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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Nov 16. 2021

면도를 하지 않습니다

명함을 내밀지 않습니다

'삶'이라는 파도 타기


파도에 의지적으로 자신의 몸을 담그는 것은 두렵고 힘든 일일지 모르지만 파도에 휩쓸리는 것은 두려움을 느낄 새가 없다. 용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정지등이 켜진 것을 알아차리고 자발적으로 제출한다는 휴직원이라지만 나는 그렇게 용기를 낸 경우는 아니었다.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바깥으로부터 파도가 밀려드는 것 같더니 어느새 나는 그 파도를 타고 있었다. 삶에서 흔히 경험되지 않던 불가항력적인 일들의 연속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와 가족은 햇볕이 드는 따스한 바닷가에 오롯이 남겨져 있었다.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바깥으로부터 파도가 밀려드는 것 같더니 어느새 나는 그 파도를 타고 있었다.


면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 순간에 나는 내가 십년을 넘게 일해온 직장에 나가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호캉스처럼 편안하게 시작된 휴식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휴직하고 한동안은 아침에 면도를 하지 않았다. 직장은 매끈한 턱선을 요했었지만 '나'라는 개인은 한동안 면도의 필요를 딱히 느끼지 못했다. 사회적 맥락과 나를 분리하자 눈에 보이는 외모에 먼저 변화가 생겼다.

사회적 맥락과 나를 분리하자 눈에 보이는 외모에 먼저 변화가 생겼다.


명함을 내밀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새로워진 일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만나서 명함을 건네기보다 그냥 내 이름 석자를 대는 일.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남편이자 누군가의 아빠로 존재하는 일. 나와 가족들이 먹을 것을 스스로 만들어 보는 일(이것은 꾸준한 습관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모든 일상이 새로웠지만 그 새로움은 단지 일상에 그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하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나는 삶에 닥친 위기를 통해서 인생에서 거의 처음으로 ‘정체성’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나’가 아니라 '진짜 나’에 대해서 집중해보는 것은 매우 생소하고, 낯선 일이었다.


나는 이미 정해진 답을 내 정체성으로 알고 살았었기 때문에 ‘고민’보다는 ‘배우는 일’이 더 많았다. 내가 속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배운 바를 철저하게 복습하고 재생산해내는 일을 감당해왔다. 사회적으로 특별히 어려움을 느껴본 일은 없었다. 그 맥락에 최대한 충실하게 살았으니 말이다. 크게 어긋나는 일 없이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주며 살았으니까. 사춘기의 흔하디흔한 비뚤어짐조차 나에게는 크게 허용되지 않은 영역이었다. ‘나’ 자체에 대해서 스스로 고민할 수 있는 여유가 크지 않았음을 나는 뒤늦게 확인하고 있었다.


여행과도 같은 삶


우리는 십 여년을 매일 같이 살아오던 직장과 지역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이주를 해왔다. 나도 아내도 아이들도 살아보지 않은 새로운 곳이었다. 이사온 첫 날 밤, 우리는 현실감각에서 멀어진 것 같은 몽환적인 감정을 느꼈다. 우리는 왜 이 생소한 곳에 있을까. ‘나는 누구, 여긴 어디?’로 표현될 수 있는 이질적인 감각이 크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이 곳에서 새롭게 고민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것을 생각했다. ‘제주도 한 달 살기’도 좋지만 일상적인 도시 속에서도 우리는 '여행과 같은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십 여년을 매일 같이 살아오던 직장과 지역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이주를 해왔다.


여행과도 같은 삶. 그것은 사회적으로 기대받는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구상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시간이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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