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나는 사주팔자는 삶 속에서 오행 균형을 이루며 ‘용신(用神)' 통해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에 따라 팔자소관을 이야기 한다.
요즘 말 중 「지팔지꼰」이라는 말이 있더라. 내가 어떻게 선택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되기도 한다. 내가 한 행동과 말습관이 모여 삶이 달라진다.
지금은 퇴직해 커피 볶으며 유유자적 사는 선배가 있다. 고향이 남원이라 나와는 또 다른 구수한 사투리가 매력적인 이였다. 기고 아닌 게 확실해 물건이고 사람 관계고 뭐든 깔끔했다. 오죽하면 나는 그 선배를 '버려 부러'라 부르기도 했다. 뭐 하나 쌓아두는 물건이 없었기에 책상은 늘 먼지 하나 없었다. 버리긴 아깝고 가지기엔 망설이는 물건을 들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선배는 '버려 부러'를 외쳤다.
한 때 나는 "아이고 내 팔자야"라는 말을 일하는 중에 무심코 입에 낸 적이 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까지 합치면 한 두 번은 아닌 듯하다. 그날도 그 선배 앞에서 신세 한탄을 했다. 무슨 팔자가 이러냐고. 선배가 시선은 모니터에 둔 채 말했다.
"근디, 너 팔자소관이 뭔 줄이나 아냐?"
"......"
잘 모르니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냥 자라면서 귀로 몇 번 들은 소린데 희한하게 타령하고 있었다.
"모르면 그냥 말 안하는겨. 함부로 팔자타령 하지 말어."
그리곤 한 마디 덧붙였다. "얼굴은 시래기죽상인디, 팔자가 좋아지간디? 거울 좀 봐 이것아!"
뼈 때리는 조언이었다.
내 얼굴은... 생짜증과 불평불만으로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렇다. 난 그 이후로 다시는 '팔자타령'하지 않았다.
얼굴은 습관으로 변한다고 한다. 오랫동안 반복해서 몸에 익으면 참 바꾸기가 어렵다. 관상이나 사주도 무시할 수 없지만 후천적으로 만들어 가는 버릇이나 습관이 더 중요하다고들 한다.
그래서, 나는 얼마전부터 입꼬리 올리는 연습을 한다.
마음먹고 시간 장소 정해 놓고 하는 건 아니고 생각날 때마다 해 본다. 버스를 타면 반대편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본다. 본래 입꼬리가 좀 처진 상이긴 하지만 갓 스물 넘어서는 “가만히 있으면 무서워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근래에는 “걱정 있어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내가 봐도 앙 다문 입에 처진 입꼬리는 초췌한 상이다. 근무하는 사무실 책상에 거울도 하나 가져다 놓았다. 잠깐씩 내 표정을 살핀다. 못 생겨질 찰나, 입꼬리 살짝 올려 본다.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의도하고 스스로 자각(自覺) 하지 않으면 시작이 무색해지기 때문이다.
얼굴은 삶의 거울이라 한다.
오늘 한번 더 웃고, 입꼬리 한번 올려보자. 또 모른다. 올라온 입꼬리만큼 좋은 일 찾아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