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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Apr 03. 2019

우리는 과연 거대한 '피라미드'를 버릴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 있으려면

지나치게 현실적인 이야기, '스카이캐슬(SKY CASTLE)'


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 '스카이캐슬'. 

드라마는 소위 말하는 상위 1%들의 사교육 경쟁을 비춘다. 입시 코디네이터가 고객 학생의 '학종'에 채워넣을 스펙들을 개연성있게 구성한다. 심지어 학생회장 선거 당선에까지 열을 올린다. 공중파 방송도 아니었건만 이 드라마의 시청률이 20%가 넘었다.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코디' 이야기가 사람들의 공감을 샀던 이유는 생각보다 이러한 상황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마저도 결국 '부'와 그에서 기인한 '훈련'의 승리로 귀결되는 드라마 속 현실은 사실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코디' 이야기가 사람들의 공감을 샀던 이유는 생각보다 이러한 상황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 '문제집'을 푸는 나라


그렇다. 우리 나라는 '창의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문제집'을 푸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나라일게다.

덕분에 우리나라의 '입학사정관제'는 좋았던 취지와 달리 현실적인 난관에 봉착하곤 한다. '울퉁불퉁'하지만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새 것'이 나오기가 힘들다. 대신 누군가가 세련되게 조각하고, 새로운 것처럼 보이게 만든 정교한 스펙들이 '학종'에 빼곡히 기록된다. '정교한 조각품'들 속에 투박한 '날 것'을 들이대면 오히려 '날 것'의 생명력조차 힘을 잃게 되는 구조이다.


'평가'는 '평가'를 낳고...


차라리 '학력고사'의 담백함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다. 적어도 그러한 평가는 정성적인 평가가 결여되어 있었지만 '정보의 비대칭'에 놓여있는 '빈'과 '부'의 격차를 그나마 줄여주는 제도였으니 말이다. 교과서에 주어진 정보를 열심히 습득만 하면 공정한 시험을 통해 (부정행위만 하지 않는다면) 순위를 매겨,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들이 그나마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현재의 제도가 창의성과 인성, 정서적 능력 등을 본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능력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힘드니 수년째 그런 불만들이 나올만도 하다. 

20여년 전, 당시 교육부 장관님은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그 때 그 말씀을 믿지 않았기에 큰 낭패를 보지 않았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오히려 그 때보다 지금의 수험생들에게 요구되는 스펙의 양은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력고사 세대가 천편일률적인 평가가 주는 단순함의 '달콤함'을 누렸다면 오히려 지금의 세대는 '정량평가'와 '정성평가'를 모두 준비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20여년 전, 당시 교육부 장관님은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우리 교육은 '평가'로 시작해서 '평가'로 끝난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나라의 교육제도를 이끌어가는 축은 뭐니뭐니해도 '평가'다. 모든 주제는 결국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지의 문제로 귀결되며, 또 다시 '평가'의 문제에서 시작한다. 제 아무리 혁신적인 교육 모델도 '시험에 안 나오면 그만'이기 때문에 혁신적인 교육 모델이 힘을 받으려면 '합리적인 평가 시스템'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평가'의 특성상, 인재의 모양은 다양한데 평가에서 그러한 다양성을 담아내기가 힘들다. 그러다보니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은 결국 전과목 시험에서 골고루 좋은 점수를 받는 '평범한 아이'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우리 교육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것


결국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사회가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교육적 프레임에 얼마나 자기 자신을 알맞게 '구겨 넣었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실제로 사회가 발전하려면 각 분야에서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그 탤런트를 발휘해야 하지만 그러한 재능을 지닌 아이들은 우리 나라의 교육 시스템 안에서는 빛을 발하기 힘들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교육의 평가 시스템이 '다양성'에 기반하고 있지 않고, 구조적으로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서열화된 사회의 '계급' 체계, 그에 맞게 서열화된 대학의 입시, 이를 위해 공들여진 12년간의 노력을 평가하여 대학에 올리려면 '다양성'보다는 모두가 인정할만한 '형평성'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많은 평가 대상자들로 하여금 불만이 나오지 않는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정량화된 시험'이 존재해야 할 것이고, 전 과목에서 두루 좋은 성적을 거두는 상위자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의 변별을 두는 것이 중요해진다.

결국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사회가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교육적 프레임에 얼마나 자기 자신을 알맞게 '구겨 넣었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 교육이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아이들의 '다양성'을 권장하지 못할까? 

