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한 톤으로 내게 인사한 여섯 살 아들 녀석은 이내 도장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 사범님을 발견하고는 우렁찬 소리로 인사한다.
사범님! 안녕하~십니까!
녀석은 설사 지금 육군에 입영하더라도 저 목소리면 예쁨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 아들은 태권도 입문자이다. 학원에 등록한 지, 이제 만 한 달이 지난, 여섯 살 꼬마.
아들은 태권도 입문자이다. 학원에 등록한 지, 이제 만 한 달이 지난, 여섯 살 꼬마.
그 흔한 태권도장
그 흔한 태권도장을 나는 다녀본 적이 없다. 아니, 사인(私人)이 운영하는 교습 시설에 다녀본 적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해롭다고 여겨지던 ‘오락실’도 아닌데, 내가 사교육의 문턱을 넘어본 적이 없는 것은 부모님의 ‘교육 철학’ 이전에 ‘절대적 가난’에 기인했다. 애초부터 나는 ‘무언가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 이전에 ‘스스로 어떻게 터득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다만, 나에게는 열 살 이상씩 차이가 나는 훌륭한 선생님(친형들과 친누나)들이 단칸방 안에 무려 세 분이나 계셨다. ‘빈곤 속의 풍요’랄까. 그들은 내가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무언가를 배워나갈 수 있도록 본인들의 삶으로 동기부여를 해주는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나는 홀로 헌 책방에 가서 전과 한 권을 사서 공부하는데에 큰 불만이 없었고, 집 한 구석에서 홀로 코드집을 보면서 기타 연습을 하곤 했다.
그 날, 엄마의 표정은 어땠을까
대학 면접 시험을 보러 갔을 때, 나는 그 많은 학생들 중에 홀로 온 아이들이 별로 없다는 것에 매우 놀랐었다. 사실 그 날 아침, 엄마가 ‘같이 갈까’하고 물어오시기는 했던 것 같다. 살면서 처음 봤던 면접이었지만 그건 내가 치는 시험이지 엄마와 함께 치는 시험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홀로 운동화 끈을 매고 집을 나오면서 평소와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정도의 인사만 드렸을 뿐이었다.
나는 그 많은 학생들 중에 홀로 온 아이들이 별로 없다는 것에 매우 놀랐었다.
일종의 ‘자립(自立)’의 삶을 살면서 나는 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내 ‘앞’가림을 해야했기에 뒤를 돌아보거나 옆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대학 면접을 보러 가던 날, 운동화 끈을 매고 막 일어났던 그 순간, 엄마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앞가림의 한계
그러한 삶의 방식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십대까지 나는 내 ‘앞’가림만 하면 되었다. 입시의 관문을 지나, 입대와 제대를 거쳐 취업. 거기까지는 내 나름의 삶의 방식에 문제를 잘 느끼지 못했다. 나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환경’ 속에서 나름의 자립심과 인내심을 가지고, 그 난관을 극복했다는 스스로 만든 ‘서사’를 내 인생의 프레임에 씌워 자축하곤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해서 사랑하는 여자와 한 집에 살게 되니, 더 이상 나의 방식은 온전히 작동되지 않았다.
애초부터, 본질적으로, ‘결혼 생활’은 ‘앞’가림을 하는 생활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보다는 옆을 볼 줄 알아야하는데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내 ‘앞’가림만 하고 있었다. 불리한 환경을 뚫고 그나마 평범한 삶을 이루어냈다는 나의 개인적 서사는 비록 나에게는 눈물 겨운 일일 수 있지만 우리가 이룬 가정 속에서는 점점 ‘꼰대적’이 되어갔다. 유복하게 자란 아내는 내 눈에 늘 나약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교정시키려했고 많이도 울게 했다.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몸소 시연해주었다. 나는 일단 ‘상의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늘 스스로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던 뿌리 깊은 습관 탓에 아마 아내는 A부터 새로 가르쳐야 했을 것이다.
여섯 살의 사춘기
그리고 자녀들이 3년 터울로 태어났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아이들은 홀로 크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늘 세심한 돌봄과 배려를 필요로 했다. 나는 그저 ‘나 혼자 컸다’고 착각하는 철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아버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돌봄과 배려가 부족한 나는 아빠로써 0점이었다. 나의 아내는 사실상 거의 마이너스의 환경에서 아이들을 이렇게까지 멋지게 키워낸 교육자이다. 혼자 컸다고 생각하는 철 없고 자존심만 쎈, 철벽 돌덩이를 끼고 육아를 해냈으니 평강 공주가 울고 갈 만 하다.
