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분석
실제로 기대를 보내는 건 구체적인 사람들입니다.
조직의 기대는 상위권자의 말이고,
사회의 기대는 부모님의 걱정이고,
업계의 기대는 선배들의 시선이에요.
세상이라는 큰 단어 뒤에 얼굴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실험을 해봤어요.
내 인생이 소설이라면, 등장인물은 누구인가.
주인공은 나라는 건 알겠는데, 나머지 배역은 누가 맡고 있는가.
누가 조연이고, 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본을 쓰고 있는가.
답을 적어보는 순간,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종이에 이렇게 적어봤어요.
"지난 1년간 내 가장 큰 결정 세 가지를 떠올려봐.
그 결정을 할 때,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누구야?"
첫 번째 결정: 육아휴직을 할까 말까. 떠오른 사람 : 아내, 부모님, 실장님.
두 번째 결정: 브런치에 글을 쓸까 말까. 떠오른 사람 : 없었어요. 아, 아니다. 있었습니다.
업계 선배 한 명. 직접 대화한 적은 거의 없는데, "그 사람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가 머릿속에 있었어요.
세 번째 결정: 복귀 후 어떤 포지션을 원할 것인가. 떠오른 사람 : 실장님, 같은 업계 사람 2명, 그리고 아버지.
이름을 적고 나서 놀랐습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특정 사람들이 내 선택의 기준선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특히 두 번째 : 업계 선배. 그 사람과 마지막으로 대화한 게 2년 전인데,
그 사람의 시선이 내 머릿속에 살아 있었습니다.
"글쓰기? 그게 커리어에 무슨 도움이 되는데?"라고 말할 것 같은 그 표정이요.
실제로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한 적은 없어요.
제가 만들어낸 대사입니다.
그런데 그 가상의 대사가 실제로 제 행동을 막고 있었어요.
브런치 첫 글을 올리기까지 3년이 걸린 이유 중 하나가 이 사람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사람에 대한 제 상상이요.
혹시 당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나요.
뭔가를 시작하려는 순간, 특정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멈칫한 적.
"그 사람이 알면 뭐라고 할까"가 브레이크 역할을 한 적.
그 사람이 실제로 뭐라고 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의 그 사람은 항상 비판적이에요.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실제보다 가혹하게 상상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컨설팅에서 이해관계자를 분석할 때,
두 개의 축을 씁니다. 하나는 영향력, 하나는 관심도. 이
걸 개인에게 맞게 바꿔봤어요.
X축: 영향력 : 이 사람이 내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의 크기.
Y축: 관계 에너지 :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받는 에너지. 충전인가, 소모인가.
네 칸이 만들어집니다.
① 높은 영향력 + 에너지 충전 = 핵심 조력자.
내 결정에 영향을 크게 미치면서, 그 관계가 나를 살리는 사람.
진짜 멘토, 깊은 대화가 가능한 친구, 나를 응원하면서도 솔직한 피드백을 주는 사람.
② 높은 영향력 + 에너지 소모 = 보이지 않는 각본가.
내 결정에 영향이 크지만, 그 관계에서 에너지가 빠지는 사람. 기대가 큰 부모, 까다로운 상사, 혹은 직접 만나지 않아도 머릿속에 사는 업계 선배. 이 사람의 기대에 맞춰 내 인생을 설계하고 있을 수 있어요.
③ 낮은 영향력 + 에너지 충전 = 숨은 에너지원.
의사결정에 직접 영향은 크지 않지만, 함께 있으면 에너지가 올라가는 사람. 취미 친구, 느슨한 커뮤니티, 오래됐지만 편한 관계. 과소평가하기 쉬운 사분면이에요.
④ 낮은 영향력 + 에너지 소모 = 관성 관계.
의사결정에 영향도 없고, 에너지도 빼앗기는 관계. 의무적 모임, 연락하면 피곤한데 끊지 못하는 관계, 정리 안 된 인간관계. 2장에서 발견한 "빈칸"처럼, 관성 관계도 의식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아요.
②번입니다. 보이지 않는 각본가.
이 사분면에 있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대부분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부모님이 "안정적인 직장에 있으라"고 하는 건 나쁜 의도가 아니에요.
실장님이 "팀을 키워봐"라고 하는 것도 기대에서 나온 말이에요.
문제는 의도가 아니라 구조입니다.
이 사람들의 기대가 쌓이면, 나도 모르게 그 기대를 나의 목표로 착각하게 돼요.
4장에서 적었잖아요 : "팀장이 되고 싶다"가 내 욕구인지,
조직의 기대를 내면화한 건지 구분이 안 된다고.
그 내면화가 일어나는 경로가 바로 ②번 사분면의 사람들이에요.