나는 그것이 우리 나라의 유한한 자원, 그리고 뿌리 깊은 서열 의식(직업의 귀천 의식)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자원이 빈약한 우리 나라는 모두가 다 풍요로울 수 없기에 태생적으로 '지식 경쟁'이 촉발될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고착화된 서열 의식과 직업에 대한 귀천 의식이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여전히 '블루 칼라' 직업군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힘들다. 그러다보니 교육을 받는 주체들과 학부모들에게 내재된 주요 동기 속에는 '신분 상승', '화이트칼라 진입'이라는 욕구가 깊이 박혀 있다. 이렇게 모두가 획일화된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기 때문에 기질적으로는 다양한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결국 사회의 상위 계급을 차지하는 소수의 직업군에 맞추어 자신의 재능을 재편집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된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차교수'를 기억하는가? 그는 늘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를 자녀들에게 각인시키려 노력한다. 드라마 설정상 차 교수는 심각한 꼰대이지만 사실 그가 말하는 '피라미드 구조론'은 부정하고 싶을 뿐, 부정할 수가 없는 사회적 현실이다. 

사실 그가 말하는 '피라미드 구조론'은 부정하고 싶을 뿐, 부정할 수가 없는 사회적 현실이다.


어떤 아이들에게는 '블루 칼라'의 직업군이 더 적성에 맞을 수 있지만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이다 보니 본인의 재능과 적성에 맞지 않는 진로를 선택하게 되고, 그 때부터 본인이 좋아하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을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과에서 1등을 하면 의사가 되고, 문과에서 1등을 하면 판사가 된다. 이것은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비효율(필요한 인재가 적재적소에서 기능하는 것을 '효율'로 보았을 때)이지만 그것을 선택하는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그들은 주어진 현실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을 바꾸지 않는 한, 개인의 가치관으로 승부를 볼 수는 없는 힘든 문제인 것이다.


'나나 잘하자'로는 해결할 수 없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이다. '나나 잘하자'라는 마인드로는 이 공고한 프레임을 바꿀 수 없다. 개인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어쩌면 '이기주의'인지도 모르겠다. 사회 구조가 잘못 되었음에도 '우리 아이'만 좋은 대학에 가면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 반복 속에 우리 교육은 다음 세대들에게 되물림되고 있다. 

아까 언급한 드라마의 결말이 아쉬웠던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서였을 것이다. 사회적 메세지를 던져줄 것 같이 의미심장하게 시작했던 그 드라마는 결국 사교육과 신분상승에 혈안이 되어 있던 스카이캐슬의 부모들이 갑작스레 계몽되어 그 가치관을 버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것은 '판타지'다. 사회는 차교수 말대로 여전히 '피라미드' 구조이고, 사회는 아이들의 다양성조차 인정하지 않는데, 단지 부모들이 욕심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이다. 사회가 피라미드를 버리지 않는다면 가정에서 피라미드를 버린다한들 사실 큰 의미는 없다고 할 것이다. 설사 버렸다 치더라도 언젠가 사회의 현실을 경험하면 언제 다시 주워들일지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

사회가 피라미드를 버리지 않는다면 가정에서 피라미드를 버린다한들 사실 큰 의미는 없다고 할 것이다.


'내'가 아닌 '우리'가 잘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교육'의 목적지가 '취업'인 우리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우리 사회는 해결책을 '인풋(교육)'에서부터가 아니라 '아웃풋(직업)'에서부터 접근해야 할 것이다. 

먼저는 다양한 직업군에 대한 존중이 사회적으로 정착이 되어야 한다. 획일화된 엘리트 코스를 향해 탐색 없이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직업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들어야 한다. 호주에서는 '배관공'이 매우 인정받는 직업이다. 그것은 그 나라가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토양을 다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존중이 기반이 된다면 아이들의 욕구의 다양성도 수용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이 되는 것이다.

먼저는 다양한 직업군에 대한 존중이 사회적으로 정착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는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는 평가 도구들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즉 '시험'이 달라져야 한다. 시험이 달라지면 교육도 달라질 수 있다. 사교육을 억지로 철폐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사교육이 따라올 수 없는 평가제도를 만드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스카이캐슬을 보고도 여전히 사교육의 무서움을 모르는 1인) 훈련된 스킬로는 진입이 불가능한, 울퉁불퉁하지만 다양한 적성과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시험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물론 이런 방안조차 뜬구름잡는 이야기나 판타지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고민했으면 좋겠다. 

'나나 잘하자'는 기본이다. 나 혼자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면 뭐하나. 내 자녀를 잘 공부시켜서 좋은 대학을 보내면 뭐하나. 

내 자녀의 자녀와 그 자녀의 자녀까지 또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자기가 좋아하고 잘 할수 있는 것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도록 권장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그렇게 몽환적이기만 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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