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0년처럼 출산율이 0에 수렴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80년대에도 정부의 부단한 산아제한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많아야 형제가 두 명인 집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자라던 당시에도 내가 4남매 중 막내임을 밝히면 사람들의 눈이 동그래지고, 아버지가 목사님이시냐고 묻는 사람들도 꽤나 있었다.
나를 그냥 ‘막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싱거운 감이 없지 않다. 그도 그럴것이 엄마가 나를 낳을 때의 연세가 46세, 아버지는 47세였다. 이 정도 되는 아이들을 흔히 ‘늦둥이’라고 부른다. 정확한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노산’의 기준 나이가 변동하곤 한다. 21세기에는 ‘노산’의 기준 나이가 많이 상승했지만 2020년인 지금이라고 해도 ‘46세의 출산’은 평범한 일은 아닐 것이다. 1984년도에 46세였던 여성이 출산을 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용기를 내어야 했을 것이고, 이런 저런 사회적인 시선을 이겨내야 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엄마가 나를 낳을 때의 연세가 46세, 아버지는 47세였다. 지금은 80대가 되신 나의 어머니.
게다가 나는 바로 위의 형님과도 11살 차이가 난다. 그 위의 형님과 13살 차이, 그 위에는 누님인데 15살 차이가 난다. 누가 봐도 바로 위의 형님까지만 ‘계획 안에 있었던 출산’일 것이다, 나는 인간의 계획 범주 바깥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세상에 등장했다.
나는 ‘늦둥이’이자 ‘막둥이’였다. 늦어도 너무 늦었고, 막내 중에서도 '상막내'였다.
어른이 된 줄 알았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가 ‘막내’라는 것이 내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나는 10살 이상 차이 나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생활했고, 그들의 행동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고 살았기 때문에,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나에게는 집에서 하는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인데 사람들은 그것이 ‘어른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장녀(長女)를 만나다
나는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장녀’ 아내를 만나고 나서야 내 스스로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늘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식구들끼리 귀한 음식을 먹다가도 마지막 남은 것은 당연히 내 것이었다. 어려운 형편에 누나와 형들 생일은 건너뛰어도 내 생일날에는 제과점의 케이크가 밥상에 올라왔다. 특별히 표면적인 말썽을 피운 적도 없이 그저 내 앞가림만 잘해도 칭찬을 받는 조건에서는, 즉 사랑과 인정의 결핍을 경험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나도 내 실체를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핍이 있었다면 괴로워 하는 나의 모습을 인식하며 조금 더 일찍 실체를 알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장녀’ 아내를 만나고 나서야 내 스스로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시작할 수 있었다.
막둥이도 몰랐던 막둥이의 실체
장녀로 자란 아내와 지내면서 나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아내는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은 정말 습관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잠깐 흉내내는 것으로는 모방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에 반해 나는 늘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뼛 속까지 막둥이’였던 것이다. 막내가 막내스러운 것을 발견한게 뭐가 대수냐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수십년을 ‘어른 코스프레’를 하고 산 나로서는 굉장히 큰 반전이었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의 민낯이었다. 게다가 나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막둥이’가 아니었다. 나는 매일 사랑을 듬뿍 주어야 하는 가장이었다. 늘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이어야만 했던 나는 이제 그 무대에서 내려와서 철저히 뒤에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장남이든, 장녀든, 막내든 모두 몸에 배어있는 습관이다. 그것이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았다.
‘막내스러움’ 전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다. ‘막내’들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으며,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일수록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생이 없어도, 심지어 형제 자매가 없더라도 먼저 상대방을 배려해주시는 분들도 많다. 그렇기에 모든 막내와 장남, 장녀를 스테레오 타입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에게 있어서 ‘막내스러움’은 ‘가장’으로 살아가기에는 큰 핸디캡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었다.
'첫째'를 키운다구요? '막내'인 제가요?
