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내먹는 로맨스
견고하던 관계가 삐거덕대기 시작한 건, 메뉴판에 스무디가 추가되었을 무렵부터였다. 네가 취직한 뒤로 우리의 만남은 점차 줄어들었다. 쓸쓸함을 달래려 종종 홀로 A 카페를 찾았다. 너와 함께가 아니었던 게 마음에 쓰였던 걸까, 어느 날 점장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사정을 설명하고는,
혼자서라도 저희들만의 루틴을 지키고 싶어서요.
라고 가볍게 덧붙였다. 그건 참 애틋하네요, 하고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이대로라면 가게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에요."
둘이서 이곳을 방문할 때도 이상하게 여기긴 했지만, 불금인데도 이곳만큼은 대체로 한산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것도 20대들로 붐비는 홍대에서 커피와 차만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건 무리가 있었다. 우리들의 추억의 장소가 이대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가만히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젊은 층이 좋아할 만한 음료를 함께 제공하는 건 어떨까요? 이를테면 스무디라던가"라고 조언을 건넸다. 물론, 메뉴 하나 바뀐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메뉴판에서 '차 종류'를 찾아볼 수 없게 된 건, 그로부터 1달 뒤였다.
처음엔 그저 단 음료가 늘었을 뿐이었다. 주스나 스무디, 최근 유행하는 버블티 등, 세간의 여러 인기 메뉴가 새롭게 메뉴를 장식했다. 그러자 손님이 늘기 시작했다. 향수와 동경을 자아내는 복고풍 분위기가 유행함에 따라, 인스타에서 인기몰이를 하게 된 것이다. 이곳을 독점할 수 없게 된 건 아쉬웠지만, A 카페가 계속 영업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아니, 적어도 차 종류를 메뉴판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동안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새롭게 추가된 음료들이 인기를 끌면서, 기존의 메뉴들은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녹차를 시작으로, 레몬그라스, 페퍼민트, 얼그레이, 여러 종류의 차들이 모습을 감췄다. 끝내 홍차마저 사라져, 나는 하는 수없이 블루베리 스무디를 주문하게 되었다.
계절은 여름으로 접어들었고, 오래간만에 둘이서 A 카페를 찾았다. 너는 자연스레 아메리카노를, 나는 자연스레 스무디를 주문했다. 그녀는 조금 놀란 듯했다.
"제법 달라졌네."
"응, 설마 내 말 한마디로 이렇게까지 바뀔 줄이야."
"잘 됐네, 차 별로 안 좋아했잖아."
하고 말하는 너의 얼굴은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슬퍼 보였다.
짧은 여름휴가가 끝나고, 너도 나도 바쁜 일상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연락을 주고받는 빈도도 점차 줄어들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해 싸우는 일도 늘었다.
"어차피 대학생이니까 한가하잖아. 내 상담 좀 들어줄 시간조차 없다는 게 말이 돼?"
"나도 바빠. 게다가 너도 내 이야기 전혀 들어주지 않잖아."
언제나처럼 크게 한바탕 벌인 뒤, 네가 '늘 보던 시간, 늘 보던 곳에서 만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알바를 마치고 찾아간 A 카페, 파티션으로 구분된 우리의 자리에 네가 앉아있었다.
"하고 싶다는 말이 뭔데?"
"우선 먼저 주문해줄래?"라며 네가 메뉴를 건넸다.
"됐어. 어차피 똑같은 거 주문할텐데."
카운터에서 주문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더니, 너는 온데간데 없었다. 테이블 위에는 홍차 티백이 들은 머그컵과 컵에 눌린 메모 한 장이 놓여있었다.
"미안, 이미 식어버린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우리 둘 다 지칠대로 지친 모양이야."
나는 차였다.
그렇게 주문했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