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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Apr 14. 2020

‘일상’이 사라졌는데, ‘행복’할 수 있나요?

'코로나'가 쏘아올린 '행복론(幸福論)'

캠퍼스에 찾아온 '봄' 같지 않은 '봄'


오늘도 훈훈한 바람에 벚꽃 잎이 머리 칼에 묻어나는 완연한 봄날이었다. 늘 4월에는 그런 따뜻한 바람이 불었었다. 캠퍼스에는 시끌벅적하면서도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는 학생들이 가득했었다. 보이는 모든 건 그대로인데 캠퍼스에는 해맑은 웃음소리와 학생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져있었다.

오늘도 훈훈한 바람에 벚꽃 잎이 머리 칼에 묻어나는 완연한 봄날이었다.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교수님께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학교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서 불평하던 누군가에게 넌지시 던진 말씀이었다.


그래도 감사하지 않은가요?
그만큼 학생들과 원생들로 캠퍼스가 북적인다는 것이니까요.
학생들의 부재(不在)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압니다.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요.


그 분이 전에 재직하던 대학은 재단의 열악한 재정과 지배구조 때문에 결국 문을 닫았던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몸소 하신 분에게 주차장에 가득 찬 자동차들은 불평의 대상이 아닌 감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휴업'과 '휴직'을 결정하다


며칠 , 비상근 이사로 겸직 중인  회사의 휴업 결정을 내렸다. 사범대학에 있을 때, 학생들의 취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학교의 도움을 받아 창업했던 방과후학교 회사였다. 처음 회사에 들어왔던 사범대생들은 9년이 지나 어엿한 중견 직원이 되었고, 지역사회를 무대로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의 여파로 학교들의 개학이 기한을 알 수 없이 미루어져버렸다. 방과후교과의 특성상 온라인 수업도 불가능했다. 현장이 존재하지 않는 행정 조직은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었다. 고용노동부에서 직원들의 급여 일부를 보전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기에 직원들이 입는 재정적인 피해는 어느 정도 최소화할 수 있었지만 쉴 새 없이 달려온 그들에게 주는 보상이라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불현듯 찾아온 '일상의 부재(不在)'


이렇듯 우리는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을 하나씩 양보하기 시작했다. 봄이 왔지만 미취학 어린이들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가지 못한다. 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온라인으로 개학을하고 보다 더 많은 시간을 독서실과 까페, PC방 등에 사용한다. 특별한 근무방식이었던 재택 근무가 일반적인 근무 형태로 떠올랐고, 프리랜서들과 자영업자들은 매일 생계를 위협받는다. 평생동안 순수하게 기독교 신앙을 가져오던 분들도 처음으로 공예배가 중단된 교회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상의 부재(不在)'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늘 누리고 살던 일상이 사라졌다. 우리는 일상의 부재 속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일상의 부재를 또 다른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워진 일상에 행복을 담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사라진 일상이 돌아와주길 기다리며 행복을 잠시 유예해둘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행복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을 바라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만큼 지금의 환경 변화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극적인데다가 언제 다시 회복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현재의 상황을 압도해버리기 쉽다.

이 글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촉발한 일상의 부재를 또 다른 일상으로 받아들인 분들보다는 일상의 결핍(缺乏)을 묵상하며 곱씹고 있는 분들을 위해 쓰여졌다.

이렇듯 우리는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을 하나씩 양보하기 시작했다.

 '결핍(缺乏)'과 '부재(不在)'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그저 우리의 삶에서 행복을 앗아가는 부정적 상황이기만 할까?


'결핍(缺乏)'의 유익


‘결핍’은 여전히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지만 도리어 우리의 좋은 선생이 되어 주기도 한다. 인간은 결핍과 상실을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곤 하는 것이다.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은 결핍과 상실을 전제로 두고 있다. 우리집 아이들은 아침 7시면 눈을 뜨고,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다. 조금 더 잠을 청하고 싶은데 아이들이 일찍 일어나 깨울 때, 나는 때로 아이들 없이 늘어지게 늦잠을 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는 아이들이 진짜로 사라져버린 일상을 상상하곤 한다. 생각하기 싫지만 아이들의 부재에 대한 성찰과 상상은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를 깨닫게 해주곤 한다.


