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로 '기부천사' 된 사연
때는 수년전, 초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연수를 담당하던 때의 일이다.
해당 영어연수는 교육청의 위탁을 받아 4개월을 국내에서, 1개월을 해외에서 진행하였는데, 실제로 교실 현장에서 영어 전담을 하고자 하는 선생님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20명 남짓되는 교사들, 각 영어권 국가 출신의 원어민 교수님들과 함께 호흡하며 진행했던 연수는 마음과 마음이 오고 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에겐 행복한 일이었다. 여기에서 교사들이 행복하게 배워낼수록 그 효과는 지역의 아이들에게 전해진다는 믿음으로 나는 그 일을 사명감을 가지고 해내고 있었다.
그 해 겨울, 지독히도 춥고, 눈도 많이 오던 그 해에 우리의 해외 연수 장소는 뉴욕 근처에 있는 대학교로 정해졌다. 뉴욕 안에 위치하지는 않았지만 버스로 20분이면 맨하탄 다운타운에 닿을 수 있었기에 특히 연수생들이 매우 좋아했다. 연수생들은 20대에서 30대 사이의 젊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뉴욕이라는 도시가 주는 낭만은 젊은 그룹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었던 듯 하다.
나에게 뉴욕은 두 번째였지만 첫 번째 방문은 가이드가 마음대로 ‘끌고 다니는’ 관광이었기에 나는 내 발로 걷는 뉴욕을 느끼고 싶었다.
공식 일정이 마무리된 주말, 나는 버스를 타고 맨하탄에 나왔다. 그런데 걷고 싶은 도시로 유명한 뉴욕은 최악의 한파와 폭설로 걷기 힘든 도시가 되어 있었다. 외지에서의 황량한 걸음은 이상하게도 뉴욕의 다양한 먹거리들이 아닌 따끈한 라면 국물을 소환시켰다. 왜 그렇게도 라면 국물이 생각나던지.
결국 어찌어찌하여 만원 짜리 한국 라면을 사 먹으니, 몸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조금 더 힘을 내어 타임스퀘어 한 복판을 향해 걸었다. 세계 각국 출신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 그래서 내가 어떤 모양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 군중들 속에라면 튀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자유로움 속에, 그 때까지만 해도 내가 어마어마한 ‘국제 호구’로 등극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국내에서만큼은 ‘호구’의 ‘호’자도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름 ‘경영학’을 전공하고, ‘백화점’에서도 근무해본 나는 고객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찾는데 매우 익숙하다.
그렇게 정당한 권리를 찾는데에는 첫째, ‘유창한 언어’가 필요하다. 둘째, 고객으로서의 권리가 무엇인지, 회사는 고객에게 무엇을 공급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셋째는 ‘기(氣)’인데 이것은 예의를 지키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포스로 표현되곤 한다. 나는 이런 조건들을 갖춘 인물이었던 반면,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우물쭈물 망설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심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타임스퀘어의 한복판에서 나는 하필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있었다. 자유로운 도시 한복판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예의주시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힙하게 차려입은 레게머리를 한 흑인 형님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중 한 형님께서 나에게 선물이라며 CD를 내밀었다. 그 때라도 이어폰을 빼지 말고 걸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체격이 건장한 그 형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냥 무시하고 걷기에는 이미 리스크가 너무 컸다. 나는 무심코 그 CD를 손에 받아들었고, 그 형님은 CD는 자신들이 창작한 랩인데 선물이지만 공연을 해야하니 도네이션을 받는다 했다. 그리고 택시와 교통사고가 나면 택시 기사들이 주변에서 하나 둘 씩 모여드는 것처럼 서서히 다른 래퍼들도 내 주변에 모여들었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음악가들이 길거리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줄 알았다면 눈을 안 마주쳤을 터이고, 혹시 실수로 CD를 받아들었다 할지라도 ‘죄송합니다. 다음에 살게요~’라고 하고 겸연쩍지만 당당하게 지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도시, 뉴욕이다. 내 눈 앞에는 주먹 한 방이면 내 얼굴을 뭉개버릴 수 있을 것 같은 형님이 서 계시다. 어쩌면 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오해가 생긴다면 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는 그럴 마음도 없을테고, 아마 순수하게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래퍼일 수 있다. 다만, 60년대 시골에서 갓 상경한 것처럼, 눈 뜨면 코 베어갈 것 같은 두려움이 순간적으로 나의 내면을 잠식했다.
OK. Thanks
나는 태연한 척 하며 10달러 짜리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 순간 주변에 모여들었던 다른 ‘뮤지션’들이 서로 CD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 상황은 노량진을 걷다가 전단지 하나를 받으면 순간 다른 전단지 10개가 모여드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문제는 노량진이었으면 ‘죄송합니다’ 하고 빠져나갈 수 있지만 여기는 뉴욕이고, 내 주변을 둘러싼 분들은 흑인 형님들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내 지갑을 다시 열었다. 내 귀한 달러들이 그들에게 자연스레 도네이션되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에는 대여섯개의 CD가 들려있었다. 심지어 CD에는 그들의 사인이 되어 있기도 했다. 그들은 손을 흔들며 몇 날 몇 시에 자기들 공연이 있으니 꼭 와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미지의 도시의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강제로 ‘기부천사’로 만들어주었다. 사실 흑인들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경험하고 보니 있었다. ‘그들과 괜히 오해가 생기면 좋을 일 없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어쩌면 편견 아니었을까.
‘랩은 중학교 때 졸업을 했는데, 다시 들어봐야 하나?’
현지에 있을 때는 플레이어가 없어서 못 듣다가 귀국하고 나서 CD를 몇 장만 들어보았다. 랩을 잘 몰라서 그들의 실력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가사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 때의 두려움이 다시 소환되는 효과가 있었다.
이 사건은 내 인생에 중요한 메시지를 남겨주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그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안전한 국가인 대한민국 안에서만 당당할 수 있는 나는 미지의 대도시에서 그저 한 없이 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인종에 대한 피상적 인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뉴욕이란 대도시에서 인종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물론 여전히 지나가다가 말을 걸거나 밤길에 휘파람을 부는 흑인들은 무섭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백인 중에도, 동양인 중에도 있다. 단지 얼굴의 색깔만 보고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나에게 뜻하지 않은 자기성찰을 해 준 그 형님들은 지금도 뉴욕의 한 복판에서 도네이션을 받고 있을까. 그 이름 없는 뮤지션들이 희망찬 오늘을 보내고 있기를 기원해본다.
그나저나 그 CD들은 지금 어디서 잠자고 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