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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욱 Feb 02. 2021

방제 : 데미안을 읽은 사람들만요 일관된 해석(20분)

데미안 요약본을 본 사람들 말고요~

*나름의 깊은 내용과 나름의 개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데미안을 읽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생각에 더 넓은 관점을 얹어줄 것입니다. (글 길이 20분 소요)


교내에서 독서토론이라는 명분으로 데미안을 읽은  독후감을   5 만에 '다시 읽은' 책이다. 데미안을 처음 읽을 당시 재미없고 따분했다. 고구마를 100 삶아먹은 듯한 답답한 싱클레어의 모습은 5  책을 덮게 만들었다. 결국 요약본을 찾아가며 독후감을 작성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이제 와서 데미안을 읽어보니 사뭇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느낌은 그동안 자기계발서에서 찾을  없었던 깨달음이었다. 수십 권의 자기계발서 말하는 마인드셋보다   권의 데미안이  가치 있게 여겨졌다.  이유는 5년간 일상생활 속에서 싱클레어의 트랜스포메이션 딜레마 일명 '자아 성장통' 깊게 공감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싱클레어, 크로머, 데미안, 에바 부인, 피스토리우스에서 나의 내면의 모습을 엿볼  있었다. 그들은 주인공인 싱클레어가 성장해나가는 과정마다의 NPC(도우미 캐릭터) 그려졌다.  동시에 싱클레어의 자아상이라고도 해석됐다. 결국 나는 데미안을  가지로 해석할  있다고 생각했다.  번째로 심리학으로  데미안, 그다음 종교적으로  데미안.   가지 관점으로 데미안에 대해서 풀어내 보고자 한다.


풀어본다곤 했지만  맘대로의 해석이 담겨있다. 논문을 찾으면서까지 문학을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2 전에 보았던  읽어드립니다 강독 편에서 나온 데미안을   말곤 없다. 다른 사람의 해석을 즐겨보지만 객관적인 것은 버리고 주관적인 생각 위주로 적었다. 그래서 하나의 재미로 봐주었으면 한다.

'너무 핀트에 어긋난 생각이 있다면 지적해주길 바랍니다_! 'ㅇ' '



데미안을 한마디로 정리하는 세 가지 관점

데미안을 관점별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심리적 관점에서 내면의 선악을 포용하자를 길게 늘여놓은 것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악으로 규정짓지 말고 개성과 다양성을 추구하자 것이며

시대적 관점에서 민족주의로 서로 미움을 부추기지 말고, 민족과 민족을 대립구도 나누는 것을 말자는 것이다. (이때는 1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핵심 키워드는 개성, 인정, 통합이다.



먼저 데미안의 세계관에 대해 간략히 짚고 가자

데미안의 세계관

데미안의 세계관은 가장 처음 목차에서부터 친절히 설명해준다.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로 나누어진 이원론적 두 개의 세상이다. 선의 세계는 싱클레어가 몸담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로 대표되는 세상이다. 사랑과 엄격의 세상, 모범과 학교의 세상이다. 다정하고 친절하며 청결하다. 선의 세계는 규율과 모범의 상징이며 동시에 사랑과 포근함의 상징이 되는 세상이다. 선의 세계 저편에는 악의 세계도 있다. 책에 내용에는 유령들, 공포와 온갖 끔찍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주정뱅이와 감옥, 악을 쓰며 욕을 퍼붓는 여자들과 도난, 살인, 자살의 이야기가 즐비해놓은 세상이다. 싱클레어는 이 두 가지 세계관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선의 세계에서는 안전함과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따분했다. 악의 세계에서는 자극적이며 새로움을 느낄 수 있었지만 위험했다. 선의 세계에서는 도덕성과 양심. 모범이 되어야 한다. 싱클레어는 호기심이 많았다. 그리고 자신은 두 세계의 중간지점에 있다는 걸 알아가고 있었다. 이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을 하게 되었다. 따분하고 모범적인 선의 것에 대해 조금씩 벗어나고자 했다. 모범적이고 편안한 생활, 천사가 되는 기분은 좋지만 때로는 성경에서 말하는 탕자 이야기에 매료되어 그 사람이 되돌아오지 말았으면 기대도 있었다. 싱클레어는 악의 존재들인 탕자에 대해 더 눈길이 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호기심이 증대되었다. 그 출발점이 거짓말이었다. 악의 세계의 시작은 그의 친구들에게 한 '거짓말'로 시작된다.



