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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y 16. 2019

스승의 날의 씁쓸했던 기억

준비물: 스승의 날 선물(1,000원 이상)

씁쓸했던 스승의 날의 기억


1994년에도 스승의 날이 있었다.

그 날, 나의 선생님은 칠판에 다음 날 준비물을 쓰셨다.


스승의 날 선물(1000원 이상)


하루 종일 ‘1000원 이상’이라는 문구가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어떤 의미로 저런 문구를 알림장에 써 놓으셨을까. 1000원 이하의 선물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셨던걸까. 학생들에게 감사 표현을 가르치기 위한 일종의 교육 방식이었을까.

나는 하루 종일 ‘1000원 이상’이라는 문구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막둥이인 나에게는 늘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당시 의류브랜드 회사에 다니던 누나와 화장품 회사를 다니던 큰 형 덕분에 나는 스승의 날에 늘 손에 묵직한 선물을 들고 등교를 할 수 있었다. 엄마, 아빠가 챙기지 못하더라도 경제 생활을 하던 누나나 형이 항상 챙겨주었기 때문에 나의 가난은 표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1994년 5월 15일, 그 날만큼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종의 자존심이 발동했다. 내 손에는 1000원을 훨씬 상회하는 선물이 들려있었지만 내 손으로 이 선물을 그 선생님께 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고스란히 그 선물을 집에 가지고 왔다. 그 후의 선물의 행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누나의 교생 실습


중학교 때는 친한 누나가 인근 대학에 다녀서 우리 학교 교생으로 왔었는데, 체육 선생님을 비롯한 남교사들이 집에 데려다준다며 어찌나 집적댔는지 그 누나는 교생 실습 기간을 정말 힘들게 보냈다고 했다. 중학생이었지만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 누나에게 들었던 우리 학교의 교직 사회의 민낯은 정말이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그 누나에게 들었던 우리 학교의 교직 사회의 민낯은 정말이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그것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누나는 선생님의 길을 가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누나도 꿈을 찾아가는 대학생이었을텐데, 학교라는 곳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보였을까?  


고3은 헌혈도 하지 말라던 선생님


고3 무렵에는 학교에 헌혈차가 와서 많은 수가 헌혈을 하러 다녀온 일이 있었다. 다음 수업 시간에 우리는 나이 지긋한 선생님으로부터 앞이 캄캄해지는 꾸지람을 들어야했다.


무슨 고3생들이 헌혈이야.
그런데 시간 쓰고, 에너지 써서 너네들이 좋은 대학에 갈 수나 있을 것 같아?
OO대학교가 아니라 OO대학으로 가게 되는거야.
멍청한 놈들 같으니라고.


다음 수업 시간에 우리는 나이 지긋한 선생님으로부터 앞이 캄캄해지는 꾸지람을 들어야했다.


'좋은 선생님'은 '메인(main)'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좋아하고 존경했던 선생님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 떠올려보아도 미소가 지어지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던 분들도 계셨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이상하게도 교직 사회에서 메인 스트림에 합류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이상하게도 교직 사회에서 메인 스트림에 합류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위에 언급한 헌혈 사건 때, 한 선생님이 지나가시다가 나이 지긋하신 그 분의 훈계를 듣고는 그만하시라고 말린 적이 있다. 말린 선생님은 잘 가르치는 영어 선생님이었지만 아이들과 어울려 축구하는 것을 더 좋아하던 선생님이었다. 만약 그 선생님이 그렇게 반기를 들어주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더욱 더 교직 사회에 대한 비전을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분도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께 사과를 해야만 했다. 교육관, 가치관보다 위계가 더 중요한 교직 사회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씁쓸한 교단의 현실이 나에게 준 것


존경할만한 스승을 찾기 힘든 교육 환경은 어쩌면 나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공부하다가 막혀도 선생님을 찾지 않았다. 어떻게든 교과서와 자습서를 붙들고 씨름해서 나만의 방법으로 해답을 찾아가기를 꾸준히 하다보니 그것 역시 하나의 실력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교직 사회에 희망을 갖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진로탐색에서 고려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에 교사만큼 좋은 직업은 없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매번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나라고 저들과 다른 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의 질문 앞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올바른 교육관을 가지고, 패기롭게 교직에 임하던 젊은 선생님들도 일 년, 이 년이 지나면 조금씩 지쳐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고등학교 1, 2학년 장래희망에 모두 교사를 적어냈었지만, 결국 더 넓은 진로 탐색이 가능한 경영학과로 진학하게 되었다.


'직업'으로서의 교사, '사명'으로서의 교사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비즈니스에 잠시 몸담아보니 내가 학창시절에 보았던 교직사회의 민낯은 사실 교직사회의 문제라기보다 우리 사회의 문제이자 보편적인 사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사회학적으로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지만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보다 '노골적'으로, 교직 사회에서는 꽤나 '고상한'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일들.


내가 성장하는 사이에 '교사'라는 '직업'의 위상은 더 높아졌고, '교권'은 더욱 낮아졌다.

내가 성장하는 사이에 '교사'라는 '직업'의 위상은 더 높아졌고, '교권'은 더욱 낮아졌다.


IMF 경제 위기 후로 젊은이들은 더 이상 모험을 하기보다 현실적인 안정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공무원'이, 그 중에서도 '교사'가 선망의 '직업'이 되어버렸다. 내가 대학이라는 곳에 와서 가장 오래 몸담은 곳이 사범대학이었는데 학생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교사로서의 '사명'을 받은 아이들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 '직업'으로서의 교사를 꿈꾸는 아이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만큼 직업으로서의 '교사'는 매력적이다. 모두들 '저녁'이 있는 삶을 그리워할 때, 교사는 '방학'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니까. 모두들 휴직계를 꺼낼까 말까 망설일 때, 당당하게 육아휴직 신청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바라보며 진로탐색을 하는 것을 사실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사명'으로서의 교사는 다르다. '교사'는 사실 매우 부담스러운 자리이다. 내가 학창시절에 그러했듯 아이들을 꿈꾸게 하느냐 좌절하게 하느냐의 갈림길에 선생님들이 서 있다. 선생님들의 칭찬 한 마디에 아이들의 인생이 바뀐다. 그렇기에 '교사'는 자신의 월급이나 후생 복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중대한 중압감을 가지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 세대'의 선생님들에게


스승의 날에 선생님을 감동시키는 아이들의 영상을 보며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렇지 못했지만 우리 자녀 세대만이라도 좋은 선생님들이 가득한 교실에서 생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교사라는 '직업'이 주는 안정성과 편안함 때문에 고시에 올인하여 합격하는 분들이 아니라 교사를 '사명'으로 생각하는 선생님들을 만났으면 한다. 교사들의 '권리'를 부르짖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들의 '의무'를 다하고 나서 그런 권리도 찾는 사람들이었으면 한다.  


2019년의 '5월 15일'을 보내며


올해도 ‘스승의 날’을 보내면서 아직 내 머릿 속에는 '스승의 날 선물(1000원 이상)'이라는 문구가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세칭 '김영란법'이 있어서 지금은 표면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법과 제도'보다 중요한 건 역시 '사람들'이다. 어느 자리에든 다 마찬가지이지만 교단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해야겠다. 우리 아들, 딸만큼은 스승의 날에 거리낌이 없이 선생님에게 감사하다는 순수한 고백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 역시 좋은 사람이 되어야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누군가에게 꿈을 꾸게 하고, 비전을 심어주는 일은 학교 안에서나 밖에서나 계속되어야 할 일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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