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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r 27. 2020

'한국'이라는 원더랜드(wonderland)

'이상한 나라'가 '이상적인 나라'가 되려면

KOREA, Wonderland? 참 이상한 나라


‘KOREA, Wonderland? 참 이상한 나라’라는 제목의 유투브 동영상이 일주일만에  327만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필자도 영상을 보면서 울컥하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빛 바랜 천으로 한 땀 한 땀 바느질하여 만든 마스크 20개를 기부한 할머니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영상은 우리 국민들이 이번 뿐 아니라 IMF로 인한 외환 위기에서부터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등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힘을 합쳐 슬기롭게 이겨냈음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이야기했던 ‘보이지 않는 손’은 천재지변이 없는 평온한 상태에서는 가장 지혜롭게 작용해왔지만 루틴이 깨진 상태에서는 균형 있게 작동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금융가의 거품으로 일어났던 일들과는 차원이 다른 바이러스發의 재앙 앞에 그동안 서구의 자본주의가 그렇게 신봉해오던 작동 원리마저도 별다른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불리우던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속수무책으로 바이러스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아니, 그보다 바이러스로 인해 촉발된 생존 본능과 이기심, 혐오와 분노에게 사회의 키를 내어 주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한국은 왜 '이상한 나라'인가?


‘시장 실패’를 우리는 세계 역사 속에서 몇 차례 경험해왔지 않았던가. 1930년대, 대공황 때가 그러했고, 1997년 말, 우리 나라의 외환위기도 겪었고, 2008년 세계 글로벌 금융위기도 겪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시아의 극동에 자리잡은 한 나라에서는 이상하게도 실패의 위기 순간마다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당연한 시도를 억제하고, ‘공동선’을 먼저 추구하려는 기현상을 보여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정말 대한민국은 서구의 여러 나라를 앞서가는 선진국인 것일까?




국난 극복(國難 克復)의 역사(歷史)


우리 나라의 역사를 되돌아 보았을 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려움이 있을 때만큼은 온 국민이 한 마음이 되어 국난을 극복해왔다는 것이다. 그 어떤 저명한 경제학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집 장롱에 모여있던 금붙이들을 나라에 무상으로 가져다 주는 국민들을 이론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6세기에는 아녀자들까지 자신의 치마에 돌들을 담아 날라 이긴 전투가 있었는가 하면 20세기 초반에는 당신들의 목숨을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국권 피탈의 아픔 앞에 일제의 총칼 앞에서 만세를 외치지 않았던가. 

국난 극복(國難 克復)의 역사(歷史)


'저력(底力)'은 과연 '실력(實力)'일까?


이 상황은 마치 과거의 국가대표 축구 경기와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한국 축구의 2002년 월드컵 이전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늘 먼저 선제골을 허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 팀은 항상 선제골을 허용한 이후에 되살아났다. 정신력에 근간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한국 축구의 저력'이라고 불렀다. 선제골을 내주고,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지고 말 것이라는 각성이 선수들에게 강인한 힘을 선물한 것일까. 꼭 대표팀은 폭풍같이 몰아붙여 축구 강대국을 상대로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내곤 했다. 하지만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승리까지 이어진 경기는 2002년 이전에는 단 한 경기도 없었다. 

정신력에 근간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한국 축구의 저력'이라고 불렀다.


한국이 비로소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정신력’을 핵심역량으로 하던 과거의 체질을 청산하고, 체계적인 리빌딩을 했기 때문이었다. 낯선 나라, 화란(和蘭)에서 건너온 감독은 선배가 윽박지르고 후배가 눈치보던 구조를 수평적으로 바꾸고, ‘정신력’에만 기대던 대표팀에 ‘기초 체력’을 함양시켜 꼭 골을 먹지 않아도 움직일 수 있는 팀을 만들었다. 개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서구의 팀들과 달리, ‘팀’을 중시하는 우리 선수들의 태도는 감독의 전술을 이식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이렇듯 감독은 월드컵 무대에서 상대적으로 최하의 연봉을 받는 선수들을 데리고, 가장 유기적인 팀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정신력’을 핵심역량으로 하던 과거의 체질을 청산하고, 체계적인 리빌딩을 했기 때문이었다.