1. 심리학적으로 본 데미안과 결론

왜 심리학적으로 볼 수 있었을까?

데미안은 성장 소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의식 성장 소설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단순히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싱클레어의 표면적 성장을 돕는 게 아니다.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의 성장을 돕는 건 당연하며 거기에 더하여 더 깊게 자아형성과 의식성장에 도움을 준다고 해석했다. 정신분석학에 자주 등장해볼법한 이야기도 자주나온다. 꿈이야기도 자주나온다. 의식과 종교적인 이야기도 나온다. 그 중에 집중해볼 단어어는 '자아'이다. 자아는 심리학적으로 깊은 연관이있다.

책의 내용에서 '자아'가 세 번 나온다. 내용상 세 번 나오지만 나올 때마다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첫 번째로 카인의 후손을 말할 때이다. 이때는 자아에 대한 소개다. 두 번째로는 자아형성이 만들어지는 시기다. 말해 알을 인식하고 깨는 시기라고 할 수있다. 세 번째로는 자아형성을 마치고 자기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소개부터 시작해서 알을깨고 마지막으로 자기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첫 번째 42p
카인의 후손들이 두려워한 것도 바로 그 표식 때문이었어. (..)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표식이 있는 사람들이 무섭다고 말을 한 거고. 실제로 그런 건 사실이야. 용기와 '자아'를 지닌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여겨지는 법이거든

카인의 후손을 두려워하는 것은 표식 때문이라 말한다. 그리고 표식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그 내용은 사실이라며 용기와 자아를 말하며 두려운 존재와 연결시킨다. 이로서 표식은 자아를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표식이 있는 사람들은 끝에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표식이 있음을 알아보듯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관적 해석에 따르면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한 사람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자아상일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지 어렵겠지만 뒤에 융의 자기 발달과정 그림을 보면 어렴풋하게 이해가 될 것이다.

심리학적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 부분은 그저 용기를 지닌 사람과 사회적 통념을 무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해석될지도 모른다. 다음 두 번째다.


두 번째 146p
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는 새롭거나 놀라운것을 가르치는 것은 드물었다. 하지만 극히 사소한 것조차도 마치 부드럽게 망치질하듯 계속해서 내 안의 같은 지점을 건드렸다. 나의 '자아'를 형성하고 허물을 벗으며 껍질을 깨고 알아서 나올 수 있도록 돕는 대화였다. (..) 껍질 밖을 그 아름다운 머리를 내밀 수 있도록 말이다.

피스토리우스의 대화는 자아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나의 자아를 형성함으로 알에서 나올 수 있음을 말을 하는데 '껍질 밖'이라는 표현을 쓴다. 자아가 형성되지 않으면 껍질 밖으로 나오기 어렵다.


세 번째 220p
나는 방 한가운데서 모든 의식을 집중해 에바 부인을 떠올렸다. 에바 부인이 내 사랑을 느끼도록 에바 부인을 끌어달 수 있도록 내 영혼의 힘을 한 곳에 모으는데 노력했다. (..)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집중하자 손가락과 발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 순간 마음속에 수정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것이 나의 '자아'라는 것을. 이제 냉기는 가슴까지 차올랐다.

표식은 자아다. 자아가 흐릿해졌던 당시 싱클레어는 방탕한 생활을 했다. 대학교 친구와 술을 마시고 무의미한 나날을 보냈다. 대학교는 퇴학위기에 몰려있고 아버지가 와서 제발 좀 정신을 차리라며 애원했다. 그때 당시 잠깐 데미안을 만난 적이 있는데 후에 말하길 싱클레어의 표식이 흐릿해졌었다고 데미안은 말한다.

그렇다면 자아가 희미해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자아가 희미해졌을 때 방탕한 삶을 살며 죽어가던 싱 클레 어였다면 자아가 희미해진다는 말은 내면의 자신을 잃어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세 번째 에바 부인을 만나면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다.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의 심리의 어떤 측면은 드러낸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마이다.



