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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Nov 08. 2019

어쩌면 좋니, 다섯살 아들의 레트로(Retro) 감성

조선시대와 고구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레트로 감성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10대 지원자들이 80~90년대의 곡들을 자신의 곡으로 완전히 소화해서 부르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그 때마다 ‘저 아이들은 저 감성을 진짜 이해하고 부르는걸까?’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보다 더한 녀석이 나왔다. 바로 우리 아들 녀석이다.


레트로도 어느 정도 레트로여야지. 이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문화 콘텐츠는 바로 ‘조선시대’ 콘텐츠이다.


1. 창가(唱歌)


처음 아들이 조선시대 문화를 접한 계기는 ‘창가(唱歌)를 통해서이다. 아이의 이모가 어렸을 때 잠깐 판소리를 배웠었는데 그걸 잠깐 아이한테 가르쳐주었었나보다. 처음 배운 곡은 ‘쑥대머리’였는데 그 구성진 가락을 생각보다 굉장히 잘 소화하는 걸 보면서 놀랐었다. 그렇게 동영상으로만 듣던 ‘쑥대머리’를 우연히 인천공항 면세점 구역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그 때 아들녀석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소리를 내고 있는 분의 손짓 하나까지 모두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눈빛은 어리다고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가벼움이 아니었다.

소리를 내고 있는 분의 손짓 하나까지 모두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눈빛은 어리다고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가벼움이 아니었다.


그 후, 아이가 이모에게 배운 노래는 ‘내 고향의 봄’이라는 창가였다. ‘뒷동~산 살구나 꽃은’으로 시작하는 그 노래는 결국 녀석의 동생, 우리 딸 소원이의 돌잔치에서 축하공연으로 불리워졌다. 어른들도 잘 모르는 창가를 녀석은 한복을 차려입고, 꽤나 프로답게 불러냈다. 놀라웠던 지점은 녀석이 어른들이 억지로 가르쳐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본인의 마음이 느끼는대로, 본인이 하고 싶은대로 했을 때, 우리는 그 아이에게서 모아지는 집중력과 폭발력을 느낄 수 있었다.


2. 한국을 빛낸 영웅들


‘창가’를 통해서 아들의 문화적 이해 수준은 시대를 꽤나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이의 시선이 옮겨질 때마다 그에 맞는 콘텐츠들을 제공했다. 그 중에 하나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원들’이라는 노래를 알려준 것인데, 그 때만 해도 이것이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인 줄 우리는 알지 못했다.

다섯 살, 보통의 남자 아이들은 이 때 영웅들에 열광하기 시작한다. 광선검 등으로 악당을 무찌르는 만화를 보며 눈빛이 같이 매서워지는 시기, 다른 아이들이 ‘터닝 메카드’, ‘스파이더맨’를 영웅으로 삼을 때, 우리 아들 녀석의 눈에는 ‘이순신 장군’이 들어왔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을 소개하는 그 노래의 가사는 매우 심플하다.


나라 구한 이순신


다른 인물들도 물론 대단하신 분들이긴 하지만 아내와 내가 듣기에도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설명은 말이 필요 없는 ‘영웅’의 그것이었다.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없이 ‘나라를 구한’ 영웅의 면모를 아들도 알아차린 듯 했다. 그 후, 아들은 위인전들을 읽어달라고 했다. 아내는 아이의 요청에 성심성의껏 응답했다. 그 결과 ‘이순신’, ‘세종대왕’이 그 중 가장 존경스러운 인물로 떠올랐고, 그 외에도 ‘광개토대왕’, ‘장영실’의 에피소드들을 꿰차게 되었다.


아이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본인이 존경하는 위인들이 살았던 시대의 문화들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위인전에 등장하는 고즈넉한 한옥집들과 한복, 그 안에서의 그들의 삶에 대해 늘 더 알기 원했다. 위인전은 그렇게 빨리 읽을 수가 없기 때문에 아이 엄마가 책을 읽어주느라 꽤나 고생했다.


3. 기와있는 집(한옥)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엄마, 아빠, 저는 기와집에서 살고 싶어요!


아들의 깊은 바람인데 살아보지는 못해도 큰 마음 먹고 하룻밤은 묵을 수 있겠다 싶었다.

