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음 Mar 24. 2020

이런 걸 어떻게 결재를 받아냈지?

조직에서 '틀을 깬다는 것'

조직에서 '틀을 깬다는 것'


‘틀을 깬다는 것’은 사실 누구에게나 어렵다. 더군다나 정해진 공간과 커리큘럼 안에서 학습을 해 온 우리 나라 같은 환경이라면 사실 더더욱 어렵다. 이렇게 틀 안에서 자라온 젊은이들에게 ‘틀을 깨고 도전하라’는 메시지는 사실상 공허하고 피상적인 넌센스에 가깝다. 게다가 정작 틀을 깨고 신선한 콘텐츠를 선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조직의 ‘결재라인’을 통과해야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시장(market)에 도달하기도 전에 편집될 가능성이 큰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편집만 되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혁신적인 생각은 틀에 적응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모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우리 말에 ‘모난 정이 돌 맞는다’고 했듯이 혁신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조직에서 환영받기 어렵다. 틀을 깨는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고스란히 자신의 일로 돌아오는 경험을 하게 되거나 부정적인 피드백만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혁신적인 사람은 포기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조직에서의 삶’을 포기하거나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포기하거나.      


이런 걸 어떻게 결재를 받아냈지?

 

나는 아이들을 재울 때 자장가를 트는 용도로 주로 유투브를 사용하는 소극적 유저이지만 최근에 팬이 되어버린 유투브 채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충주시의 유투브이다. 

최근에 팬이 되어버린 유투브 채널이 하나 있다.(출처: 충주시 유투브)


이 채널은 충주시의 홍보담당자가 운영하는데 이른바 ‘B급 감성’의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나오는 사람들은 주로 충주시의 젊은 공무원들이다. 특별할 것은 없고, 각 읍면동이나 시청에서 시설직, 녹지직, 회계직 등 각자의 보직에 맞게 그저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는 리얼 공무원들일뿐이다. 딱히 시청을 홍보하고자 힘을 들이거나 과장된 MSG를 치지 않는 것이 영상들의 매력이다. 채널 개설의 명분을 예쁘게 포장해서 어필하기보다 그냥 ‘시장님이 시켜서’ 유투브를 시작했다는 첫 영상부터가 범상치 않다. 출연하는 공무원들은 서로 안부인사처럼 ‘초과근무를 몇 시간 했는지’, ‘혹시 이성친구가 생긴 것은 아닌지’, ‘혹시 사람들 모르게 꿀을 빨고 있는 건 아닌지’ 등을 묻는다. 조명이나 음향이 뛰어나거나 출연하는 사람들의 버프를 받는 것도 아닌데 구독자 수는 7만명이 넘는다. 

그냥 ‘시장님이 시켜서’ 유투브를 시작했다는 첫 영상부터가 범상치 않다.(출처: 충주시 유투브)


왜 충청도의 한 중소도시의 시청 채널이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게 된 것일까?     


과연 이런 영상을 부서장이 결재를 해 주었을까?   


이것이 조직에서 오래 몸 담았던 필자로서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이었다. 충주시의 결재라인에서 이런 ‘B급 감성’을 이해하고 지원사격을 해주었을까? 어떻게 이런 영상이 ‘충주시’라는 지자체의 이름을 달고 업로드가 될 수 있었을까? 이러한 호기심에 영상을 하나하나 클릭하다보니 어느새 거의 모든 동영상을 다 보고 말았다. 마치 필자의 또래 공무원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꾸밈 없는 매력에 한창 빠져 몇 번 가본 적도 없는 충주시의 행정을 두루두루 훑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대학 홍보동영상에 꼭 나오는 장면들

       

몇 년 전, 한 네티즌이 대학 홍보동영상에 꼭 나오는 9가지 장면이라는 콘텐츠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공감이 되었는지 모른다. 일단 학교를 상징하는 새나 동물 등의 조각상들이 먼저 웅장하게 등장한다. 그리고는 학생들이 활동적으로 캠퍼스를 누비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꼭 한 명이 늦게 달려와 합류한다는 디테일까지 똑같다. 다들 우아한 표정으로 서가에 기대어 책을 읽는 풍경도 빠질 수 없다. 잔디밭에 앉아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데 이 때 꼭 외국인 학생이 포함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고는 뜬금 없이 하늘을 응시하다가 카메라와 아이컨택을 하는 것까지. 

