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90년대 초반의 서울 성북구의 산 동네는 정말이지 경사가 눈썰매장 못지 않았다. 눈이 쌓이면 아주머니들은 다 쓴 하얀 연탄을 깨서 길에 뿌려놓았다. 하지만 우리 어린이들은 엄마들이 그런 조치를 취하기 전에 반박자 먼저 움직였다. 비닐포대를 엉덩이 밑에 깔고 그 산동네를 내려오던 기분이란. 미세먼지 따윈 태어나기도 전의 맑은 서울 공기를 마시며 우리는 어른들의 출근길을 맨들맨들하게 만들어놓았다. 뽀송뽀송한 눈은 우리의 무게를 못 이겨 밀도가 높아졌고, 영하의 날씨에 보기 좋게 꽝꽝 얼었다. 이런 만행에 항거하며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시는 무서운 아주머니들도 있었는데, 혹 붙잡혀서 혼나는 기회비용을 치른다 하더라도 그 눈썰매는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같은 눈이 내렸지만 이십년 후의 눈은 달랐다.
2000년대 중반, 나는 쓸어도 쓸어도 줄지 않는 군부대의 눈을 쓸고 있었다. 군대에서의 2년은 인생과 조직 생활의 감정을 맛보기처럼 두루두루 맛보게 해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제설 작업’은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철학적 관념을 제대로 몸에 각인시켜주는 유익한 활동이었다. ‘제설작업’의 백미(白眉)는 함박눈이 며칠째 끊임없이 내릴 때이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눈이 쏟아진다. 어차피 눈은 쓸어도 다시 쌓인다. 합리적 사고가 몸에 베어있는 그 시대의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는 합당한 ‘의심’이 일어난다. 어차피 쌓일 눈은 우리는 왜 쓸고 있는 것인가? 눈이 모두 그친 다음에 한 번에 쓸어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철옹성 같은 조직과 구조의 힘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를 모두 차단시킨다. 결국 우리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고,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는 마음이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껏 눈을 쓸었다. 모든 의심의 구름이 걷힌 채로 머리와 마음을 비우고 눈을 쓸 때의 경쾌한 기분도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다.
2000년대 중반, 나는 쓸어도 쓸어도 줄지 않는 군부대의 눈을 쓸고 있었다.
군부대의 눈조차 무섭지 않았는데 정작 눈이 무서워지기 시작한 것은 운전을 하면서부터였다.
전주로 내려온 첫 해이자 직장 초년생이던 2009년, 운전면허 학원의 새벽반을 다니기 시작했다. 눈이 별로 오지 않는다던 전주는 매일 밤마다 폭설이 내렸다. 마치 내가 눈을 다 몰고 온 것 같았다. 밤 사이 꽝꽝 얼어있는 도로가 나의 연습 대상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가장 난이도가 높은 연습을 매일 할 수 있었다.
눈이 무서워지기 시작한 것은 운전을 하면서부터였다.
결국 눈에 대한 낭만은 출퇴근과 함께 사라져갔다.
눈이 오면 아이들은 반가워하는데 어른들은 더 이상 반가워하지 않는다. 무엇이 어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어른들은 눈이란 녀석이 생계 활동을 방해하기 때문에 미워했던 것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비닐포대를 깔고 눈썰매를 타는 우리를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셨던 아주머니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그 골목은 눈썰매장이었지만 그녀들에게 그 길은 남편의 출근길이었다.
낭만이 사라져가는 나와 달리, 아내는 여전히 눈이 오면 설렜다.
10월에 신혼여행으로 찾았던 스위스는 이미 하얀 나라였다. 덕분에 융프라우에 올랐어도 눈보라 밖에 보지 못했다. 하지만 따스한 햇빛이 내린 눈에 반사되어 부서지던 뮤렌의 기억은 마음에 남았다. 결혼 3년차이던 어느 날 밤에도 우리는 밖으로 나와 하염 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다보았다. 아이가 없던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낯설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전히 막막하고 어려운 마음을 부여잡고 나왔는데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이상하게도 우리의 마음을 만지고 위로하는 것 같았다.
따스한 햇빛이 내린 눈에 반사되어 부서지던 뮤렌의 기억은 마음에 남았다.
2020년 겨울, 눈이 희소해졌다.
희소성으로 재화의 가치가 정해진다는 지구별이라 눈이 마치 밀당을 하는 것 같았다.
SNS에서는 첫 눈이 왔다는 제보가 심심찮게 올라오는데, 군대에서나 운전 면허 딸 때 오지 말라고 애원해도 하염없이 오던 눈은 마치 씨가 마른 듯 했다.
아들 녀석은 말을 할 줄 알기 전부터 눈이 오는 것을 좋아했다. 회사에서 일하는 중에 받은 아내의 메세지 속에서 창문 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면서 팔을 허우적거리며 좋아했던 녀석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올해 세 살이 된 딸도 이제 눈놀이에 출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2월 17일 아침, 눈을 떠서 거실로 나왔는데 베란다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이 낯설었다.
오랜만에 보는 하얀 나라, 아내는 서둘러 아이들을 무장시키기 시작했다. 손에 비닐장갑을 먼저 끼우고, 그 위에 털장갑이 끼워졌다. 방수패딩장갑이 있었지만 눈싸움을 하기에는 너무 둔하다는 판단이다. 털장갑만 끼면 차가운 눈이 금방 손에 스며들어 손이 얼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아내는 비닐장갑과 털장갑의 조합이 가장 최상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아이디어에 감탄하며 밖으로 향했다.
아파트 단지의 사람들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우리가 눈사람을 만드는 것을 흘겨보았다. 어른들은 슬쩍 보고 지나치는데 어떤 아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물론 엄마가재촉하기 전까지 말이다.
내리는 눈이라서 잘 뭉쳐지지 않았다. 우리는 크게 만들고자 하는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나는 동그랗게 뭉쳐지지 않은데 아내와 아들은 예쁘게 한 덩어리씩을 만들어 서로 합체를 했다. 예쁘고 조그만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집에 올라온 눈사람은 파와 부추를 키우고 있는 화분으로 옮겨졌다. 색종이를 조그맣게 오려 눈, 코, 입을 붙여 주었다.
눈사람은 간밤에 겨울왕국의 올라프처럼 소멸했다. 붙여두었던 눈, 코, 입만 화분 흙 위에 가지런히 남았다.
눈사람의 소멸 과정
2월 18일이었던 오늘, 눈은 그치고 따사로운 햇볕이 눈을 빠르게 녹이고 있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이 없었다. 가까운 공원으로 나갔다.
햇볕을 먹은 눈들은 이제 잘 뭉쳐지는 성질로 잘 변해있었다. 굴리면 굴리는대로 불어나는 눈덩이 덕분에 오늘은 꽤나 큰 눈사람을 만들 수 있었다. 아빠가 굴려낸 눈덩이가 밑으로 내려가고, 아들이 굴려낸 눈덩이가 위로 올라왔다. 나뭇가지 팔이 양쪽에 꽃혔다. 소원이보다 조금 크고, 영원이보다 조금 작은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아내는 소중한 추억을 예쁜 사진에 담았다.
과거의 눈과 지금의 눈이 마음 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좋은 글들을 읽고 구독하듯 우리의 마음 속엔 눈(눈)을 구독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올랐다. 지구가 따뜻해져서 점점 사라져가는 눈은 이제 우리에게 더욱 귀하다. 구독해놓고, 올 때마다 즉시 열람해보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