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요리는 겁이 났다. 결혼 전에 자취 생활을 3년 정도 했었지만 그 때도 요리를 시도해보지 못했다. 아마 나에게는 ‘요리’라는 것에 대해 심리적 거리감이 있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자존심도 강하고 겁도 많았다. 무엇이든 잘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면 선뜻 발을 내딛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잘 할 수 있는 것으로만 삶을 채워왔고, 어쩌면 그래서 내 삶은 가진 잠재력보다 많이 좁아졌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결혼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십대 남녀가 각자 부모님이 해주는 밥 먹고 살다가 독립해서 살게 되었다면 사실상 요리에 대한 경험적 지식은 대개 대등하게 마련. 그 때 요리를 시작을 했어야 맞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마음 한 켠에는 식구들을 내가 직접 한 음식으로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어렴풋이 있었지만 꼭 내가 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몇 년 사이에 정성을 담아 요리를 하는 주부가 되어 있었고, 아이들까지도 그녀를 최고의 쉐프라며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그저 간혹 그녀가 힘들면 외식을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도전은 격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랬던 내가 무언가에 도전할 용기를 내게 된 것은 아내의 독려 덕분이었다. 그녀는 결과 이전에 늘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무엇에든 ‘도전해보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에 대해 그녀는 이야기하곤 했다.나는 그 도전을 이번에는 요리로 정했다. 내가 한 음식으로 우리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한 줄기 소망이 마음에 비추어지기 시작했을 때 즈음, 나는 인터넷 여기 저기를 찾아다니며 간단한 요리부터 도전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요리는 내가 생각한 것만큼 두려운 대상은 아니었다. 일단 이미 훌륭한 랜선 선배님들이 요약 노트처럼 레시피들을 온라인에 올려놓았기에 길을 헤맬 일이 별로 없었다. 나의 요리는 집에 있는 재료로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집에 있던 김치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김치냉장고에서 맛있게 발효된 김치는 기름에 볶아지다가 곧 물에 잠겨 푹 끓여지곤 했다. 그렇게 발효된 것도 모자라 물에 푹 끓여진 김치는 점점 힘을 잃어 씹기에 아주 부드러운 식감으로 변한다. 아내는 이렇게 오래 푹 끓인 김치찌개를 좋아했다. 여기에 참치, 참기름 아주 조금, 간장, 고춧가루, 다진 마늘, 매실 액기스, 두부 등이 조화를 이루면 내가 끓였다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깊은 맛이 나곤 했다.
요리 치어리더 아내와 처제는 처음에는 신기해하더니 점점 내 음식을 진심으로 좋아해주기 시작했다. 처음 요리를 하는데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도 잘 하는 것이라면서 나의 첫 도전을 힘껏 독려해주었다. 게다가 내가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단순히 레시피를 복제하는 수준이 아니라 어떤 맛이 부족한 것 같으면 어떤 재료를 더 넣고 하는 조절 감각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라며 37년동안 찾지 못하던 재능과 적성을 이제야 찾은 것이 아니냐는 그녀들. 나는 전폭적인 지지를 입고 점점 우리 집의 명예로운 쉐프로 변모해갔다.
나는 전폭적인 지지를 입고 점점 우리 집의 명예로운 쉐프로 변모해갔다.
신이 난 나의 요리 반경은 점점 넓어져갔다. 그리고 흥미도 점점 늘어갔다. 음식을 하다보니 필요한 재료들이 날로 늘어갔고, 그것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식자재 마트도 자주 출입하게 되었다. 아내가 리드했던 장보기도 이제는 자발적으로 혼자 다녀오게되었다. 김치 시리즈로 시작된 요리는 미역국, 떡국, 된장찌개 등의 국 요리로 옮아갔고, 마늘빵, 파스타, 감바스 등의 서양 요리로, 찜닭과 같은 복합요리로 번져갔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위주로 만들다보니 매운 떡볶이나 순대 볶음도 야식으로 해 먹게 되었다.