제 경우, ②번에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업계 선배. 직접 만난 적은 거의 없지만, "그 사람이 인정할 만한 커리어"를 기준으로 삼고 있었어요. 왜 그 사람이 기준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커리어 궤적이 "정답"처럼 머릿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아버지. 직접적으로 뭘 강요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걱정하지 않을 선택"을 무의식적으로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안정적인 것, 설명하기 쉬운 것, 남들이 들었을 때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 그게 아버지의 실제 기대인지 제가 상상한 기대인지도 확인해본 적이 없었어요.
같은 업계 동기. 비슷한 시기에 입사해서, 서로의 커리어를 의식하는 관계. 비교는 안 하려고 하는데, "그 친구는 벌써 팀장인데"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이것도 에너지를 빼앗아요. 만나면 좋은 사람인데, 만나고 나면 묘하게 조급해지는 관계. 3장에서 "방향 없는 대화"가 에너지를 빼앗는다고 했는데, 이 친구와의 대화는 방향이 있어요. 다만 그 방향이 "비교"를 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어요. 모두 실제로 나에게 뭔가를 요구한 적이 없다는 것.
제가 그 사람들의 기대를 만들어내서,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있었던 겁니다.
가장 무서운 각본가는 실제로 각본을 쓴 적 없는 사람이에요.
내가 그 사람의 대사를 대신 써서, 내 머릿속에서 상영하고 있었던 거예요.
②번만 보면 우울해져요. ①번과 ③번도 봐야 합니다.
①번, 핵심 조력자. 내 경우에는 아내였어요.
영향력도 크고, 에너지도 줍니다. 다른 멘토와 같은 한분도 더 계시구요.
"그거 해봐"라고 등을 밀어주는 사람.
3장에서 하루 에너지 지도의 마지막이 "아내와 대화(+10)"이었잖아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꺼낼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어요.
육아휴직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글을 써보겠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사람이 ①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핵심 조력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②번 사분면의 압력을 버틸 수 있어요.
한 명도 없으면, 각본가들의 시나리오를 거부하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③번, 숨은 에너지원.
영국에서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들.
1년에 두세 번 연락하는데, 대화가 시작되면 아무 맥락 없이 이야기가 터져요.
이 친구들과 대화하면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생각납니다.
회사 직함도, 업계 포지션도, 한국 사회의 기대도 없던 시절의 내가 돌아오는 느낌.
영향력은 크지 않지만,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관계예요.
2장에서 "관계" 칸의 대부분이 가족에 집중되어 있다고 했는데,
③번 사분면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걸 여기서 다시 확인했습니다.
에너지 지도(3장)에서 "의미 있는 대화"가 충전이었다는 걸 발견했잖아요.
등장인물 분석을 하니까, 어떤 사람과의 대화가 의미 있는 건지가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사람을 만나야 해"가 아니라, "이 사람을 만나야 해"로 바뀌는 거예요. 관계도 전략이 필요합니다.
등장인물을 매핑하는 건 관계를 끊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관계의 구조를 보라는 이야기예요.
3장에서 에너지의 흐름을 추적했을 때처럼, 관계에도 흐름이 있습니다.
어떤 관계는 에너지를 주고, 어떤 관계는 빼앗고, 어떤 관계는 내 선택의 방향을 바꿔놓습니다.
그 지도를 한번 그려보는 것, 그게 이 챕터의 전부예요.
내 선택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누군가의 기대였을 수 있습니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에요. 중요한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문제는 그걸 모르는 채로 사는 거예요. "내가 원해서 이 길을 가고 있다"고 믿는데, 실은 머릿속의 각본가가 쓴 시나리오를 따라가고 있다면 그건 주인공이 아니라 배우예요.
영국에서 배운 걸 다시 떠올립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것.
주인공이 되려면, 먼저 누가 각본을 쓰고 있는지 알아야 해요.
그리고 그 각본 중 내가 쓴 부분과 남이 쓴 부분을 구분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는, 남이 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가 대신 써준 가상의 각본까지 구분해야 해요.
알고 나서, 그 각본을 수정하든 새로 쓰든, 그건 그다음 문제입니다.
아는 것이 먼저예요.
① 지난 1년, 가장 큰 결정 세 가지를 떠올려봅니다. 그 결정을 할 때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누구였나요. 그 사람들을 매트릭스에 올려봅니다.
② 2번 사분면(높은 영향력 + 에너지 소모)에 누가 있나요? 그 사람의 기대는 실제로 확인한 것인가요, 내가 상상한 것인가요. 그 기대와 나의 욕구를 구분할 수 있나요. 만약 그 사람이 사라진다면, 내 선택이 달라질 것인가요.
③ 3번 사분면(낮은 영향력 + 에너지 충전)에 누가 있나요? 그 관계에 더 시간을 쓸 수 있나요. 과소평가하고 있던 관계는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