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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Jan 16. 2019

Excellent Sheep(공부의 배신)

왜 하버드생조차도 바보가 되었나

최근에 미국의 한 학자(윌리엄 데레저위츠)는 현 세대의 대학에서 배출되는 인력들을 'Excellent Sheep'이라 명명했습니다. 그야말로 사회 시스템이 요구하는대로 완벽하게 순응하는 순한 양떼들을 찍어내고 있다고 본 것이죠.





사실 사회 시스템이나 정치 권력, 그리고 종교 권력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대대로 싫어해 왔습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역사적으로 항상 암흑이 아니었던 이유는 '교육'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치 권력이나 사회 시스템이 사람들을 옭아매려 할 때 깨어서 대항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고, 그 생각들을 광장에 나와서 끊임 없이 소통하곤 했지요.

종교 권력이 면죄부 따위로 교인들을 옭아매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한 일들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마틴 루터나 칼빈 혼자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때마침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이 보급될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신자들도 성경에서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죠. 

그렇기에 전방위적인 종교 개혁이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활동은 역사를 긍정적으로 움직이는 축이었으며 사회와 공동체의 타락을 막아내는 주요한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21세기가 되었는데 오히려 사유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보루였던 대학마저 일자리를 얻기 위한 학원들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질문이 사라졌습니다.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적는 이른바 '적자(writing)생존'의 시대입니다. 



취업시장에 쏟아져나오는 젊은이들은 회사가 원하는 대답을 앵무새처럼 하는 기계가 되었습니다. 

애초부터 학교 교육은 그들의 생각을 묻지 않았어요. 다만 그들에게는 '출제자의 의도'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정과 아이들을 둘러싼 공동체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일종의 사적 영역에서도 엑설런트 쉽(Excellent Sheep)들이 기계처럼 찍혀나오고 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교회 공동체에서 학생들과 청년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런데 마치 앵무새처럼 교회에서 외운 모범답안들을 줄줄 꾀고, 그것이 마치 자기 신앙인 것처럼 착각하는 젊은 이들을 만날 때면 가끔 소름이 쫙 돋곤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교회의 기성세대들에게 칭찬받는 젊은이들일 것입니다. 
거꾸로 질문이 있고, 사유가 살아있는 젊은이들은 어디서나 힘듭니다. 늘 피곤한 사람 취급 받기 일쑤이고, 때로는 권위에 도전한다는 인상을 주어서 찍힐 위험까지 있지요. 예의 바른 질문마저도 우리 사회는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제 어른이 된 우리의 숙제입니다. 

유일한 보루인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들이 

건전한 비판과 사유, 질문과 토론의 장이 될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노력해야겠지요. 




여러분,

타인의 워딩만 받아적는 순한 양이 되기보다

나만의 워딩을 창조할 수 있는 독한 늑대가 되십시오. 


이래뵈도 21세기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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