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혹시 아날로그형 인간입니까?
나는 글씨를 잘 쓰는 편은 아니지만 여전히 자판이 어색한 사람이다. 글을 쓰고 나서도 이 글은 내 글이 아니라 ‘한글과 컴퓨터’社의 글 같은 느낌은 뭘까. 회의를 할 때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도 태블릿 PC에 내용을 정리하시는 것을 보면 실로 존경스럽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아마 내가 여전히 자판으로 쓰는 글이 어색한 것은 ‘내 손으로 직접 글씨를 써야 내 글이다’라는 명제가 무의식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명제는 ‘김치는 내 손으로 직접 담가야 맛이다’의 느낌으로 다가올런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생각을 정리할 때에도 나만의 빈 오프라인 공간에 나만의 방법으로 표현을 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아날로그형 인간인 것이다. 0 아니면 1이라는 판단들이 쌓이고 쌓여서 누적되는 자료들을 보면 조금씩 위태로워 보인다. 얼마 전 노트북에 하드 인식이 안 되어서 ssd를 교체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의 공간은 무수히 많은 자료들을 보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수만번 1을 출력하다가도 단 한 번 0이 되는 순간 내 추억과 기록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구나. 그 노트북에 중요한 것이 많이 담기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지만 나의 디지털 불신도는 여느 다른 젊은 사람보다 높은 것이 사실이다.
아날로그형 인간임을 알 수 있는 시그널들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라디오 애청자라던지, 고음질 mp3를 마다하고 LP판을 여전히 고집한다던지, 만년필 같은 것에 이상하리만치 가치를 부여한다던지. 수 없이 많은 아날로그형 인간의 특징들이 있겠지만 아날로그형 인간의 대표적인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손편지의 로망이 아닐까 싶다.
아날로그형 인간임을 알 수 있는 시그널들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아날로그의 꽃, '손편지'의 연대기
당신의 손편지는 언제 많이 쓰여졌는가?
아마도 내 기억 속에 손편지가 가장 활발했던 때는 군인 때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에야 군인들이 일과 후에 핸드폰을 손에 쥘 수 있다지만(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이 나에게는 여전히 판타지 같다) 이천오년의 군대는 그렇지 못했다. 휴가나 외출, 면회가 아니고서야 바깥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는 공중전화와 편지 밖에 없었다. 전화는 상대방과 나의 시간이 맞아야 했다. 군인들은 보통 5시경에 일과를 마치고 저녁 시간 즈음 공중전화를 잡을 수 있지만 사회에 있는 사람들은 한참 바쁜 시간일 수 있다. 바깥의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간절함은 보통 군인들에게 더 크지만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사회인들은 그러한 간절함에 감정이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온도차가 큰 통화들을 하다보면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더 큰 외로움과 상실감에 빠질 때도 있는 것이다.
휴가나 외출, 면회가 아니고서야 바깥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는 공중전화와 편지 밖에 없었다. 하지만 손편지는 다르다. 손편지를 쓸 때만큼은 온전히 상대방에게 집중하게 된다. 내가 아무리 바쁜 삶을 살고 있어도 편지를 대충 쓰지는 않는다. 손편지에는 정성이 있고, 사랑이 있다. 실시간의 통화로는 담아낼 수 없는 감성과 온기가 편지에는 오롯이 담겨있었다. 그렇게 꾸준하게 군인에게 손편지를 써 보내주던 사람들이 지금껏 참 고맙다.
군 휴가 때 처음 얼굴을 보았던 아내와 6년의 기다림 끝에 연애가 시작되던 무렵, 우리는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편지들을 주고 받았다. 우리는 둘 다 가벼운 연애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인생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사랑의 감정 그 이상의 것들을 글에 담아내야 했었다. 그동안 함께 해온 우리의 추억들, 앞으로 함께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할지, 우리가 추구해왔고, 앞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들. 막연하던 우리의 삶을 지면에 조금씩 채워나가던 그 시간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했다. 아내는 겉보기엔 냉철해보이지만 사실은 갈팡질팡하고 있던 나의 마음을 편지 한 통으로 차분히 정리해주었다. 애교 많은 평소의 모습과 달리 그 날 그녀의 손편지에는 몇 년간의 그녀의 생각과 마음들이 차분히 정제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그 편지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손편지를 쓸 때만큼은 온전히 상대방에게 집중하게 된다.
또 다시, 인생 손편지
그리고 얼마 전, 나는 또 다시 인생 손편지를 받아보았다. 손편지를 써 준 주인공은 바로 아들이었다.
아들에게 글씨를 붙잡고 가르치지 않았는데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녀석은 오며가며 보이는 글자들을 눈에 담아 글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글자를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내의 의도적인 교육 방침이었다. 글씨를 알게되면 아이의 생각이 텍스트 안에 한정되어 버릴까 우려한 것이라고 했다. 아이가 글자에 스스로 관심을 보이기 전까지는 글자에 구애받지 않고 아이의 상상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는 글을 읽기 시작하더니 곧 눈에 담긴 글씨들을 손으로 출력하고 싶어했다. 자연스럽게 빈 공책에 아이의 그림 같은 글씨들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획순은 의미가 없었다. 그저 눈에 박힌 글씨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아들의 글씨는 너무너무 귀여웠다. 아빠라서 그렇겠지만 ‘ㅁ’자를 약간의 굴곡을 가미하여 굴려내는 녀석의 필체는 구매하고 싶을만큼 개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것이었다.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녀석은 우리가 주문하지 않은 독자적인 글씨들을 써 내려갔다.
아들에게서 받아보는 첫 손편지의 내용은 다름 아닌 사랑의 고백이었다. 그 편지가 더욱 가치있게 느껴졌던 이유는 녀석이 누구의 도움도, 요구도 없이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과제로 엄마 설거지 도와주기를 하는 것도 감동이 있겠지만 아이가 자발적으로 우러나와서 하는 일이라면 더 감동을 하듯, 녀석의 손편지는 정제되지 않은 순수함과 진정성이 있었다.
손편지는 계속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손편지를 스캔해두었다.
스캔된 손편지는 디지털 회로를 통해 내 핸드폰 화면으로 출력된다.
언젠가 핸드폰에 담긴 이 사진파일은 없어지겠지만 녀석의 손편지는 고이고이 보관할 예정이다.
아날로그형 아빠를 둔 아들은 어떻게 자라갈까. 녀석의 손글씨는 언젠가 컴퓨터나 휴대폰의 '자판'으로 넘어가겠지. 그래서 손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한 이 순간, 아이에게 손으로 직접 쓴 글씨의 매력을 더 넘치게 알려주고 싶다. 아내와 처제는 아이가 편지를 써 줄 때마다 마음껏 환호성을 질러주었고, 그 환호성은 아이가 글씨를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는 매력을 더욱 더 느끼게 해주었다. 하루하루 녀석의 습작들이 생산된다. 그 종이 한 장 한 장이 너무나 소중하다.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보던 2020년이 밝았다. 부인할 수 없는 디지털의 시대, 이제 손편지는 없어질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손편지에는 마음이 묻는다. 마음이 묻고, 숨결이 깃든 편지들은 상자 속에 담겨도 마치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편지를 쓴 사람이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에도 편지와 기록들은 여전히 살아숨쉰다.
그동안 살아오며 인생 손편지들을 많이 받아보았지만 누군가에게 인생 손편지로 꼽히는 편지를 써보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서 반성이 된다. 누군가의 조그만 상자 속에 우리의 마음이 깃든 손편지들이 살아숨쉴 수 있다는 건 우리 인생에 주어진 또 하나의 행복이자 기회일 것이다.
그렇게 손편지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