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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동 Aug 10. 2023

밥벌이 참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신 벗고 털썩



가방. 시계. 양말.

허물 벗듯 걷어내고 시계 보니

밤 10시 넘어간다.


열일하던 워치를 내려놓으며 보니

오늘 '만 오천보'를 걸었네.

궁디 붙이고 모니터 화면에

레이저 쏜 게 온종일이다 싶었는데...


아니네.

어딜 그렇게 다닌, 아니 뛰어다닌 건지...  


발가락이 뜨끔뜨끔하다.




9시가 다 되어 사무실 문 잠그고 나왔다.  

귀찮지만 귀찮아하면 안 되는

최종 퇴실자보안점검표까지 꼼꼼하게 작성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혼자는 아니었다.

26년 차 내 사수.

시쳇말로 '개똥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우리 둘이다.


휘몰아치는 의전 업무는 탄탄한 기획력과

빠른 상황 판단에 따른 위기 대처 능력이 중요하다.

우린 그 보다 중요한 '교정 및 변경사항 반영'이라는

뫼비우스의 띠급 삽질에 아주 능하다.

백번 고쳐 달래도 백번 다 고쳐준다.

'2열 있던 분은 1열로.

1열 가운데 계신 분은 갑자기 불참입니다...'


컴컴해진 밤하늘이지만 살살 걷기에 나쁘지 않다.

이도 저도 다 귀찮다.

미지근한 물 샤워와 포근한 침구가 그리운 시간이다.

그럼에도 또 배는 고프다.


"김밥이나 한 줄 먹고 갈려?"




딱 김밥 한 줄 놓긴 그래서 비빔만두도 하나 시켰다.


사수 눈은 시뻘건 토끼눈이 돼 있었다.

보고 있자니 안쓰럽고 가엽다.

그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면 사수는 친절히 말해 준다.


"너도 거울 좀 봐."


핏발 선 눈알이 시뻘겋게 욕한다.

니 꼴 내 꼴 따질 때가 아니라고.




허기 가실 만큼만 가볍게 먹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걷는다.

사실 길 하나 건너면 바로 정류장인데

사수는 밤길 걸어갈 날 위해

두 정거장 함께 걷기를 제안했다.

야근하면 으레 그렇게 밤산책을 하게 된다.


도란도란 얘기가 오간다.


"밥벌이 쉽지 않다."

"쉬우면 밥값도 좀 싸지나."

"그러기야 하겠나."

"아님 말고."


싱거운 대화 끝에 사수는 툭 한마디 던진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진짜 다행이다."

"와이카노."

"지낸 세월이 있으니 말 좀 어버버 해도

촥촥 알아듣고 다 해주니... 내가 편치. 덕분에."

"뭐라카노."

"일어냐, 사자성어냐."

"큭큭큭큭."




괜히 쑥스러웠다.

도와주는 게 아니라 우리 일이니 같이 하는 거다.


네 일 내 일 가를 수 없다.

그건 사수의 사수.

그 사수의 사수로부터 전수받은 참 고마운 전통이다.

그 속에 나와 내 사수가 있다.


"할 일 하고, 할 말 하는 거야."


그래. 당당함이란 의무와 책임 위에 집을 짓지.

우린 그 집 1순위 설정권자가 되는 거고.




가끔은 밥벌이 격하게 힘들 때 있다.


더구나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체력에

비타민 한 움큼씩 집어 먹을 땐 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사랑스럽고 고맙다.

일용할 양식을 주고 고단함도

함께 걷어내며 나아갈 이가 있기에.


잘 들어갔는지 해피콜 했더니 시크한 우리 사수.


'그만 좀 자라. 이것아!'


네이.네이. 이것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고마워. 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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