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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Nov 26. 2019

'셀프 장례식'은 어떨까?

결혼 문화도 변하듯이 장례 문화도 변할 수 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


유난히 장례를 많이 치른 지난 두 해였다. 


함께 하던 누군가를 이제는 볼 수 없다는 것. 가족들과 지인들에게는 아직 그 사실조차 믿기지 않는다. 모두 정신이 없지만 누군가가 (보통은 장남이) 미리 계약해놓은 상조회사에 연락한다. 장례지도사가 도착한다. 장례식장의 한 방을 잡고, 방에 걸려있는 LCD 화면은 고인의 성함, 나이, 자제 분들의 이름을 비춘다.

가족들이 상복으로 갈아입고, 상주의 팔에는 완장이 둘릴 때 쯤, 어디선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찾아온 사람들은 부의함에 자신의 봉투와 미처 오지 못한 지인들의 봉투를 넣는다.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유족들은 손님들과 맞절을 하고, 한 분 한 분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찾아온 손님들을 안내하여 음식을 차려 놓고, 고인이 어디가 아팠었는데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상세히 풀어놓는다. 누군가는 부의금의 액수를 기록하고, 누군가는 신발을 정리하며, 누군가는 상조회사를 상대로 얼마만큼의 음식들이 나갔는지를 체크하고, 또 누군가는 화환을 보낸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놓는다. 

밤이 되면 담배 연기가 자욱해지는 곳들도 많다. 유족들과 함께 밤을 지키기 위해 여기저기서 화투판들이 등장한다. 술과 화투가 정점을 이루다가 사그라들 때 쯤 아침을 맞고, 사람들은 장례 버스에 몸을 싣고 화장장에, 그리고 고인의 장지에 간다.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유족들은 손님들과 맞절을 하고, 한 분 한 분의 손을 잡는다.


가장 보통의 장례


우리 나라 가장 보통의 장례식의 풍경일 것이다. 믿는 종교에 따라 기독교나 불교, 또는 유교식의 부가적인 절차가 있을 수 있으나 위의 절차들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보통의 장례를 치렀다. 가족들은 서로 손을 맞잡으며 ‘수고했다’고 말하며 헤어졌다. 손주들에게는 수고에 못지 않은 수고비까지 들려졌다. 


다른 '이별의 방식'을 꿈꾸다


우리 돌아오는 차 안은 오랜 시간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깬 건 아내였다.


“고인을 기억하고, 슬픔을 나누는 게 본질일텐데 왜 가족들은 그럴 수 없는걸까요? 누구보다 가족들이 가장 마음 무너지고 정신도 없을텐데 그 순간에 다른 일(?)을 해야하는게 아이러니예요.”
“그러게요. 장례라는게 다 그렇게들 하니깐. 다른 방법이 있을거라고는 생각을 못하지 않을까?”

아내는 우리의 결혼식을 직접 설계하고, 셀프로 진행했었기에 장례식에 대해서도 조금 더 근본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결혼식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해주시고, 결혼식의 주인공을 신랑과 신부라고 생각해주신 양가의 식구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내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보면 서양의 장례문화가 본질에 좀 더 가까운 형태일수도 있겠어요. 영화에서 보면 그런 거 있잖아요. 지인들이 한 명씩 나와서 고인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놓고 회상하는 거. 가족들이 마음껏 고인을 기억하고 슬퍼할 수 있는 시간, 내 장례식은 그런 시간이였으면 좋겠어요”


영화에서 보면 그런 거 있잖아요. 지인들이 한 명씩 나와서 고인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놓고 회상하는 거


아내의 말을 들으니 나도 지인에게 들었던 우리와는 다른 장례식의 풍경이 떠올랐다.

“맞아요. 나도 현지에서 온 분들한테 들었는데 그 곳에서는 손님들이 돈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가져온다고 하더라구요. 유족들은 떠나가신 분을 추억하는데 집중하고, 손님들은 유족들이 충분히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대요.”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마음도 슬프고 정리도 안되었는데 손님 맞이하는 유족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파요. 결국 손님들 다 보내고 나서야 그런 시간이 주어지는 거잖아요. 위로해주러 오신 분들이 감사하긴하지만 손님들보다는 고인에게 집중할 수 있는 장례식을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늘 그래왔으니까' 하며 넘겨버리기엔 너무 소중한 이별의 의미


고단하고 분주한 우리의 삶, 그 삶의 마지막에서 고인을 떠나보내는 것 또한 분주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냥 늘 그래왔으니까’라고 넘어가기에는 물음표가 그려진다. 무엇을 하든 그것의 본질과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텐데. 우리는 가끔 그것을 잊고, 사회적 연대에 묶여서 본질적인 물음표를 지우고 사는 것 아닐까. 삶의 마지막을 장식할 때만큼만이라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지키면서만이라도 형식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각자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실천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결혼 문화'도 변한다


생각해보면 밀레니얼 세대들이 결혼을 하기 시작하면서 결혼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젊은 세대들은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했고, 그 본질과 상관 없다고 여긴 요소들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그들은 주례가 꼭 결혼식에 필요한지를 묻기 시작했고, 하객의 수가 많아야 좋은 결혼식이라는 공식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 의문들이 문화를 바꾸어나가고 있다. 어떤 문화가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다양성이 생긴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결혼의 의미가 다양한데 모두가 기계처럼 똑같은 결혼을 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생각해보면 밀레니얼 세대들이 결혼을 하기 시작하면서 결혼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이별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찌됐든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어려움의 순간에 사랑과 이별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이미 결혼 문화에서 그러한 다양성이 생겨나고 있듯이 장례에서도 그러한 다양성이 생겨나기를 소망한다. 


고즈넉한 '송별회'였으면


지금의 시대에 장례식을 셀프로 하는 것은 아마도 벅찰 듯도 싶다. 그래도 나와 아내가 떠날 때, 아들과 딸과 가족들이 손님을 맞느라 슬퍼할 겨를도 없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다. 장례식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저 고즈넉한 공간에서 담담한 '송별회'를 하는 상상을 하는 나는 너무 발칙한 것일까.


장례식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저 고즈넉한 공간에서 담담한 '송별회'를 하는 상상을 하는 나는 너무 발칙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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