위기 탈출 능력은 분명 선진국이 갖추어야 할 기본 요건임은 분명하지만 위기를 잘 탈출한다고 해서 선진국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골을 먹고 나서 각성된 선수들의 상태를 보고 그것을 대표팀의 실력이라고 말하는 외신들은 없었다. 그저 ‘약체팀의 분전’ 정도로 보도되었을 뿐이다. 


코로나 또한 지나가겠지만.. 종식(終熄) 그 후(後)가 더 중요하다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해온 우리 역사를 보고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국민으로서 굉장히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끝내면 안될 것이다. 임진왜란도, 일제강점기도, IMF도, 사스도, 메르스도 언젠가는 끝이 났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었다. 아마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를 모를 뿐 코로나 바이러스도 시들해 질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저력이 실력이 되려면 바이러스가 종식되고, 평상시로 돌아간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쉽게 모방 불가능한 대한민국의 인프라 세 가지,  그리고 양면성


우리 국민들이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 어떤 나라도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인프라가 있다. 

첫째, 우리는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서 모여사는 나라이며, 온라인 네트워크는 오프라인보다 더욱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나라이다. 이것은 소수의 아이디어가 전 국민으로 쉽게 확산될 수 있는 차별적인 인프라이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서 모여사는 나라


둘째, 우리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더 중시하는 가치관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셋째, 다문화 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에 있긴 하지만 아직은 단일민족이라는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거주 지역의 정체성과 배타성도 여전히 강한 편이다.


이 세 가지의 인적, 물적 인프라는 사실 양날의 칼이다. 


첫 번째 인프라는 사회적 연대와 협동이라는 선한 가치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같은 인프라를 타고 가짜뉴스와 음란물들이 오늘 이 시간에도 유통되고 있다. 소수의 여론이 순식간에 국민여론으로 번지기도 쉽다. 

두 번째 인프라는 요즘 같은 국난의 상황에서는 장점으로 발휘되지만 평상시에는 단점으로도 활발하게 작용되기도 한다. 수많은 직장에서는 여전히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며 ‘공동체’의 이름으로 희생되는 ‘개인’들이 존재한다. 사회에는 가상의 ‘일반적인 사람’이 상정되어 있기에, 그 ‘일반’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모난 사람’들로 여전히 인식되기도 한다.

셋째 인프라인 ‘단일민족’이라는 배타성 역시 우리끼리의 협동심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글로벌 사회에서 섞이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한계로 작용하기도 하며, 때로는 극심한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역 갈등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영원한 숙제이다.


대한민국, 참 이상한 나라


우리나라는 분명 이상한 나라가 맞다. 이상하다는 것은 보통의 나라들이 따라할 수 없는 차별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한 우리 고유의 특성들이 지금 이 순간, 세계 무대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빛나고 있다. 헬조선 탈출을 외치며 태평양을 건넜던 많은 사람들이 다시 고국을 그리워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전쟁 중에 핀 꽃이 한 번 흘러가는 물결이나 바람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 국민들의 정신력이 국난(國難)의 상황 뿐 아니라 평시(平時)에도 발휘되려면 어떤 체질 개선이 필요한 것인가를 미리부터 고민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상한 나라(wonderland)'가 '이상적인 나라(ideal land)'가 되려면


잘 단합되고, 뜨거운 마음을 가진 우리의 사회가 불순한 여론 조작에 호도되지 않고, 끝까지 지혜를 잃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할까?

서로의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며 무조건적으로 ‘공동체’에 ‘개인’을 맞출 것을 강요하는 사회적 인식은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 창의적이고 틀을 깰 줄 아는 인재들을 우리의 공교육은 과연 키워낼 수 있을 것인가?

지역 간의 극도의 배타성, 그리고 바이러스로 더욱 공고해진 민족간의 배타성과 혐오감은 어떻게 다시 풀어가야 할 것인가? 


위기 속에서 달라진 우리의 위상은 분명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다만 그 위상이 전시(戰時)가 빚어낸 시대의 산물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국난을 이겨낸 후에 우리 젊은이들의 입에서 다시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오르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를 다시 정의해야 할 것이다. 


위기는 분명 기회이다. 양날의 칼처럼 양면성이 있는 우리의 민족적 특성들이 계속해서 장점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끝까지 힘쓸 수 있었으면 한다. 


멀지 않은 훗날, '이상한 나라'가 아니라 '이상적인 나라'로 우리를 소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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