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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r 15. 2019

눈 먼 자들의 'SKY 캐슬'

모두가 눈이 먼 것보다 더 두려운 건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위의 네모 박스에 있는 선은 다음의 가, 나, 다 선 중에 어떤 선과 길이가 같나요?



무려 70년 전의 몰래 카메라


1951년, 미국의 심리학 교수였던 솔로몬 애쉬는 '시력 검사'라는 명목의 심리 실험에 7~9명 규모의 그룹을 참여시켰다. 그 중 2명은 사전에 어떤 대답을 할 것을 이미 정해놓고 들어온 사람이었던 것.(심리학 실험은 보통 많이 짖궃다.) 앞의 두 명이 큰 소리로 자신 있게 답을 '가'라고 대답하자, 나머지 인원들은 혼돈에 빠졌다. 눈이 커지기도 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림을 수차례 주시해보기도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정답은 '나'이다. 하지만 진짜 실험대상자의 절반 이상이 고민 끝에 써낸 답은 다름 아닌 '가'였다. 사후 인터뷰 결과 그들은 정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눈에 보이는 '진실'보다 '사회적 연대'를 유지하고자 하는 압력이 훨씬 더 컸던 것이다. 

1951년, 미국의 심리학 교수였던 솔로몬 애쉬는 '시력 검사'라는 명목의 심리 실험에 7~9명 규모의 그룹을 참여시켰다.


갇힌 그룹, '스카이 캐슬'


최근에 한국 사회의 단면을 서늘하게 비추었던 드라마, '스카이 캐슬'. 그 곳은 한 대학교의 정년보장교수들에게만 입주권이 주어지는 차별적이며 배타적인 공간이다. 그 곳에 거주하는 입주민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그들의 자녀 세대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와중에 자녀들의 꿈과 행복은 안중에도 없다. 그저 부모들의 욕망으로 얼룩진 캐슬이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기에' 자신들의 욕망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는 없다. 그러다가 수임(이태란 분)의 가정이 새롭게 입주하게 되면서 드라마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승혜(윤세아 분) 외에는 기존의 교육 방식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캐슬' 안에서 외롭게 투쟁하는 수임의 모습은 몹시 안쓰럽다. 위의 심리학 실험에서 답을 '나'라고 말하는 것이나 '캐슬'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행복권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이나 외롭고 힘들긴 매 한가지인 것이다. 

'캐슬'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행복권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이나 외롭고 힘들긴 매 한가지인 것이다.


동화 속, 집단의 압력


우리가 자라면서 읽었던 동화 속에도 이러한 외로움은 자주 등장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팩트'조차 이야기할 수 없었던 신하들이 그러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은 '광장'이 아닌 '대나무 숲'에서나 외칠 수 있는 말이었다. '미운 오리 새끼'도 아름다운 모습을 한 외로운 소수자였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사회적 압력이 닿지 않는 순수한 아이만이 임금님의 '벌거벗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라면서 읽었던 동화 속에도 이러한 외로움은 자주 등장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


소설과 영화로 알려진 '눈 먼자들의 도시'는 이러한 집단 속의 개인의 어려움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한다. 눈이 '화이트 아웃'으로 실명되어 새하얀 암전 상태로 빠져버리는 바이러스가 도시 안에 창궐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인 의사의 아내(줄리안 무어 분)만큼은 눈이 멀지 않는다. 온 도시 안에 볼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라는 외로움. 그것에 대해 주인공은 이렇게 표현한다.


모두가 눈이 멀게 된 것보다 더 두려운 건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눈이 멀게 된 것보다 더 두려운 건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려움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합리적 개인'으로 존재하기보다 '비합리적 다수'가 되는 것을 택하기가 훨씬 쉬운 것이다. 합리적이고 차분한 기질을 가진 독일인들이 600백만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는데 암묵적 동조를 했던 배경에는 이 무시무시한 본능이 있다. 온전히 본다는 사실이 자신을 '소수'로 만든다면 비참한 진실을 마주하기보다 기꺼이 '눈 멀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 지닌 사회적 역설이다. 



'군중 심리'가 선사하는 안락함에 대하여


대학 시절, 경영학도이지만 열심히 담장 밖으로 수강하러 다녔던 필자의 주된 관심 학문은 심리학과 사회학이었다. 심리학과 사회학을 접하면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한 지점은 개인이 모여 하나의 사회가 되었을 때, 개인 단위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 가장 보편적인 현상이 바로 '사회적 압력(social pressure)'에 '순응'하고 '동조'하는 현상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심리를 '군중 심리(mob mentality)'라고도 부른다. 오늘날의 대중들은 '협업(Mass Collaboration)'을 통해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구축하기도 하는 한편, 21세기를 살아가는 현 시대에도 군중 심리로 인해 잘못된 정보와 판단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비일비재하게 이러한 현상을 마주 한다. 큰 사회보다는 작은 사회가, 일회적 관계보다는 반복적인 관계가, 개방적인 사회보다는 폐쇄적인 사회가 집단의 압력을 더 크게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 

큰 사회보다는 작은 사회가, 일회적 관계보다는 반복적인 관계가, 개방적인 사회보다는 폐쇄적인 사회가 집단의 압력을 더 크게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


우리는 집단의 압력을 과연 이길 수 있는가? 인위적인 프레임에 대중들을 가두는 정보의 '사육'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자신이 소속된 소그룹 집단에서 본인의 소신과 반대되는 일이 자행될 때, 자신의 목소리를 담백하게 담아낼 수 있는가? 



좁은 길을 걷는 사람들


그러려면 마이웨이를 갈 수 있어야겠다. 그런데 그냥 마이웨이는 아니다.

그저 다수에 속하는 것 자체에 노이로제가 있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다수의 의견이 올바른 때도 있지만 매번 '아니요'를 외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홀로된 외로움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은 그와는 결이 다르다.


길이 좁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찾다보니 그 길이 좁고 협착함을 깨닫게 되는 사람.


우리가 필요로 하는, 내가 되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그러한 사람이 아닐런지. 

길이 좁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찾다보니 그 길이 좁고 협착함을 깨닫게 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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