남성이며 동시에 여성을 가진 통합된 자아 아니마 아니무스


2. 칼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


헤세는 칼 융과 어느 정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걸로 어렴풋하게 들은지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어떤 이념을 넣었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한다. 우선 예상키로 융의 분석심리학에는 아니마 아니무스가 있다. 싱클레어가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다. 그건 양면성이다. 남성이면서도 여성이고 악하면서 선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데미안을 보았을 때처럼 말이다. 아니마가 뭔지 아니무스가 뭔지에 대해 설명하면 말하고자 하는 게 길어지므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아니마는 남성 이 가지는 여성성이며 남성은 자신에 내면에 있는 여성성을 발견함으로써 인간의 성숙을 유도할 수 있다. 반대로 여성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남성성을 발견하고 이해함으로 인간의 성숙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여자 같은 남자가 성숙하다는 말은 아니다. 어쨌든 나는 싱클레어의 아니마는 에바 부인으로 생각했다. 왜냐면 싱클레어는 꿈속에서 에바 부인을 간절히 찾아 헤맷다. 실제 모습은 에바 부인을 보며 깨달았다. 내가 꿈에 그리던 그녀가 여기 있었구나!  그녀는 아니마였다. 그렇다. 그래서 싱클레어는 아니마를 만남으로서 내적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아에서 자기로 가는 과정에서 아니마인 에바 부인을 떠올림으로 도달하게 된다.



싱클레어가 그림을 그렸을 때의 아니마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를 보고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숭배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다가 알게 된 것은 그림이 데미안을 나타내고 있어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석양이 통과하는 베아트리체 혹은 데미안의 초상을 보고 싶어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때 싱클레어는 석양을 통과한 나의 그림에서 보게 된 건 '나 자신'이었다. 이 부분을 읽고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림이 변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 장면의 의미는 자신의 양면성, 내면에 대해 알려주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건은 바로 데미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고 숭배했던 건 아직 발견하지 못한 나 자신이었다. 싱클레어가 자신이 그린 그림이 데미안이란 것을 알기도 전, 석양을 지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이 그림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도 알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 있다. 어렵사리 그림을 그리고 난 뒤 완성본 그림을 보며 '나에게 속한 얼굴'이라 말을 했던 적이 있다. 그림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아니마였을 것이다. 석양이 지는 그림자와 함께 보았을 때 비로소 보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니마는 에바 부인을 만남으로 진정한 성장을 이루어진다.


데미안의 뜻밖의 마지막 충고

끝으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충고한다. 앞으로 크로머를 대면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는 크로머가 아니라 크로머와 같은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크로머는 표면적인 대상일 뿐 어떠한 가면을 쓰고 찾아올지 모르기에 데미안에게 충고해준다. 여기서 중요한 건 크로머에 대한 이야기는 싱클레어가 가장 기피했었던 트라우마 같은 이야기다. 크로머를 구원해준 기억 때문에 데미안이 기억하지 않을까?라고 노심초사하며 데미안을 기피할 정도로, 데미안을 만날 때 크로머에 대해 이야기할까 봐 껄끄러워할 정도로 회피하던 주제였다. 그런데 그것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자신의 어두웠던 그림자, 최초의 악이라 규정지었던 것들을 걷어내고 다시 말해 나 자신만의 트라우마를 걷어내고 자기실현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융의 분석심리학 - 자기실현 과정

3. 융의 분석심리학 - 자기실현 과정

나는 싱클레어가 의식성장에 대한 과정을 인격화 시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가지고 설명해보려고 했지만 잘 정리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융의 이론을 적용한다면 더 풍부한 해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싱클레어의 아니마는 에바 부인이다. 데미안은 이미 자기실현의 경지 올라 남자 같으면서 여자 같은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이미지를 지닌 사람으로 싱클레어의 자아가 무사히 자기실현을 할 수 있도록 내적 작용을 해주는 안내자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에바 부인을 떠올리며 '자아'를 만났다는 말은 아무래도 아니마를 내적 작용으로 자아가 아닌 '자기'(self) 무의식을 만나게 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동안 감추고 싶었던 그림자(크로머)와 같은 트라우마를 걷어내고 데미안 없이도 자기실현에 도달하라는 의미에서 크로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4. 심리학적으로 바라본 결론