초보 요리사의 최대 위기
우리 다섯 식구의 코로나 시대는 공교롭게 나의 요리 도전기와 시기를 같이 하게 되었다. 집에서 삼시세끼를 함께 하게 된 우리 식구들은 모두 몸집이 불어났다. 밖에 나가서 운동은 하지 못하는데 요리와 먹는 것은 쉬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세끼 중 한끼는 내가 책임져보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감사한 일이었다. 첫째 아이는 별 것 아닌 음식이어도 아빠가 해 준 것이 맛있다며 몇 그릇씩 먹고, 더 달라고 했다. 정말 별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것을 진작에 도전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되었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언 요리 경력 5개월 차, 처음 같은 열정이 점점 사라져 가고, 살짝 슬럼프가 오기도 해서 한동안 요리를 쉬었었다. 식구들의 독려를 다시 얻어서 요리를 시작하려고 할 때 쯤,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 날따라 설탕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눈에 띄는 통이 하나 있었으니, 아내가 친절하게도 써 붙여놓은 라벨이 있었다.
뉴슈가 (2019.9월 개봉)
'아, 요즘에 새로 나온 신상 설탕인가보네. 설탕은 꼭 넣지 않아도 되지만 김치의 신 맛을 잡기에는 설탕만한 것도 없으니까 한 스푼만 넣자.'
3인용 분량의 김치볶음밥의 곳곳에 그 하얀 가루가 '한스푼씩이나' 뿌려질 때만 해도 나는 그 평범한 하얀 가루의 위력을 미처 알지 못했다.
"밥 다됐어요. 다들 먹자~"
신나게 몇 숟가락을 뜨고 난 후 표정들이 다 오묘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맛있게 잘 익은 김치에 참치와 통깨까지 들어간 이 레시피는 맛이 없기가 더 힘들었다. 정말 궤도를 완전히 벗어난 무언가가 있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맛.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 살인적인 단맛의 근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른 건 똑같았어요. 다만 설탕을 찾지못해서 '뉴슈가'라고 써 있는 거 한 스푼 넣었어요."
아내는 깜짝 놀란 토끼눈을 하고 나에게 말했다.
"뉴슈가를 설탕의 대체제로 사용했다고요? 뉴슈가는 설탕의 300배 정도의 단맛을 가지고 있어요. 아마 한 스푼이 아니라 한 꼬집을 넣었어도 엄청나게 달았을 거에요"
초보가 자신감이 붙었을 때가 제일 무섭다
아내와 처제는 웃고 있었고, 나는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사카린'은 들어보았지만 '뉴슈가'라는 이름은 정말 처음이었다. '뉴슈가'가 '사카린'이었다니. 예전에 상식 책에서 보았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는 사카린. 이것 때문에 장군의 아들 김두한은 국회에 오물까지 투척했었다지.
어찌 됐든 나는 다 된 김치볶음밥에 뉴슈가를 부어버린 사람이 되어 멍하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동안 칭찬받는 쉐프로 지내오다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니 나도 내 스스로가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뉴슈가가 듬뿍 들어간 김치볶음밥은 정말이지 300배는 커녕 1,000배는 더 달게 느껴졌다. 아니, 달았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달긴 단데 달콤하지는 않은 그 느낌. 나는 단 맛도 이렇게 기분 나쁠 수 있다는 것을 그 날 처음 알았다. 초보 운전자가 멀쩡한 차를 긁어먹듯, 나는 멀쩡하고 맛있게 익어가던 김치볶음밥을 완전히 버려야 할 음식으로 만들었다. 그 후 나는 '슈가 트라우마'로 인해 아내를 따라 매실청을 이용해오고 있다.
뉴슈가가 듬뿍 들어간 김치볶음밥은 정말이지 300배는 커녕 1,000배는 더 달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나는 요리를 포기하거나 놓을 수 없다.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있었어도 늘 새로운 도전에 대해 반짝이는 눈망울을 가지고 바라봐주는 아내가 있기에, 한 그릇을 주면 늘 '더 주세요'를 외치는 딸이 있기에, 아빠가 해주는 음식이 최고라고 말해주는 아들이 있기에, 떡볶이 해 달라고 이건 형부 전문이라고 추켜세워주는 처제 덕분에 나는 오늘도 식탁 앞을 조금씩 서성인다. 요리는 꾸준함과 성실이 더욱 요구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