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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r 02. 2019

비판보다 강한 마음의 힘

'지식'에 '애정'을 담는 일

왜 교회를 'ㄱ'자로 지었을까?


필자가 사는 곳에서 삼십분 남짓 서쪽으로 가면 '금산교회'라는 아주 오래된 교회가 하나 있다.

그 교회는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된 테이트 선교사 부부에 의해 1908년에 개척된 교회인데, 특이하게도 예배당이 'ㄱ'자 모양으로 생겼다. 왜 이런 구조가 되었을까?

그 교회는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된 테이트 선교사에 의해 1908년에 개척된 교회인데, 특이하게도 예배당이 'ㄱ'자 모양으로 생겼다. 왜 이런 구조가 되었을까?


당시 조선의 문화는 '남녀칠세부동석'을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로 여겼다. 설교를 하는 '남자' 목사님을 '여자' 성도들이 직접 볼 수 없었기에 예배당을 'ㄱ'자 모양으로 지었던 것이다. 여자들이 모인 공간은 커튼을 쳐서 시각적으로 분리했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설교자를 보지 못한 채, '음성'으로만 설교를 들었다고 한다.

필자가 그 교회를 처음 방문했을 때 처음 깃든 생각은 이러했다.


내가 100여년 전, 이 땅을 밟았던 선교사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내가 여자 아이들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교회에서 지낸 선교사였다면 조선의 그러한 문화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들을 공간적으로 분리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거니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가치를 바라보자고 힘주어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조선의 문화에 대한 존중 위에 교회를 정착시켰다. 그러한 조선의 문화를 교정하고 비판하기는커녕 스스로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익숙치 않은 문화적 토양 위에 선다는 것


필자는 지역에 소재한 사립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10년차 교직원이다. 대학의 가장 최전선이자 학생들과의 접점인 단과대학에서 5년 정도 있었고, 교수님들의 인사를 담당한지도 4년째가 되어 가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local)대학'들이 마찬가지겠지만 교수님들은 그 지역 출신이 아닌 경우가 많다. 필자도 어린 나이에 익숙한 토양을 떠나 생소한 곳에 왔었기 때문에 교수로 임용되어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딘 교수님들과 지역에 대한 적응을 주제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었다.

그런데 필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교직원들이 중요한 갈림길에 서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새로운 지역에 온 교직원들은 적지 않은 충격이 있다. 그것은 문화와 삶의 방식의 차이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인들이 늘 보던 학생들과 이 곳에서 보게 되는 학생들이 많이 다르다는 것에 있다. 필자가 느끼기에도 10년전 직장에서 처음 만난 학생들은 내가 늘 보아오던 계산이 빠르고, 자기 앞가림에 능하던 서울의 학생들과는 색깔이 달랐다. 늘 보던 학생들과 달라서 좋은 점도 있었지만 다름으로 인해 이해가 필요한 시점도 있었다.


무엇이 '차이'를 만드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교직원들의 포장되지 않은 '진정한 태도'가 나온다는 것을 나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그 본질에 '연구능력'과 '교수법'보다도 학생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다음의 일이었다.

우리나라는 초, 중등교원이든 대학에 몸담는 교원이든간에 '가르치는 일'에 대한 신분보장이나 사회적 예우가 다른 나라보다 잘 갖추어져있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사명감'이나 '직업관' 없이도 보수나 명예, 후생 복지를 바라보고 이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인 듯하다. 초, 중등교원은 임용시험을 통해서, 대학의 교원은 각 대학마다 정한 프로세스를 통해서 입문을 한다. 이 프로세스는 객관적인 연구능력과 강의능력을 검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에 그 사람의 '교직관'이나 '인성',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심층적으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한 것 같다.

특히나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많은 교원들이라면 학문에 대한 기초 소양을 갖추지 못한 학생들까지도 이끌고가야하는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따르는 어려움이 분명 있을 것이다. 본인은 한 번만 대충 들어도 이해가 될 토픽을 정작 가르칠 때에는 수십번을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법도 하다.  

이 지점에서 교원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힘든 마음을 부여잡고 아이들을 탓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모두 내려놓고 눈높이를 맞춘 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느린 그들의 속도를 기쁘게 발맞춰 걸을 것인가.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에는 학문의 눈높이도 있지만 삶의 방식과 패턴 등 강의실을 벗어난 일상적인 영역에 있어서의 동일시도 포함된다. 이것은 결국 학생들에 대한 의무감이 아니라 진정성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영역이다.