우리는 알아본 끝에 남원에 있는 한옥 호텔을 예약했다.

한복을 입고 아들과 딸 아이가 뛰노는 것을 보니 마치 타임슬립이 되어 조선시대에 와있는 것 같았다. 확률이 높진 않겠지만 우리가 정말 조선시대의 넉넉한 양반으로 태어났다면 이러한 마당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광경을 보았겠구나 하는.. 묘한 상상까지 드는 행복한 곳이었다.

한복을 입고 아들과 딸 아이가 뛰노는 것을 보니 마치 타임슬립이 되어 조선시대에 와있는 것 같았다.


한옥호텔은 기본적인 보일러 시스템을 갖춘 상태에서 장작을 피워 온돌을 피우는 이중 난방 방식이었다. 아랫목은 얼마나 뜨끈뜨끈하게 지펴왔는지 방바닥이 새까맣게 타 있을만큼이었다.


4. 춘향가과 암행어사, 그리고 마패


호텔의 가장 히트작은 다름 아닌 ‘마패’였다. 호텔은 투숙하는 가정 단위에게 ‘마패’를 주는데 이 ‘마패’를 들고 주변의 관광지를 가면 별도의 계산 없이 관람권을 내어주는 것이다. 관광지들의 입장료가 그리 비싸지 않지만 뭔가 암행어사가 출두하여 문을 열어주는 듯한 묘미가 있다. 이것이 춘향가의 스토리와 함께 ‘암행어사’라는 또 다른 히어로를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남원은 모든 장소들이 춘향이몽룡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단결력 강한 도시이다. 우리의 여행은 아들에게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냥 책으로 읽어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으며, 발로 걸었다. 그 후에 전주 한옥마을에서 춘향가를 완창하는 자리에 간 적이 있었는데 녀석은 꽤나 긴 시간동안을 고어(古語)로 된 판소리를 들으며 춘향이의 이야기를 심상으로 재현해내고 있었다. 무대에서는 고수가 북을 치고, 명창께서 소리 높여 창을 하고 계셨지만 녀석의 눈빛 안에는 이몽룡이 마패를 들고 ‘암행어사 출두요!’라고 외치는 장면이 서려있었다. 모두들 허둥지둥 자신의 죄를 알기에 혼비백산 도망가는 정의의 구현 앞에 다섯 살 꼬마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일까.

그 후에 전주 한옥마을에서 춘향가를 완창하는 자리에 간 적이 있었는데 녀석은 꽤나 긴 시간동안을 고어로 된 판소리를 들으며 춘향이의 이야기를 심상으로 재현해내고 있었다.


레트로도 이런 레트로가 없다


그렇게 다섯 살 아들은 조선시대를 살고 있다. 그들의 문화에 심취해있고, 오늘도 진짜 마패를 사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우리 집에는 TV가 없지만 TV가 있는 집에 놀러가면 이미 시즌이 지난 사극들에서 채널을 멈춘다. 나도 90년대 문화를 사랑하는 80년대생 레트로 감성이라지만 이 녀석은 너무 과거로 회귀한 것 아닌가. 레트로도 이런 레트로가 없다.


하지만 이런 아이의 관심을 모두 존중하고, 아이가 좋아하는대로 길을 열어주는 아내 덕분에 나는 아들이 부르는 창가를 들으며 과분한 호사를 누린다. 그리고 녀석은 조선시대의 인물들을 사랑했지만 소속감은 고구려로 넘어가있다. 매번 칼을 차고 마음으로 만주 벌판을 호령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노라면 고구려의 크고 넓은 기상을 전수받는 느낌이다. 그렇게 우리는 수천년의 시간도 쉽게 거스를 수 있는 유연한 가족이 되어가고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 했던가. 아들이 보고 듣고 느낀 우리 민족의 과거는 새롭게 해석되어 아내와 나에게 다가오곤 한다. 과거와 대화할 줄 아는 녀석의 무지막지한 레트로 감성과 지혜가 호롱불처럼 이 아이의 길을 밝혀주길. 그가 좋아하는 이순신 장군과 광개토 대왕처럼 훗날 그가 사랑하는 분야에서 거침 없이 길을 개척해나갈 그 날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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