싱클레어가 자아 성장의 발달과정을 그려낸 스토리다. 어쩌면 발달과정 보다 통합과정이라는 게 더 어울리겠다. 처음 선의 세계인 온실 속 화초에서 벗어나 더러운 것과 좋은 것을 경험해보며 의식의 통합과정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 데미안, 크로머 모두 내 안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또는 실존하는 인물이며 동시에 내면에 영향을 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정리하자면 껍데기뿐인 페르소나에서부터 자아, 그림자를 거처 자기까지 오게 되는 과정을 그려낸 책이며 그 안에서 나를 대입에 많은 영감과 위로 열정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선악을 나누는 기준이란 게 뭐란 말인가


1. 종교적으로 본 데미안과 결론

헤르만 헤세의 배경

헤르만 헤세의 가문은 신학자의 가문이다. 가문의 전통을 따르듯 헤세는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게다가 신학교의 속박된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였다. 1학년이 되어선 퇴학을 당할 만큼이었으니 얼마나 자신과 맞지 않는 생활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서점의 수습 점원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 작가로서 명성도 알릴 수 있게 된다.

위의 헤르만 헤세의 배경인 짧은 몇 줄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본다. 데미안을 쓰게 된 이유를 담고 있다. 헤르만 헤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과 악을 반으로 나누고 개성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 지적한다. 모범과 질서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사라지고 죽어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마치 자신처럼 말이다. 신학교의 모범적이고 억압받는 생활 가운데서는 시인 예술과 다양성을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꿈이 있는 사람에게 신학교는 감옥이었을 것이다. 청교도적이고 깨끗함은 맞지 않았을 거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함을 버리 자는 건 아니다. 헤르만 헤세는 순수함과 자기실현적 가치를 중요시 여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었을까?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아를 억압하는 '알'이 불만이었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철학 : 선과 악을 가르는 진리

헤르만 헤세는 개성이 중요하다. 그러나..

단순히 모범적이고 성실함을 대표하는 선의 세계에서는 창의성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창의성의 반대말이 성실이라는 말이 있듯 헤르만 헤세는 서문에 시인이 되고 싶었다. 창작가이며 창의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청교도적이며 규율, 규칙, 질서, 억압 그러면서도 새로운 지식에 대해서 알아선 안된다. 오로지 진리만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에 진절머리가 났을 것이다. 이것은 아브락사스를 숭배하는 데미안에게 많은 모습이 투영된다. 아브락사스는 남자기도 여자기도 하며 천사이기도 악마이기도 한 이중적인 존재이다. 아브락사스를 숭배하는 데미안과 그 조직들이 중요시 여기는 건 '개성' '다양성'이다. 특히 개성이라는 말과 철학적인 부분은 데미안이 크게 강조하는 부분이라 자주 나온다. 예수 옆의 달린 두 강도를 이야기할 때도 범죄를 저지르다 마지막에 회개하여 천국에 가는 강도를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봤다. 대신 그 옆에서 자신의 지조를 지킨 강도를 높게 샀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절개를 지킨 그 강도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생각한다. 이토록 데미안은 자신만의 개성과 다양성을 중요시 여겼다. 어쩌면 지조와 절개, 철학이다. 이는 선의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다. 규율과 모범이 중요시되는 곳에서 개성과 다양성은 눈엣가시처럼 여겨질게 뻔하며 수용하지 못한다. 그건 질서에 어긋나니까. 그것은 헤르만 헤세가 신학교에서 자신과 맞지 않아 괴로워했던 일처럼 말이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는 개성을 중요시 여기지만 개성을 묵살시키는 신학교의 억압과 정신에 잘 섞이지 못하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신학교를 애초에 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느낌을 대충 알 거 같다.

그래서 아브락사스의 신을 섬기는 것이다. 선악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무의미한 짓이라고 본다. 그것을 통합하려 애를 썼던 것 같다. 선의 세계의 가면. 웃음만 있는 곳보다 울음도 있고 희로애락이 있는 세상을 꿈꾸고 통합하려 하지 않았을까


왜 선악의 세계를 통합하고 싶었을까?

