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회사는 분석하면서 나는 왜 안 하는가

by 조이

건강검진 결과지를 열었습니다.

간 수치 옆에 빨간 화살표가 찍혀 있었어요.

정상 범위를 한참 벗어나 있었습니다.

의사가 결과지를 넘기며 물었어요.

"요즘 많이 피곤하시죠?"

피곤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까,

그게 피곤한 건지도 몰랐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이미 지쳐 있었고,

금요일 저녁에 퇴근하면 소파에 쓰러졌어요.

주말은 회복이 아니라 다음 주를 버티기 위한 충전이었습니다.

알고보니 환자 수준이더라구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원래 직장인은 다 이렇게 사는 거라고.

돌이켜보면, 몸이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머리는 "괜찮아, 버틸 수 있어"라고 했지만, 간은 솔직했어요.

빨간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8년 동안 게임 업계에서 사업전략을 짰습니다.

내부데이터와 외부 데이터를 분석하고, 경쟁사를 읽고, 사업 방향을 설계했어요.

데이터를 모아 구조를 만들고, 그 구조 위에서 의사결정이 움직이는 걸 봤습니다.

수백개의 보고서를 만들었고, 그 보고서가 실제로 무언가를 바꾸는 경험도 했어요.

꽤 잘했습니다.

적어도 회사에서의 나는 선명했어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직함이 나를 설명해줬고, 프로젝트가 나를 증명해줬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뭔가 어긋나기 시작했어요.

회사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에요.

조직은 원래 변하니까요. 문제는, 그 변화 속에서 제 역할의 스펙트럼이 좁아졌다는 겁니다.

분석하고, 전략을 세우고 : 거기까지. 그다음은 구조가 허락하지 않았어요.

깨보려고 했습니다.

새로운 영역을 제안했고, 더 넓은 영향력을 만들려 했어요.

밀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밀 수 있는 벽이 아니었어요.

구조적인 한계는 개인의 노력으로 단기간에는 넘기 어렵습니다.

그걸 아는 데도 시간이 걸렸어요.

결국 제 턴은 다시 오겠지만, 그 역시 시간이 필요한 상황인거죠.

누군가에겐 괜찮은 환경이었을 겁니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고, 크게 흔들리지 않는.

매달 같은 날 월급이 들어오고, 내년에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거라는 확신.

어떻게보면 그게 안정이에요.

저한테는 아니었습니다.



자유가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 말이 거창하게 들릴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말하는 자유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향력의 범위를 스스로 넓혀가는 것.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는 환경에 있는 것.

내가 하는 일의 반경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

그게 저한테는 숨 쉬는 것과 같았어요.

그래서 비교적 자유도가 높은 게임 업계를 택한 것이기도 했고요.

성장이 정체되고 도전이 사라지면, 남는 건 지루함입니다.


지루함은 생각보다 위험해요.

처음에는 "요즘 좀 심심하네" 정도로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뭐, 원래 그런 거지"가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 이렇게 사는 거야"로 착지해요.

그 문장이 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위험 신호였어요.

"다 이렇게 사는 거야"는 위안이 아니라 포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 자리에서 내려와, 남들의 평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안에 들어가면 불편함이 사라져요.

비교할 것도 없고, 도전할 것도 없고, 실패할 것도 없으니까.

무난한 하루가 무난하게 이어지는 것.

그게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간 수치가 빨간색이 됐어요.



저는 영국에서 약 12년을 살았습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열한살에 건너가서 스물셋에 돌아왔어요.

사춘기, 첫사랑, 진로 고민, 정체성 형성.. 사람이 만들어지는 시간을 전부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그 시기 동안 배운 것 중 하나가 있어요.

지금도 저를 규정하는 믿음이에요.

모든 사람은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것.

예의가 아니라 진짜로요.

영국의 기숙학교에서, 수업에서, 운동장에서, 모든 것은 그 전제 위에서 돌아갔습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의 기준은 무엇이냐. 너는 왜 그렇게 결정했느냐.

질문은 항상 "너"로 시작했어요.

자기 기준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

그게 당연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 그 감각이 조금씩 희미해졌어요.

군대를 다녀오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그 과정이 나빴던 건 아닙니다.

다만 언제부턴가,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보다 "아, 다들 이렇게 사는 거구나"가 먼저 나왔어요.

변화는 천천히 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이야기의 주인공 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에요.

조금씩, 아주 조금씩, 타인의 시나리오 위를 걷기 시작합니다.

조직이 원하는 역할, 사회가 기대하는 모습, 가족이 필요로 하는 기능.

하나씩 맡다 보면 어느 순간 돌아볼 겨를이 없어져요.

돌아보지 않으면, 잃어버린 것도 모릅니다.


다음 주에 육아휴직이 시작됩니다.

이유는 세 가지예요.

1.아내를 돕는 것.

2.지치지 않은 척했던 몸을 회복하는 것.

3.그리고 나를 찾는 것.

셋 중 세 번째가 가장 어렵습니다.

"나를 찾겠다"는 말은 쉬워요.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MBTI를 해봤습니다. 네 글자를 받았어요.

그런데 그 네 글자로 내일 뭘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저널링도 해봤어요.

노트를 펼치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썼는데, 같은 생각이 뱅글뱅글 맴돌기만 했습니다.

목표를 세워봤어요. 그런데 그 목표가 정말 내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기대를 무의식적으로 옮겨 적은 건지 확신이 없었어요.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생각을 풀어놓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에 구조를 주는 도구.

그러다 하나 떠올랐어요.

8년 동안 회사를 분석하면서 써왔던 것들이요.

시장을 읽을 때, 경쟁 구도를 파악할 때,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쓸지 결정할 때

; 매번 꺼내 들었던 프레임워크들.

이걸 나한테 써보면 어떨까.

회사 대신 나를 분석 대상으로 놓는 겁니다.

컨설턴트가 프로젝트 첫날 하는 것처럼, 일단 보고, 구조를 읽고, 방향을 잡고, 작게 돌려보는 것.

다만 클라이언트가 기업이 아니라, 나 자신인 거죠.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에요.

회사에선 데이터를 수백 시간을 들여 분석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으니까요.



이 브런치북은 그 실험의 기록입니다.

거창한 인생 설계서가 아니에요.

솔직히 말하면, 지금 저는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답이 없어요. 질문만 있어요.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인가."

"나는 어디에 서 있는 사람인가."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 사람인가."

이 질문들에, 지금까지 회사에서 쓰던 도구를 갖다 대보려 합니다.

하루를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내 삶의 빈칸을 찾고,

에너지가 어디서 새는지를 추적하고, 내 패를 읽고 전략을 짜는 데까지.

한 챕터에 하나의 프레임워크를 적용하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을 기록할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이 모든 조각을 모아 하나의 질문에 답해보려 해요.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한 가지 미리 말해둘 것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비슷한 자리에 서 있다면요,

바쁘게 달려왔는데 정작 나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것 같다면.

직함을 빼면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면.

"다들 이렇게 사는 거지"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면.

이 책이 당신에게 첫 번째 미팅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를 컨설팅하는 일, 같이 시작해볼까요.


이 시리즈는 매주 두 챕터씩 연재됩니다.

구독해두시면 다음 이야기가 도착할 때 알림을 받을 수 있어요!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