후자의 선택을 한 사람들은 이 선택의 기로에서 오히려 더 큰 동기부여를 받는 것을 보게 된다. 본인이 그동안 누려오던 익숙한 환경은 아니지만 오히려 눈높이의 차이를 학생들에 대한 애정의 계기로 삼는 분들을 보면 큰 감동이 있다. 필자는 이러한 교수님들을 현장에서 생각보다 많이 만나곤 하였는데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학생들에 대해 끊임 없이 샘솟는 '열정'이었던 것 같다. 일례로 내가 몸담았던 사범대학의 경우에는 학생들의 기초 소양을 탓하지 않고, 그 소양의 차이 이상으로 본인의 교수법을 개발하는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수도권 학생들이 정규 교과목만 이수할 때, 우리는 방학을 반납하고 무급의 '비교과 수업'과 '임용고시반' 활동으로 역전을 이루겠다는 어찌 보면 '단순하고도 투박한 의지'. 그것이 타 대학에 비해 빛나지 않는 내신등급으로 입학한 많은 수의 사범대학의 학생들을 꿈꾸는 교직에 입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본인이 그동안 누려오던 '엘리트 코스'의 환경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 열악함을 학생들에 대한 애정의 계기로 삼는 분들을 보면 큰 감동이 있다.


'지식'에 '애정'을 담는 일


필자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일련의 과정들을 '지식에 애정을 담는 일'이라고 부르고 싶다. 오늘날 지식을 갖춘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지식'을 쌓을수록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열악함'마저도 더 심층적으로 깨달아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지식인들 중에는 '낙관론자'들보다는 '비관론자'나 '염세주의자'가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러한 지식에 '애정'을 담는 부류의 사람들은 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살률 최고, 출산율 최저를 기록하고 있는 현 국가에 대해서도 '한국은 여전히 이러저러해~'라며 제3자적인 시각으로 분석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말이나 글에 진심어린 애정을 느끼기란 쉽지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속한 공동체나 조직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든지 건설적인 비판들이 오고 갈 수 있지만 그 안에 '애정'이 스며들어 있지 않다면 조직이 그 비판을 통해서 발전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얼마든지 건설적인 비판들이 오고 갈 수 있지만 그 안에 '애정'이 스며들어 있지 않다면 조직이 그 비판을 통해서 발전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필자 역시도 원래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본디 '칼' 같은 글을 쓰는 것에 쾌락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날카로운 말과 글이 사람을, 그리고 공동체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통해, 그리고 한 배를 탄 직장 동료들과 공동체의 경험을 통해서 체득하게 되었다. 필자의 논리적인 주장보다는 세상 따뜻한 아내의 태도가 사람들을 더 진정성 있게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며 깨달은 바가 컸다. 처세로서의 립서비스가 아니라 눈물 어린 탄식과 안타까움과 진정성 있는 마음들이 모여서 조금씩 공동체의 어두운 부분들을 빛으로 치환해나가는 경험들을 직, 간접적으로 하게 되었다.  

성경의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리더였던 예레미야나 느헤미야에게서도 이러한 것들을 찾을 수 있다. 민중들의 범죄로 인한 위기의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의 옷을 찢는 철저한 '자기 반성'의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민중의 타락'을 '자신의 타락'으로 동일시할만큼 백성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나는 그 때까지 사회와 공동체의 타락이 나의 타락이라고 동일시할만큼의 애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회와 공동체의 부조리함에 희생되었다고 여긴 적은 있지만 그 사회의 부조리함에 눈물 흘릴만큼의 애정이 없었다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새롭게 알게되는 사회의 부조리함만큼이나 흘려야 할 눈물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지식에 애정을 담는 나의 미약한 시도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던 것 같다.


눈물 어린 탄식과 안타까움, 기도가 모여서 조금씩 공동체의 어두운 부분들을 빛으로 치환해나가는 경험들을 직, 간접적으로 하게 되었다.


'지식에 애정을 담는 일'은 이 시대를 지나 그 다음 세대를 세워나가는데 있어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많지만 애정 어린 눈으로 공동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부족한 현대사회. 결국 그 애정이 깃든 손길들을 통해서 조금씩 사회가 변해갈 수 있음을 깨닫는다. 100여년 전, 이해되지 않는 문화 속에 떨구어진 미국의 선교사들이 그러했었다.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온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노력한 선생님들이 그러하다. 보수와 후생이 주는 안정감보다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건전한 토론을 제기하는 직장인들의 삶이 역시 그러하다. 뭐가 맞는지 틀린지를 따지는 것보다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동안 뜨겁게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가정에서의 삶이 역시 그러하다.



머리의 온도와 상관 없이..


오늘 나는 내 주변에 어떠한 애정을 쏟고 있는가? 내가 가진 지식 때문에 도리어 애정은 식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도 문화적으로 나와 다른 공동체 때문에 그저 좌절 모드로만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작 사랑하고 아껴야 할 주변마저 그러한 냉소 속에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대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지식을 포기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가능하다 하더라도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는 것 같다. 부부 관계에 있어서도 지식을 내세우면 늘 실패하지만 그 자리에 사랑을 담으면 물이 흐르듯 마음의 교류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머리의 온도와 상관 없이 가슴만은 늘 뜨거운 사람이고 싶다.

머리의 온도와 상관 없이 가슴만은 늘 뜨거운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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