왜 그랬을까? 왜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의 구분 짓지 않는 통합을 말하고 싶었을까?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기독교의 비판적 태도를 비추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나 종교 순기능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책에서 나오듯 싱클레어가 나의 목표는 쾌락이 아니라 순수함이며 행복보다 아름다움과 숭고함이라 말한다. 헤르만 헤세는 현재 기독교 세계에서 아름다움과 순수함과 숭고함이 미약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천편 일륜적이며 똑같다 일관된 사람들처럼 오로지 웃는 얼굴을 해야만 하고, 형제들에게 칭찬만 해야 하고, 어른들에게 대들면 안 되고, 윗사람의 말은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그곳에는 순수함이나 아름다움 숭고함은 없다고 봤을 것이다. 어쩌면 수직적인 종교가 질색이었고 수평적인 아브락사스는 그에게 잘 맞는 안식처였을 것이다. 그는 예술가였으니까. 때론 도발적이고 상상력을 뿜어내는 작품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마치 책 <데미안>처럼 기독교 집안에서 쓰인 석가모니의 소설 <싯다르타>처럼 말이다. 그가 청교도적인 성격에 기숙사 생활을 무사히 끝마쳤더라면 데미안이라는 대작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회사원이나 목사 되었겠지. (목사는 데미안과 싯타르타를 절대 쓸 수 없다.) 그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선이라는 세계를 부수고 나왔다. 그것이 알이었다.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탐닉했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선의 기준. 그리고 확장되어서 사회적 통념이 되어 나에게 만들어진 새장과 같은 기준, 억압받는 질서들 그것을 깨고 나서야 비로소 자아실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선,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선 그들이 강제적으로 만든 질서를 부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성경에는 다른 신을 섬겨선 안된다고 말한다. 우상숭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다. 선에 악이 섞이는 순간 그것은 악이 된다고 가르친다. 정보를 조심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차단까지 하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 정보를 분간하는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더 알필요도 더 알려고도 할 필요 없다. 그러므로 얻을 수 있는 건 확고한 믿음일 것이다. 종교적으로 보았을 때 의식은 어쩌면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독실한 종교인에게 믿음이 사라지면 표식도 사라지고 나 자신에 대한 가치관도 사라진다. 그래서 반드시 그들은 그 믿음을 지키려고 한다. 구원을 위해서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락사스가 정답은 아니다.

피스토리우스는 아브락사스를 믿는다. 싱클레어에게 선악과 내적 갈등을 통합해 나가는 힘을 알려주고 가르쳐준다. 하지만 이내 싱클레어와의 관계는 끝이 나게 되는데 피스토리우스는 가르침과 달리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역사에 집착하고 과거의 의식에만 몰두한 나머지 오히려 쇠퇴하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체 알을 부수려고 하지도 않는 모습을 피스토리우스는 보여주었다. 싱클레어는 그가 가진 사상과 생각이 고리타분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피스토리우스는 굉장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지적은 자신의 아킬레스건과 같은 말이 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어른이 자신의 과거사와 웅장한 이야기를 할 때 한 청년이 "늙어빠진 소리 과거 좀 그만하고 앞으로 일어날 이야기나 해줘요"라고 말해버린 것과 같다. 피스토리우스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고 싱클레어와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재미있는 건 피스토리우스는 음악을 만드는 예술가다. 그리고 아브락사스를 믿는다. 그러나 아브락사스에 빠진 나머지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에 대해선 잊어버렸다. 예술가로서, 한 사람으로서의 성장이 멈춰버린 것이며 스스로 알속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사람은 성장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며 오고 가는 철새들만 존재할 뿐 주위에 남은 사람은 없을 거 같다는 교훈을 남기는 것 같다. 그는 늘 혼자였다. 이는 신을 믿는다고 해서 정답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핵심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피스토리우스는 알으로 다시 들어간 것만 같다. 부딪히지 않고 회피 해버린체 과거라는 진통제를 마시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피스토리우스는 알을 만들고 들어가며 선과 악을 다시 만들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선의 세계는 알과 같다. 싱클레어가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왔던 선의 세계 말이다. 그곳에서는 알을 부술 필요 없다. 투쟁할 필요도 없다. 아브락사스가 선이기에 알을 만들고 다른 것은 악으로 본다면 또 다른 기독교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신이 해답은 될 수 있을지언정 정답은 될 수 없다.
정답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2. 헤르만 헤세와 비슷한 생각은 누가 했을까?

범신론과 일신론, 아인슈타인과 스피노자 헤르만 헤세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은 세계밖에 별개로 존재하는 인격신이 아닌 우주, 세계, 자연의 모든 것과 자연법칙을 신이라 하거나, 또는 그 세계안(신과 세계는 하나)에 하나의 신이 내재되어 있다는 철학, 종교관이자 예술적 세계관이다. 만유신교, 만유신론(萬有神論)이라고도 한다.

