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부부는 으레 집안일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한다. 본격적으로 집안일 분담에 대해 대화하면서 나는 집안일 업무 분장표를 제안했다. 그리고 아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업무분장표, 협업을 위한 약속
업무분장표는 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각 구성원이 어떤 업무를 담당하는지 정리해놓은 자료다. 업무분장표가 명확하지 않은 팀은 서로 업무를 떠넘긴다거나, 중요한 일을 망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팀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떻게 협업하겠다는 것인지 그 약속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업무분장표가 있더라도, 각 구성원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업무 배치가 문제인 경우도 있다. 분명 나는 데이터 정리를 잘하는데, 회의자료 만들기가 주요업무라면, 성과가 나지 않을 것이다. 잘 맞지도 않는 일을 억지로 하게 되어 불만을 갖거나 퇴사로 이어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나포함).
집안일의 크기와 구성
집안일도 마찬가지다. 같이 사는데 뭐 그렇게 딱딱하게 구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막상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집안일을 하려다 보면 오해의 소지가 많다. 나는 이렇게 설거지를 열심히 하는데, 저 사람은 왜 유튜브나 보고 있는 걸까? 이런 오해가 한 번 시작되면 끝이 없다.이렇듯 집안일의 크기는 두 사람이 쉽게 볼만큼 작지 않다.
게다가각각의 집안일을 인식하는 관점도 서로 다르다. 얼마나 꼼꼼하게 할 것인지, 얼마나 자주 할 것인지 등 견해가 다르면 끝없는 평행선이다. 그래서 조금 건조하더라도같이 논의를 하기 위한 대상, 즉 집안일에 대한 업무분장표가 필요하다
빨래의 단계별 업무분장: 강점에 따른 배치
빨래를 예로 들어보자. 빨래 프로세스는 크게 세탁 - 건조 - 접기 - 수납의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첫 두 단계인 세탁과 건조를 담당한다. 성격상 미루는 것을 잘 못하기 때문에 일정 빨래가 쌓이면 바로 세탁을 돌리는 게 습관이 되었다.
최근에는 예약기능을 적극 활용하여 세탁기에 일을 위임하는 재미도 느낀다. 출근 전 퇴근 시간에 맞춰 세탁 예약을 하고, 집에 왔을 때 막 끝난 세탁물을 보면서 그 효율성을 즐긴다.세탁이 끝나고는 탁탁 털어 건조대에 널거나, 습한 날에는 건조기를 활용한다. 그렇게 두 번째 단계인 건조까지가 나의 담당 업무다.
건조가 완료되면 빨래를 개고 수납하는 것은 아내 몫이다. 와이프가 빨래의 나머지 단계를 담당하게된 이유는 그의 강점을 살린 배치다. 그전까지는 몰랐는데, 옷을 접는 것에도 잘하고 못하고 가 있더라. 마른 세탁물의 칼각을 잡고 접는 수준이 한껏 긴장한내 이등병 시절의 모포보다 더 낫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빨래를 개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속도도 빠르고 정확성도 높다.
와이프의 칼각 접기
개고 난 다음 수납은 더욱더 놀랍다. 각 수납공간 별 정해진 위치는 기본이고 간격과 부피 등도 일정하게 수납한다. 나름대로 체계가 있어서 항상 그 자리에 세탁물이 위치해 있다. 가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빨래를 접고 넣어보면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다. 각도 안 잡히고, 위치도 삐뚤빼둘, 어설픈 결과물이 말해준다. 빨래 개는 것과 수납은 내가 잘하는 일이 아니라고.
와이프의 수건 수납 결과물
업무분장표의 함정
재밌는 것은 형식적으로 업무분장표가 명확한 팀 중에서도 협업이 잘 안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팀 내 신뢰가 무너져서 업무분장표에 나눠진 대로만 각자 일만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일이라는 것이 칼로 무 자르듯이 잘리는 것이 아니기에, 각자 일이 연결되는 부분은 서로 배려하고 소통해야 잘 이루어진다. 이런 팀은 외부에서 봤을 때 일이 잘 나눠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일이 위태위태하게 굴러간다. 수단이 목적을 앞서는 것이다.
집안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빨래에서부터 요리, 정리, 청소 등 각 집안일의 업무분장을 했다. 하지만 막상 집안일을 하다 보면 각자 맡은 일에 몰두하다가 협업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오해를 줄이고 서로를 도우며 집안일을 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 그 목적을 잃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 부부가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무엇이 더 중요한지 대화하려고 한다. 쉽지는 않다. 하지만 업무분장표가 있기에 공통된 대상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