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 브런치'에 글을 쓴 이후의 변화들
브런치 작가가 된 지도 대략 1년 정도가 지났다.
브런치팀으로부터 브런치 작가가 된 것을 축하한다는 알람을 받은 것이 2018년 말이었으니 1년이 조금 더 된 셈이다.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이 곳에서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한 걸까?
가장 큰 변화는 그동안 나와 가족들, 가까운 지인들 정도만 읽던 내 글이 이제는 '대중'에게 읽힌다는 점일 것이다. 처음에는 내 글이 대중들에게 읽힌다는 생각을 그리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렇게 널리 읽히는 글을 써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 무게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첫 글들은 나의 아들, 영원이가 네 살 때, 엄마와 아빠 없이 중국에 다녀온 이야기였다. 이름하여 ‘네 살 아들의 나홀로 중국’. 나의 첫 연재글이자, 지금은 ‘브런치북’이라는 형태로 묶여있는 글들이다. 글의 화자는 정해져 있는데 글을 읽는 대상을 알 수 없는 묘한 상황의 글쓰기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시대와 공간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읽히고 있는 ‘누가복음’조차도 사실은 의사 누가가 데오빌로 각하에게 쓴 편지였는데 내 글은 누가 읽을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첫 글, 두 번째 글을 발행하자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경로를 알 수 없이 찾아온 익명의 사람들은 ‘다음 편을 기대하겠다’, ‘그래서 네 살 아들은 왜 중국에 혼자 보낸거냐’는 등의 고마운 댓글들을 달아주기 시작했다. 그 많지 않은 댓글들은 내가 계속 글을 써도 된다는 ‘허가서’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솔직한 글을 좋아한다. 솔직해야 글에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의 내면을 밥 주걱으로 싹싹 긁는다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 하지만 더 이상 내 글은 일기장에 담긴 일기가 아니었다. 댓글을 달아주시는 소중한 애독자 분들이 생기면서 얼굴조차 모르지만 글을 애타게 기다려주시는 한 분 한 분을 생각하며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연재하던 몇몇 글들의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조회수와 함께, 공유수, 댓글 등의 알림이 가쁘게 움직였다. 브런치 통계 기능을 통해서 원인을 살펴보니 글이 다음(daum) 포털의 메인에 올라가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때로 몇몇 글들은 브런치 에디터 분들에 의해서 추천하는 글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많은 분들에게 읽혀진 글들도 있다.
그것은 묘한 양자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먼저는 설레고 좋은 마음이 컸다. 일종의 ‘관종심’일 것이다. SNS를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은 다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면 굳이 대중들이 모여있는 온라인 광장에 글을 꺼내놓지도 않았을 터. 글을 내놓는다는 것은 대중들의 관심을 어느 정도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내 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것은 꽤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내 글은 솔직하게 쓰여졌고, 내 삶 뿐 아니라 가족들의 삶이 투영되어 있었다. 그동안 소중한 지인들과 삶을 나누면서 얻은 유익은 있었지만, 삶이 대중들에게 노출된 경험은 없었다. 그런 것은 그저 연예인들이나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 다음 메인 장식글은 그나마 이런 면에서 자유로웠다. 교육에 대한 내 개인적인 소신을 다룬 ‘한국에 사는 트루먼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꽤나 오랜 시간 다음 메인을 장식한 글이 있었으니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다’라는, 아내와 아이들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외할머님을 간호하며 보냈던 힘든 시간을 다룬 글이었다. 포털에 올라간 글은 하루 안에 무려 3만뷰 이상을 이뤄냈다. 미디어의 힘을 적지 않게 느꼈고,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다. 먼저는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계실 가족들에게 이런 소재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양해를 구하지 않은 결례가 매우 컸다. 다행히도 처가 식구들은 나의 글을 매우 좋아해주셨고, 장인 장모님을 포함하여 몇몇 어른들은 팬이 되어주시는 황송한 반응을 보여주셨다.
나는 대중을 향한 글쓰기를 함에 있어서 작가가 가지는 책무성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유명한 작가들의 자녀들이 자신의 삶은 마치 유리성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삶이 어느 정도 공개되어 있는 사람들의 고충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꾸준히 글을 썼고, 솔직함을 포기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는 ‘대중을 향한 글쓰기’라는 책무성도 같이 가지고 글을 쓰게 되었다. 마치 빵을 만드는데 필요한 누룩이 솔직한 내면이라면, 대중의 입장에서 한 번 더 글을 읽는 검토의 과정은 빵을 노릇하게 구워내는 오븐 속에서의 과정과 같았다. 이 부분에 있어서 아내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가 쓴 글이기 때문에 내 눈에는 글에 있는 군더더기나 자화자찬, 특정 사람들에게 혹여 상처를 줄만한 독소와 같은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천성적인 따뜻한 마음과 배려심을 가진 아내는 이 부분을 잘 보아서 피드백을 주었고, 내 글에서 온기를 불어넣어 주어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바쁜 시기에는 글을 잘 쓰지 못했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은 내 삶에 놓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얻은 수익은 전혀 없기 때문에 ‘비즈니스’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취미’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다. 글 쓰는 일은 1년동안 내 글을 계속 보고 싶다는 표현을 해주신 270명의 구독자들에 대한 ‘사명감’에 가깝다. 숫자가 많고 적음과 상관 없이 글을 좋아해주시는 독자들은 작가에게는 한 분 한 분 너무 소중한 분들이기 때문이다.
써 놓은 글들은 때로는 조용히 몇몇 사람들에게만 읽히다가 어떨 때는 여러 유통경로를 타고 공유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반응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 어떤 글들은 심혈을 기울였지만 별 반응 없이 묻히기도 했다. 일희일비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추어 작가에게 독자들의 반응은 거의 ‘유일한 당근’이기에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최근에는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출품했던 세 개의 브런치북들이 브런치 메인에 소개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학창시절에 백일장에서 상을 받은 글이 게시판에 공지되고, 학교의 교지에 실리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일으켜냈다.
또 한 가지 기쁜 소식은 2월 10일(월)에 최근에 쓴 글인 ‘인생 손편지를 받아보았다’가 브런치에 가입된 모든 가입자들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그 글은 아들에게 처음 받아본 편지와 그로 인해 소환된 과거의 손편지에 대한 기억을 풀어내 본 에세이였다. 이런 알람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읽지 않고 지나가는 스팸과 같은 메시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마음에 따뜻한 감동을 얻을 수도 있는 일이다. 어떤 엄마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그 글을 읽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직장을 은퇴하고, 여가 생활을 누리며 삶을 돌아보시는 누군가가 또 글을 읽고 아이를 키우던 젊은 시절을 회상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일들이 온라인이라는 도구를 통해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것이다. 나에게도 작가로서 그런 온기를 나눌 기회가 왔음을 인해서 큰 감사가 된다. 이것이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나서의 가장 큰 보람이 된다. 숫자의 많고 적음과 상관 없이 누군가의 마음에 또 누군가의 생각에 내 글이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나로 인해 누군가가 바쁜 삶을 잠시 멈추어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책 한 권 출판한 적 없더라도 이미 훌륭한 작가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월 10일 월요일, 당신의 카톡에 제 글이 날아들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