헤르만 헤세를 보며 많이 느낀 건 아인슈타인의 범신론과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범신론을 만든 스피노자와 닮았다. 아인슈타인, 스피노자, 헤르만 헤세의 공통점은 예술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예술가라 불렀으며 집중이 안될 때면 악기를 연주하곤 했다. 스피노자는 미학을 발표하며 예술에 이르는 길을 써내려 왔다. 헤르만 헤세는 어떨까? 헤르만 헤세는 시인이 꿈이었다. 작가이며 의심의 여지없이 예술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종교를 버렸지만 의외로 신에 대한 생각을 지극히 하는 사람이다. 종교를 가지지 않는다 해서 무신론자가 되라는 건 아니다. 기독교에선 이것을 단일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기에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저 세 사람은 범신론으로 항상 신을 의식하며 살아갔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와 데미안을 쓰고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네"라는 말을 했다. 범신론을 만든 스피노자도 신을 끔찍히 사랑했다. 범신론을 만들 만큼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셋은 '사랑' '숭고함'을 가장 중요시 여기기까지 한다. 다만 종교를 가지지 않을 뿐이다. '사랑' '숭고함'이라는 그 기본 가르침과 뿌리는 종교에 근간을 두고 있기는 하다. 종교를 버렸지만 가르침은 버리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교회의 부정과 역사적 만행에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헤르만 헤세는 꿈을 가진 입장에서 다양성을 무시하고 개성을 찾아볼 수 없는 교회에 있어 불만을 가졌다.

스피노자는 맹신을 강요하고 부패된 교회권력에 의해 범신론을 만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본연의 가르침을 집어치우거나 쓰레기통에 넣어 모든 걸 부정하진 않았다. 그들은 인류애가 깊었고 신에 대해 생각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알을 깨고 나와 실존과 자유를 찾아 떠났으며 남들보다 훨씬 더 어려운 길을 걸어갔다.






그 외



1. 싱클레어의 성장패턴

싱클레어의 성장패턴은 성장-고통-성장의 구조를 띤다. 의식성장의 한 단계 올라가기 위해서 트랜스포메이션 딜레마 일명 '성장통'을 겪는다. 그러므로 의식 없고, 개성 없고, 용기 없고, 자아도 없었던 온실 속 화초였던 그저 겁쟁이였던 싱클레어는 자신의 삶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며 스스로 개척해야 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소명은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이라 정의 내린다. 처음에 싱클레어는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 잘 보여준다. 데미안을 보며 혐오감과 동시에 우월함을 느끼고 크나우어를 보며 연민과 혐오감에 속이 메슥거렸다고 한다. 이후로 데미안과 에바 부인을 만남으로 내면의 선악을 포용하였는지 에바 부인에 대한 사랑으로 옮겨갔는지 다르게 표현되기도 한다.

크로 >  데미안 > 알폰스 > 베아트리체 > 피스토리우스 > 데미안&에바 부인  




2. 자유의지

"대체 어떻게 다른 사람이 네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게 만드는 거야?"

"아니야 그렇겐 못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 게 아니거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주의력과 의지를 특정한 곳에 쏟아부으면 원하는 것에 도달할 수 있어"

데미안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의지를 특정한 곳에 쏟아부으면 원하는 것에 도달할 수 있다니 모순이었다. 그래서 싱클레어가 질문한다. 앞뒤가 맞지 않다고.

그래서 데미안은 답한다.

"강력하게 원하고 이루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마음에 그 소원이 온전히 들어있어야 해"

" 나의 존재 자체가 그것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하는 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너의 내 면세 어부터 샘솟아 오르는 그 의지를 시도해 볼일만 남았어"

"네 의지는 마치 순한 말을 부리듯 이룰 수 있는 거지"

"내 의지는 기회가 오면 곧바로 그것을 잡아 준비가 되어있어"


