 이 학교가 자사고의 취지에서 많이 벗어나있다는 입장이다. 해당 교육감은 이 학교 출신 학생들 360명 중 275명이 의대로 진학했다며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됐다’고 했다.

자사고 폐지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


우리 나라 교육의 방점은 '인풋'이 아니라 '아웃풋'에 있다


필자는 생각해본다. 우리 나라에서 교육과정의 다양성을 확보한다면 결과는 달라질까? 교육과정이 다양화되면 ‘공부를 잘 한다’고 일컬어지는 기준이 달라질 수 있을까? 그 기준에 부합하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 의대를 포기하고, 인문학이나 순수과학을 전공하려할까? 지금의 현실이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된 것은 인정하지만 그 책임을 의대에 진학하는 학생들과 입시 경쟁력을 갖추게 돕는 학교에 돌리는 것은 맞지 않다. 교육감님의 교육 철학과 소신은 존중받을만 하다. 하지만 이미 사회적인 신분상승의 코스는 고착화되어있는데 그 현실은 놓아둔채로 교육 과정만 쥐어짜는 것은 실효성 면에서 떨어진다는 것이다. 

교육 과정의 변화로는 고착화된 신분상승의 코스를 바꿀 수 없다


'타이틀'에 목숨 건 사회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전적으로 ‘타이틀’이 필요하다. 최근 개봉한 영화 ‘기생충’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민망할 정도로 자세히 그리고 집요하게 비춘다. 부잣집의 순수한 사모님 연교(조여정 분)와 남편 동익(이선균 분)은 가정에서 본인들이 맡아야 할 중요한 기능들을 ‘전문가’들에게 위탁하는 모습을 보인다. 으리으리하고 웅장한 그 집에 전문가로 인정받아 취업하는 일은 진입장벽이 엄청나게 높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유명 대학의 학위 증명서와 전문 자격증, 그리고 믿을만한 지인의 추천(일종의 지식인 카르텔)만 있으면 쉽게 뚫을 수 있는 허술한 공간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그 허술함이 그 집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 사회는 출신 대학, 전문 자격, 직업이라는 ‘타이틀’이 곧 그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이 공고한 체제는 그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의 카르텔 때문에 쉽게 붕괴되지 않는 영역이다. 

우리 사회는 출신 대학, 전문 자격, 직업이라는 ‘타이틀’이 곧 그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타이틀' 때문에 잘못 꾸는 꿈


이 때문에 자라나는 아이들이 꿈을 잘못 꾸고 있다. ‘의사가 되는 것’, ‘교수가 되는 것’, ‘유명 유투버가 되는 것’ 등은 ‘직업 희망’일 뿐이지 꿈이 아니다. 의사 중에도, 강단에 선 사람들 중에도, 심지어 종교지도자들 중에도 도덕적으로 피폐한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어떠한 마인드와 내면을 가지고 있는지와 상관 없이 ‘타이틀’만을 가지고 인정과 칭찬을 주고 받는 사회는 ‘타이틀’만을 쟁취하고자 하는 다음 세대를 길러낸다. 그 '타이틀'을 손에 쥐기까지 자라나는 세대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쳐내야 한다. '타이틀'을 손에 쥐기만 하면 사회적인 존경과 인정이 쏟아질 것을 상상하며 그들은 인고의 시간을 버텨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타이틀'을 손에 쥔 이후에 대한 고민은 크게 하지 않는다. 사회는 '타이틀'만을 요구하지, 그 '타이틀'을 손에 쥐고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타이틀' 때문에 자라나는 아이들이 꿈을 잘못 꾸고 있다.


넘치는 물을 욕하지 말라, 둑을 쌓지 못한 것이 문제다


왜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의대에 진학하려고 하겠는가? 왜 교수 초빙에 수많은 국내외 박사들이 몰리겠는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사명, 다음 세대를 일으키기 위한 사명으로 유능한 자원들이 빽빽이 들어찬다면 참 행복한 일이겠지만 그렇지만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공부를 잘해서 의대에 진학하는 아이들이 나쁜 것이 아니다. 의사만 되면 그 사람의 됨됨이나 내면, 동기와 상관 없이 훌륭한 사람으로 엄지를 추켜세우는 사회 구조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된 것이다. 그 사회의 서열 구조와 개인들의 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 나라에서 교육의 다양화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 


물은 수위가 높아지면 넘친다. 그래서 제방이나 둑을 쌓는게다. 홍수가 나서 물이 넘쳤는데 물에게 왜 넘쳤느냐며 욕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물이 범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예방을 하지 않은 당국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물은 수위가 높아지면 넘친다. 그래서 제방이나 둑을 쌓는게다.



당근을 향해 달려드는 토끼를 나무라지 말라, 당근을 재배열하면 된다


좀 더 쉬운 비유를 들어보자. 당근은 눈 앞에 있는데 토끼에게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가겠는가? 당근을 향해 힘찬 뜀걸음을 내딛는 토끼를 말을 듣지 않는다고 나무랄 것인가? 당근의 위치를 옮겨놓으면 되는 것이다.


오늘날 '타이틀'을 쫓아서 힘찬 발걸음을 걷는 유수한 인재들을 보며 혀를 찰 것이 아니다.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이 수백대 일이 되는 것은 지원자들이 인생에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당근의 위치를 잘못 설정한 구조의 문제이다. 


'사회적 당근의 재설정' 논의


‘사회적 당근’의 재설정이 필요하다. 사회 곳곳에 당근을 나누어 놓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간 인정받아왔던 '타이틀'도 노력의 산물이니 전혀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타이틀'을 쥐었다고 해서 무조건 엄지를 들어올릴 것이 아니라 그 '타이틀'을 쥐고, 어떻게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아가는지를 놓고 평가를 해야한다는 점이다. 또한 인류 보편의 가치를 위해 땀을 흘리는 직업들이 있다면 그 역시도 엄지를 들어올릴 수 있는 사회적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사회적 당근이 재설정되어 다양화되면, 그 색색의 당근을 쫓는 다음 세대들의 행보도, 교육과정도 알아서 다양해질 것이다. 

당근은 눈 앞에 있는데 토끼에게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가겠는가?


당신의 '타이틀'은 당신이 아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당신의 '타이틀'은 당신이 아니다. 자기 소개를 할 때, 직업을 말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자사고를 폐지하고, 사회적 신분 상승의 중간 통로를 틀어막는다고 해서 교육과정이 다양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위에 제시한 근본적인 물음 앞에 서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자신의 소명감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록, 우리 사회는 그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 속에서 발전할 것이라고 믿는다. '타이틀'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지양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과 보상이 주어질 때, 우리의 교육은 다양성을 회복하고, 비로소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과 보상이 주어질 때, 우리의 교육은 다양성을 회복하고, 비로소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No 'Title', Yes 'Calling'


교육과정의 다양성이 필요하고, 그 다양성을 현재의 자사고들이 취지에 맞게 추구하고 있지 않다는데 동의한다. 단지, 그 방법에 있어서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 보상 시스템을 수정할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학교를 때려잡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이 없기에, 그렇게 해도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어차피 의대에 갈 것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에 글을 썼다. 

다음 세상은 부디 '타이틀'만 가지고 사람을 귀하게 또는 천하게 여기는 세상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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