몇 년 전, 한 네티즌이 대학 홍보동영상에 꼭 나오는 9가지 장면이라는 콘텐츠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공감이 되었는지 모른다.(출처: 크랩 페이스북)


그저 그런 콘텐츠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러한 영상들은 테크닉과 영상의 퀄리티 등 모든 것이 완벽하지만 정작 대학의 소비자인 고등학생들의 마음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10대는 정보에 있어서 소외계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10대는 그렇지 않다. 물론 여전히 이러한 영상을 보며 대학에 대한 로망을 불태우는 아이들도 소수 존재하겠지만 실제 대학 생활에서 별로 일상적이지 않은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이미지 메이킹으로는 아마도 실리적이며 개인적인 10대 타깃에게 소구되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러한 영상들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핵심적인 원인은 10대가 향유해야 할 콘텐츠를 10대가 아닌 사람들이 고민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담당자는 다르게 생각하고 그 틀을 깨는 방식으로 제작하려고 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철옹성 같은 구조의 압력이 작용한다. 물론 특수한 리더십에 의해서 담당자 개인이 마음껏 창의력을 발산하도록 허용되는 사례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설사 그러한 신뢰를 받는다하더라도 조직의 이름을 달고 생산되는 콘텐츠의 파급과 부작용을 담당자 개인이 오롯이 책임지는 것도 역시 어렵다. 결국 담당자는 틀을 깨기를 포기하고, 틀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고의 퀄리티를 내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최고의 퀄리티마저도 결재라인을 타는 와중에 이리 저리 손질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과물은 이미 너덜너덜하고 둥글둥글해져서 그 어떤 타겟에도 다가가지 못하는 콘텐츠가 되고 만다.    


  

'충주시 유투브', 미라클의 비결


위의 사례와 비슷한 직간접의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충주시 유투브의 미라클이 훨씬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나중에 한 언론매체에서 충주시 홍보담당자를 인터뷰한 것을 통해 알게된 사실인데, 사실 이 담당자분도 부서장의 결재를 받고 올린 영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유투브 채널의 시작은 시장님에 의해서 탑다운으로 시작이 되었다. 원래는 유투브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시장님께 예산과 인원 보충을 받을 생각으로 보고를 들어갔다가 인원 보강 없이 기존 인력으로 유투브를 하라고 지시만 받았다고 한다. 업무가 하나 더 생겨버린 김 주무관님은 남들과 똑같은 콘텐츠로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지식보다 용기가 조금 더 있었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지식과 감성을 저예산 콘텐츠로 만들었다. 하지만 당장 직속상사의 결재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상사에게 보고 없이 그대로 올려버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혼나자 다음에는 카톡으로 보고하고, 읽기 전에 업로드를 했다고.(인터뷰 내용: https://youtu.be/pVbbEQOtDlw) 

사실 이 담당자분도 부서장의 결재를 받고 올린 영상이 아니었다고 한다.(출처: 충주시 유투브)


조직과 결을 같이 하지 않는 혁신의 기회 비용


결과도 좋았고, 충주시도 예산 별로 안들이고 홍보가 많이 되었으니 지금에야 구성원들이 대놓고 뭐라고는 안 할 것이다. 다만,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지금도 그는 조직의 기성세대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꽤나 크다. 한 배를 탄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까지는 용인될 수 있다 치더라도 그는 그것을 별도의 상의 없이 행동에 옮겨버렸기 때문이다.    

  


정말, 진짜로 혁신을 원하시나요? 


정말 조직에서 틀이 깨지기를 원하는가? 진짜로 혁신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혹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이 ‘진짜’인지부터 돌아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보통은 말로만인 경우가 더 많으니까. 일반적인 사람들은 변화와 혁신을 그리 즐기지 않게 마련이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고, 용기있게 시도하는 사람을 그저 '별난 사람', ‘모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기로 하자. 그는 어쩌면 맨 손으로 캐시카우(Cash Cow)를 잡아오는 숨은 영웅인지도 모른다. 물론 당신이 알아봐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는 어쩌면 맨 손으로 캐시카우(Cash Cow)를 잡아오는 숨은 영웅인지도 모른다. 물론 당신이 알아봐주기만 한다면 말이다.(사진은 최배달 옹)


매거진의 이전글 '애사심'은 '연봉 순'이 아니잖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