처음 먹을 때의 '행복'과 똑같은 것을 계속 먹을 때의 '불행'


‘한계효용’은 본디 ‘체감’한다. 오죽하면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법칙’이라고 부르겠는가. 처음에 맛있었던 음식도 계속 먹으면 맛이 없어진다.

부끄럽지만 나는 결혼생활 8년만에 요리를 시작했다. 막상 시작해보니 그동안 막연한 두려움으로 주방에 들어와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그런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했던 요리에 아내와 아이들도 진심으로 반응해주었다. 아빠가 음식을 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환호성을 지르고, 먹다가도 춤을 추며, 나에게 와서 뽀뽀를 해 주었다. 아내는 내가 요리를 하게 되어 너무 좋다며 맛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자 나는  이상 새로운 메뉴를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좀 더 부지런했더라면 가능했겠지만, 이제  이상 아이들의 환호성을 불러일으킬만한 새로운 메뉴가 떠오르지 않았고, 전에 했던 메뉴를 되풀이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환호성은 서서히 줄어갔고, 일주일에 네다섯번 같은 메뉴를 만들자 또 그 음식이냐며 불평도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한계효용이 급격하게 체감하기 시작한 것을 느끼는 순간, 나의 요리에 대한 열정도 조금씩 체감하기 시작했다. 인정과 칭찬이 주어지다가 줄어드니 주방에 들어가는 발걸음도 줄어만갔다.  요리와 먹는 것에 있어서도 행복을 유지하려면 한계효용 체감을 생각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듯 인생은 어쩌면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과의 힘겨운 싸움이다. ‘법칙’과의 싸움이기에 순리를 거스르는 운명적인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이 행복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결핍(缺乏)'이 쏘아올린 행복론


지금의 '결핍'은 분명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지구라는 행성에서 누리던 따뜻한 햇빛, 온화한 공기, 시냇가에 흐르는 물,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 바다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파도 소리조차도 언젠가는 빼앗길 수 있음을 기억하게 된다.


소소하게 꾸린 가정에서 아침에 일어나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관계들은 늘 반복되어 왔기에 때로 너무 편하고, 너무 흔해서 귀하지 않게 여기기 쉽다. 이러한 관계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결핍을 경험하지 못하면서 결핍으로 치닫는다. 최근 개봉한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 그런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은 한 아이의 엄마인데 그녀의 아들은 여섯 살 때 놀이터에서 실종된다. 실종의 아픔마저 무뎌지고 익숙해질 때 쯤, 아이 엄마(이영애 분)의 입에서 뱉어져 나온 대사 중 하나가 마음에 와 닿았다.


나 윤수 키울 때 너무 힘들어서
하루는 딱 일주일만 아이를 누가 데려가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
그 때는 너무 힘들었으니까.
윤수가 없는 지금, 그게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하루는 딱 일주일만 아이를 누가 데려가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 영화 '나를 찾아줘' 스틸컷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결핍(缺乏)과 상실(喪失)의 경험은 분명 우리를 조금 더 지혜롭게 만들 것이다. 바쁘고 당연한 일상을 살면서 감사할 제목조차 희미해져가던 우리의 인생 앞에 쉼표물음표가 동시에 주어졌다. 이 쉼표물음표를 제대로 관통한 사람들의 인생은 조금씩 변화할 것이다. 한계효용이 체감하는 당연한 순리를 이겨낼 운명적인 힘이 주어질지도 모른다. 평범하고 당연하던 우리의 일상이 행복으로 바뀌는 기적을 경험한다면 전 세계적인 코로나 사태에 지불한 막대한 수업료조차 아깝지 않을만한 소득이 아닐까.


코로나 사태가 만약 끝이 나고 일상으로 돌아갈 때, 우리의 손에는 어떤 것들이 들려져있을까? 각자 발견한 여러 가지 인사이트와 담론들이 존재하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한계효용 체감’의 소용돌이로 돌아가지는 않게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한다.


우리는 다 같이 일상의 ‘결핍’을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없어본’ 사람들의 장점은 ‘있는 것’의 값어치를 제대로 매길 줄 안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어쩌면 ‘없는 것’을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들의 값어치을 매기는 것에서 시작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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