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아카데미 수상에 가려진 본질
영화 기생충을 보고 왔을 때, 주변 사람들이 물었다.
그 영화 재밌어요?
나는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보통 ‘재미’인데 이 영화는 ‘재미’로 만든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묻는 사람들이 나의 구구절절한 영화평을 기대하고 묻는 것이 아닌 줄 알기에 그저 ‘영화가 훌륭했다’는 말로 구태여 질문의 표현을 바꾸어 일종의 동문서답을 했었던 터이다.
최근에 ‘기생충’의 연이은 수상 소식을 들으며 참 기뻤다. 헐리우드 스타와 감독들이 즐비한 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트로피를 든 채 주눅들지 않고 이야기 하는 모습은 마치 손흥민 선수가 수십미터를 뚫고 드리블하여 상대 팀 골망을 힘차게 흔드는 것과 같은 희열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희열은 봉준호 감독의 수상을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에 더 컸었던 것 같다. 봉준호 감독 스스로도 ‘아카데미 상’을 ‘로컬(local)’이라고 표현했을만큼 그 상은 미국인들의 미국인들에 의한 미국인들을 위한 잔치였다. ‘기생충’ 역시 미국에서 개봉하지 않았다면 수상은커녕 물망에도 오르지 못했을 터였다.
영화를 이루고 있는 언어의 차이도 있지만, 영화 내용적으로도 ‘기생충’의 수상은 의외다. 아카데미상의 주류인 ‘할리우드(hollywood)’는 어쩌면 자본주의가 만든 최고의 조형물과도 같다. 할리우드에서 ‘자본주의’란 체내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DNA와도 같다. 그런 곳에서 봉준호의 작품에 상을 주었다. 그것도 감독상과 작품상에 말이다.
봉준호 감독은 사회학도로서 그가 대학에서 공부했던 90년대 사회학과에서는 주로 맑시즘을 다뤘다. 그의 정치적인 색채와는 무관하게 그의 관심은 자연스레 계급론으로 흐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것은 자연스레 그의 작품 속에 녹아들었다. ‘설국열차’에서 계급의 수평적 구도를 형상화했다면 ‘기생충’에서는 계급의 수직적 구도를 보여주었다.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수많은 효용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구조악’에 더 포커스를 맞추었다. 게다가 그런 구조적인 ‘악’을 주인공들이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철저하게 고통당하고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재차 보여줌으로써 자본주의적 현실의 한계점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전혀 선동적이거나 감정을 짜내는 형태가 아니며 지나칠 정도로 담담하게 그러한 현실을 파고든다.
이것이 봉준호 감독이 트로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나에게 굉장히 역설적으로 다가왔던 이유이다. 그 역설적인 감정은 마치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악수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러나왔던 뭔가 어색하면서도 벅차오르던 감정과도 비슷했던 것 같다.
영화 ‘기생충’의 수상은 영화를 만든 제작자들과 영화 팬들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지 못한 대중들의 마음까지도 뜨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덩달아서 바빠진 사람들이 있다. 바로 지자체들이다. 영화의 60% 이상을 촬영했던 전라북도 전주시의 영화촬영소에는 박사장(이선균 분)의 저택이 있었지만 영화의 보안상 지금은 철거된 상태다. 경기도 고양시에는 기택(송강호 분)네 반지하 집이 있는 세트장이 있었다. 각 지자체들은 발빠르게 영화 세트장을 복원하여 관광코스로 개발할 계획임을 밝혔다. 한국 영화의 격을 높인 수상이니 세트장을 관광지로 만들어도 (적어도 몇 년간은) 많은 사람들을 관광객으로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마음 한 켠이 아려오는 것은 왜일까.
봉준호 감독과 배우들은 영화의 성공만을 위해 이 영화를 찍었을까.
영화 속에서도 결국 계급간에 그어진 선은 쉽게 허물어지지 못하고, 기택(송강호 분)은 근세(박명훈 분)가 그랬던 것처럼 기약 없이 지하실에 갇혀 살게 된다. 많은 관객들이 찝찝하고, 아릿한 마음을 가지고 상영관을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대성공을 거두고,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곳에서 찬사를 받는동안, 여전히 영화관들에는 독과점이 성행하고 있으며, 여전히 영화 판의 스탭들 중 일부는 최저 시급도 되지 않는 열악한 조건에서 일을 하고 있다. 정작 지하방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가난을 되물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가지 않은 채, 그러한 지하방을 관광으로 둘러보는 일이 곧 일어날 예정이다. 가난에 대한 관광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수는 없을 것이지만, 영화가 이야기했던 본질은 외면한 채, 영화의 글로벌한 성공에만 도취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일이다.
사족으로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뇌를 이식받아 통역을 한 것 같다는 호평을 받은 통역사가 있다. 언어와 콘텐츠 모두를 완벽하게 이해한 통역사의 이름은 샤론최, 한국 이름은 최성재씨라고 한다. 나도 영어를 잘 하고 싶은 사람 입장에서 그녀의 통역은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그녀가 이슈가 되자 연관 검색어로 그녀가 다녔다는 대치동의 학원들이 같이 검색이 되었다. 강남 지역의 외고를 나와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이력이 알려지자 그녀가 다녔던 학원에 상담 문의가 크게 늘었다는 후문이다.
이렇듯 영화의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영화적 메시지는 공허하게 맴돌고 있다.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계급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살고 있는 주거지와 차가 그의 삶을 대변한다고 믿는’ 미성숙한 사회적 인식은 정권이 바뀌고, 강산이 바뀌어도 쉽게 바뀔 수 없을 것이다.
글 한편을 쓰더라도 모든 독자가 그 본질을 다 꿰뚫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욕심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이 한 번씩은 보았고, 세계가 인정하는 영화가 나왔는데 영화가 말하는 현실은 변하는게 하나도 없다면 너무 슬픈 일 아니겠는가.
기택 네 집의 ‘가난’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시’되는동안 여전히 ‘기택’은 박사장네 집 지하실에서 신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