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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Oct 08. 2019

들어오는 버스에 그냥 몸을 싣곤 했다

자유와 일탈, 모험과 일상의 상관 관계에 대하여

유년시절, 나만의 자유 여행


초등학교에 다니던 그 맘 때 쯤, 나에게는 독특한 취미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어디로 갈지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 아무 버스에 몸을 싣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나를 휘감고 있는 익숙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려서 가 본 곳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버스가 어디로 향하든 어디에 내리든 처음 가 보는 곳이었다. 나는 처음 타 보는 버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생경한 거리와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미리 알아보고 계획해서 탄 버스가 아니었기 때문에 적당한 두려움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새로운 장소와 그 곳의 공기가 주는 설렘에 금새 묻히곤 했다. 그렇게 나는 서울의 이 곳 저 곳을 여행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 얻어걸린 몇몇 곳은 지금까지 나만의 명소가 되었다. 

발길 닿는대로 걷고, 들어오는 아무 버스를 타고, 그러다 내리고 싶은 곳에 내리는 나만의 여행 방식은 무계획이 주는 자유로움을 알게 해 주었다. 계획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나는 미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길을 잘 찾는 편은 아니라서 때로 헤매이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다시 온 길을 되짚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나는 자유와 자신감을 학습하기 시작했고, 나만의 지경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디로 갈지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 아무 버스에 몸을 싣는 것이었다.


칸에 정리하기 힘들었던 나의 생각들


학창시절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성이 있었는데 그것은 필기하거나 생각을 정리할 때, 칸이 쳐 진 공책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구점에서 파는 대부분의 공책들에는 평행선이 무지막지하게 많이도 쳐져 있었다. 나에게 그 선들은 마치 감옥에 있는 쇠창살처럼 느껴졌다. 창의적인 생각을 숨쉬듯이 하는 영재도 아니었지만 내 생각을 그 쇠창살 같은 평행선들 사이에 나열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무언가를 쓸 때, 빈 종이를 썼다. 대학교에 다닐 때는 빈 종이들에 필기를 하고, 삼공펀치로 구멍을 뚫어 파일에 보관하곤 했다. 

나에게 그 선들은 마치 감옥에 있는 쇠창살처럼 느껴졌다.



십년차 직장인, 자유를 꿈꾸다


내향적이지만 소심한 모험을 즐기며 빈 종이 안에서의 일탈을 즐겨하던 그 꼬마 아이는 십년차 직장인이자 아내와 두 아이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이제는 직장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워크숍을 가도, 가족들을 데리고 여행을 가도, 사전에 철저한 답사와 동선 파악을 해야한다. 주차는 어디에 해야 저렴하고 이동이 편한지, 식당에 어린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있는지, 날씨가 좋을 때는 어디에 가야 하고, 혹시 비라도 오면 어디에 가는 것이 좋을지 미리 알아보아야 만약의 사태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러한 준비와 계획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세심한 노력들이기에 행복한 일들이다. 하지만 그러다 문득 발길 닿는대로 걷을 수 있던 그 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새로운 세계를 접하던 설렘과 환희, 수레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하늘의 색이나 공기의 온도만 달라져도 기분이 좋아지던 그 때. 버스에 타서 노선도에 있는 수많은 정류장 중에서 하나를 고를 때의 설렘. 그 버스에서 간접적으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숨결.


오랫만에 아무 버스에 몸을 싣다


제주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잠시 가족들과 떨어지게 되었다. 용무가 끝나고, 정말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이 왔다. 그 때, 나는 주저 없이 숙소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 정류장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목관아를 지나 동문시장을 거치더니 이번 정류장은 ‘제주 국립박물관’이라는 안내방송을 해주었다. 나의 검지손가락은 어린 시절 그 방식 그대로 반사적으로 하차 벨을 누르고 내렸다. 

나는 주저 없이 숙소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 정류장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안내 방송의 그 무엇이 나를 반응하게 만들었을까 싶었다. 아마도 ‘국립’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딜레마’였을 것이다. ‘국립’이라면 나라에서는 나름 심혈을 기울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보통 그러한 국가의 노력은 시장에서 사기업이 눈치 채는 소비자들의 니즈와는 동떨어진 고집 같은 것들이 서려 있다. 그래서 보통은 인기가 없다. 그 이야기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 한적하게 걸을 수 있다는 뜻이고, 나는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러한 ‘한적한 산책’을 하고 싶었나보다. 그리고 국가가 고집하는 그 무언가가 나의 독특한 그 무엇과 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서려있었는지도. 내려서 직접 가보니 기대한 것 이상으로 ‘한적한 산책’을 할 수 있었다. 박물관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자발적 현장학습을 온 것으로 보이는 초등학생 몇 명과 큐레이터 몇 분, 나와 비슷하게 가방을 메고 천천히 걸어다니는 여성분 한 분이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내가 원하는 ‘한적한 걸음’을 걸어낼 수 있었다.

버스는 목관아를 지나 동문시장을 거치더니 이번 정류장은 ‘제주 국립박물관’이라는 안내방송을 해주었다.


박물관을 나와서 다시금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그 버스 안에 붙어있는 ‘노선도’ 끝자락에 ‘함덕 서우봉 해변’이 있었다. 제주의 바다를 경험하게 해주는 마법의 버스라니.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함덕에 내리니 아이들을 데리고 온 나와 연배가 비슷해보이는 부부들이 참 많았다. 홀로 걷고 있노라면 쭈뼛쭈뼛 망설이는 느낌이 드는 일행들이 있다. 그런 일행들은 ‘사진 찍어드릴까요?’ 하고 물으면 ‘그래 바로 그거야!’ 하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밀곤 한다. 나는 그들에게 평생 추억이 될지도 모르는 사진을 찍는다. 그 ‘인생 사진’이 뭐가 될지 모르기에 셔터 버튼을 열 번 이상은 눌러준다. 그 열 번의 사진은 멀리서 볼 땐 똑같아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머릿결이나 옷자락의 추임새 등이 조금씩 다르다. 

노을이 져가는 바다를 뒤로 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그 버스 안에 붙어있는 ‘노선도’ 끝자락에 ‘함덕 서우봉 해변’이 있었다.
노을이 져가는 바다를 뒤로 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모험'과 '일상'의 관계


‘모험’은 수레바퀴 같은 ‘일상’과 어쩌면 ‘짝꿍’인지도. 아빠가 보고 싶다며 영상 통화를 통해서 수도 없이 하트를 그려주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지금 내가 누린 잠깐의 일탈을 더 빛나게 한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깨닫는다. 이제 나는 아무 때나 마음대로 버스에 몸을 실을 수도 없고, 공책에 수도 없이 그어져 있는 선들보다 훨씬 더 많은 법과 규정 그리고 의무와 책임 속에 살고 있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또 다른 자유를 선사하고 있음을.

일상이 허락하는 자유, 의무와 책임이 주는 자유가 일탈의 자유와 짝을 이룰 때, 그 자유가 진짜 자유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한다. 그렇게 ‘진짜 자유’를 누릴 줄 알게 되는 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일상'이 행복해야 '일탈'을 누릴 수 있다 


제주의 가을 바람이 시원하다. 여름내 피부에 와닿던 공기의 온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9월의 일탈이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사랑의 에너지를 발휘하느라 자기도 모르게 빛나고 있을 아내와, 사랑을 먹고 며칠 사이 더 부쩍 커 있을 아이들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나에게는 늘 반복되는 일상이기도 하면서 또한 늘 새로운 모험과도 같은 일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나는 그렇게 또 다른 일상의 여행을 떠날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나는 그렇게 또 다른 일상의 여행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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