아이들은 정말 빠르게 성장했다. 나를 닮았는지 아들도 자립심이 매우 강하다. 아들은 여섯 살인데 마치 사춘기 중학생과 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자주 든다. 생각이 깊고, 동생을 늘 배려하며, 가끔 혼자 있고 싶어 방문을 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점 녀석의 뒷모습과 굳게 닫힌 문을 보는 일이 늘어간다. 이제 여섯 살인데.
꼭 어렸을 때 나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여섯 살 때 엄마 회사에 가기 위해 시내 버스를 타곤 했는데 주변 어른들이 걱정이 되어서 길을 잃은 건 아닌가 걱정을 하곤 했다. 태권도 학원에서 홀로 걸어서 돌아오는 것을 성장의 열매로 여기는 녀석의 모습을 볼 때마다 버스에서 나를 쳐다보던 어른들의 걱정어린 눈빛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나는 홀로 걷는 것을 좋아했지만 부모님은 그 뒷모습을 보고 계셨던 것이다.
이제는 내가 그 자리로 들어가 아들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이제는 내가 그 자리로 들어가 아들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아들의 첫 승급
태권도 학원에 데려다 준 그 날은 첫 승급심사의 결과 발표 날이기도 했다.
나와 아내, 처제와 딸은 차 안에서 아들의 한 시간 수업동안 긴장하며 대기 중이었다. 아들은 매우 담담하게 자신이 합격할 것 같다고 말했었다. 아내와 처제는 떨어져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결과와 상관 없이 영원이가 행복하고 후회 없이 태권도를 했으면 그게 진짜 멋있는 것이라고 했다. 녀석의 담담함 속에 약간의 긴장이 서려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좀 더 편안해진 눈치였다.
그리고 수업이 마치는 시간, 나 역시도 담담한 척 했지만 사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녀석은 나름 첫 도전인데 불합격이라는 열매에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내가 대학에 면접보러 갔던 날, 자녀들을 따라온 수많은 엄마들이 떠올랐다. 그 때는 혀를 차며 나의 자립심에 스스로 박수를 보냈었는데, 이제는 그녀들의 초조함이 나의 것이 되어 있다.
아들은 당당히 노란 띠를 매고 당당히 걸어나왔다.
수고했다 아들! 축하해!
내가 두 팔 벌려 안으려는데 녀석은 내 허그를 피해 곁에 선다. 얼굴 광대 근육이 씰룩씰룩하는 것을 보니 좋기는 좋은가본데 그렇다고 안기는 것은 너무 유아틱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차에 돌아오니 엄마와 이모, 동생 세 미녀들이 돌고래 소리로 환영해준다. 이제야 녀석은 근엄했던 얼굴을 화사하게 바꾸더니 엄마에게는 와락 안긴다. 그 모습이 살짝 서운했지만 나보고 더 다정하게 대해 달라던 아이의 말이 떠올라 머쓱해진다. 내가 더 살갑게 하면 나한테도 안기겠지 하는 분발의 차원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그 길로 우리는 영원이의 첫 승급을 기념하는 파티를 성대하게 열었다.
그 길로 우리는 영원이의 첫 승급을 기념하는 파티를 성대하게 열었다.
뒤돌아 보지 않았을 뿐이다
승급과 함께 자신감이 생긴 아들의 발차기와 기합 소리가 왜 이렇게 멋진건지.
남들 다했던 태권도, 나는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태권도가,
올림픽 때나 한 번씩 들여다보던 태권도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들뜨게 할 줄은 몰랐다.
‘자립’은 무슨. 내가 그동안 뒤돌아보지 않았을 뿐이다.
언젠가 아내가 한말이 생각난다.
아이들이 언제든 와서 안전하게 쉴곳이 되어주자고..
우리는영원이가 잠드는 것을 지켜본다.
마음 속으로 녀석에게 말을 건네며 녀석의 긴 머리칼을 만지작거린다.
그래, 엄마아빠가 네 뒤에 항상 있을게. 거친 세상에서 부딪히다 때로 아플 수도 있어. 그러면 그냥 편히 와서 안기렴.
자기도 못 그랬으면서 어쩜 그리 천연덕스러운 요구를 하는지. 아빠에게 나는 언제 안아달라고 해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