그런 우리 집에 또 한 명의 첫째가 등장했으니 바로 우리 집 장남인 영원이이다. 그는 엄마의 뱃 속에 여동생이 생기면서 ‘첫째’라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38도의 폭염이 내리쬐는 9월의 타이페이를 셋이서 엄청나게 걸었었다. 여행 직후 녀석의 동생이 생긴 것을 알고, 아니 생겼을 뿐 아니라 그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생존해있음을 확인하고 얼마나 감사했었는지 모른다.
아들 녀석은 매일 같이 동생의 안부를 물었다. 동생은 언제 나오냐는 말을 하루에도 열 번은 더 했던 것 같다. 2018년 5월, 녀석이 그렇게도 보고파하던 동생이 나왔다. 아들은 네 살에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오빠’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아들은 네 살에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오빠’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아들은 여동생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무엇을 하든 무엇을 먹든 동생을 먼저 챙겼다. 둘째가 어느 정도 자라서 습관 형성을 위해 조금만 혼내려고 하면 둘째보다 아들이 먼저 울었다. 자신의 동생을 혼내지 말라는 것이다. 동생과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었던 아들은 심지어 동생의 곱슬머리를 공유하고 싶어 자신의 머리를 파마하기도 했었다.
무엇을 하든 무엇을 먹든 동생을 먼저 챙겼다.
나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삼십육년을 살아도 할 수 없는 그것을 녀석은 단 3년만에 해내는 것 같았다. 여동생이 아기일 때부터 혹시 크기가 작은 장난감을 입에 넣지는 않는지, 가위나 날카로운 물건이 혹시 여동생 주변에 있는지를 보는 것은 녀석의 몸에 밴 습관이었다. 아침에 여동생이 일어나면 아빠보다 먼저 가서 안아주고 뽀뽀해주는 오빠이다. 글을 스스로 깨우친 후로는 동생이 읽어달라는 그림책도 맛깔나게 읽어준다.
하루는 먼 발치서 두 녀석이 함께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딸이 서랍장 윗쪽에 꺼내고 싶은 물건이 있는지 까치발을 연신 들었다. 하지만 키와 시야가 닿지 않아 도리어 물건들이 딸의 머리 위로 쏟아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 찰나에 영원이가 나타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소원이를 감싸서 막아주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리 없는 딸은 자신의 몸을 통제하는 오빠가 미웠는지 거세게 밀쳐내며 항거했다. '살신성인'으로 구해주었는데 '적반하장'이 된 상황, 하지만 녀석의 얼굴에서는 억울함을 찾아볼 수 없었고, 여전히 동생에 대한 사랑이 묻어있었다. 동생의 항거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묵묵히 참아내는 모습은 우리에게 큰 감동이 되었다. '저런게 오빠구나. 오빠는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멋있는 존재구나' 싶었다. 하지만 동생은 오빠의 깊은 속을 알 턱이 없다. 소리를 지르다가 주저 앉아 억울한 표정으로 울고 있는 소원 양.
아빠: ‘소원아, 오빠가 너 위험할까봐 너 지켜준거야’ 엄마: ‘영원아, 동생 잘 돌봐줘서 너무 고마워~ 넌 정말 좋은 오빠야~’
아들아, 너는 동생이 있구나!
첫째인 아들을 보면서 그동안 내가 형제들에게 받았던 사랑과 인정을 떠올려보았다. 또한 아내가 자신의 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생각해보았다.
새삼 막둥이를 만난 죄로 다 큰 남자에게 여전히 우쭈쭈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아내에게 심심한 감사와 위로를 전한다. 어쩌면 첫째 녀석마저도 아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막둥이인 내가 오빠 중에서도 멋있는 오빠인 영원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쩌면 아이러니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동생을 자기보다 먼저 배려하는 우리집 첫째들처럼, 무의식적으로라도 먼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롭다.
이렇듯 동생 없는 막둥이는 오늘도 첫째를 키우며 산다. 나에게도 우리 아들 같은 형이나 오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을 해본다. 그러다가 베풀 생각은 안 하고, 이제는 아들에게까지 사랑 받고 싶은 욕심을 부리는 것 같아 스스로 면목 없이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