싱클레어가 말하는 의지는 의식을 말하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데미안이 말하는 의지는 의식+무의식까지 도달한 의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내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처럼 말이다. 생각하는 의지, 감정의 의지가 아니라 본연에서부터 나오는 의지는 거의 무의식에 가깝고 본능적이며 그 사람의 개성, 그 사람 그 자체를 대변한 소원을 말한다. 그러면 무의식과 본연의 소원을 바탕으로 시도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의식을 무의식화 한 사람만이 그것을 거머쥘 수 있다.라는 말로도 해석되며 그러기 위해선 그것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하 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 자아, 자기까지 통합하는 것이다. 책 내용을 나누며 이야기가 나온 것인데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는 의지란 '진리'를 말하는 것 같다. 소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 그것이 종교가 가진 사람들의 무의식, 집단 무의식, 영혼을 자치하는 가장 큰 부분이라 말했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 높다는 것과 낮다는 것.

데미안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를 심리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고 그 의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데미안은 자신이 데미안 근처에 가고 싶다는 것을 알았고 앞자리에서 뒷자리, 뒷자리에서 옆자리로 옮겨갈 수 있었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은 자아도 없고 자기도 없는 상태이며 의식적 자기 탐색도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자유의지가 높다는 것은 자아와 자기가 통합으로 이루어지는 것. 생각과 마음이 합치는 것이랄까

자유의지가 낮다는 것은 자아에 머물러 있는 상태. 자유의지가 있지만 무의식의 자기실현 욕구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자유의지를 높게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세상을 만드는 사람, 뭔가를 주워 담고 바꾸는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어야 한다. 아무런 목적과 목표 없이 가질 수 있는 건 없다. 내가 만약 전시 준비를 하고 있는 목적을 가진 상태에서 전시회를 보러 다는 것과 그냥 정처 없이 유희 거리를 찾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보는 시선부터가 다르다. 마찬가지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데미안을 읽은 것과 아닌 것에도 차이가 클 것이다. 자유의지가 없는 사람이 데미안을 본다면 아무런 소득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자유의지를 활용해 데미안은 싱클레어 자리를 얻었다. 언제나 제안하고 시도하는 사람, 목적을 가진 사람이 그곳에 갈 수 있으며 그것은 자아와 자기가 통합될수록 더 강력해진다.


그래서 융은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라는 말을 남긴 것 같다.




3. 데미안의 이름

데미안의 이름은 Demon이 연상된다. 데미안은 악마로 묘사되기 까지 한다. 왜 데미안의 이름을 악마를 연상케 하는 demon과 유사하게 지었을까? 심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내 안에 있는 악마를 포용하는 의미일 것이며 종교적으로 보았을 때 Demon과 같은 사상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본다. 그렇다 해서 데미안이 사람을 헤치거나 죽이거나 방탕한 삶을 산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데미안을 착한 악마라고 정의 내리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쁜 천사들은 표면적인 규율과 전체주의(개인보다 전체의 존립이 훨씬 중요해!, 개인의 삶보다 교회의 건립이 중요해! 희생하거라, 너의 삶은 너의 것이 아니다. 창조주의 것이다.), 국가주의(국가를 위해 살아라)를 주장하는 반면 착한 악마는 전체론적()으로 악과 악, 선과 선의 전쟁 속에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을 만드려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데미안의 이름이 악마라고 했다 해서 악마의 생각이다. 교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비합리적이며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다. 선의 기준에 어긋나므로 다시 말해 악마다.

그의 생각이 악마라는 생각이 들며 무조건적으로 배척했다면 그것은 종교적으로 선과 악을 만드는 것이며 내면적으로도 내 안의 좋은 면과 나쁜 그림자가 통합되지 않는 모습을 그린다. 그래서 알에 갇힌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알을 깨부수고 나와 전체론적이며 동시에 범신론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하여 통합을 이루는 것이 책 데미안이다. 헤세가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싱클레어의 성장과정을 넘어 통합의 과정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데미안(Demon)을 받아들일 때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해 통합할 때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이름을 데미안으로 짓지 않았을까 내면이든 세상이든 그림자나 악마로 일컫는것을 균형있게 받아드릴때 바뀌니까



4. 낭만주의자들과 싱클레어를 가르는 그 무엇

오마르의 삶이라는 유튜버가 있다. 그 유튜버가 20대에 인생이 꼬이는 아주 흔한 케이스라는 영상을 올린 적이 있는데 지금 200만 뷰를 넘는다.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하자면 낭만주의자들이 이것저것 손대 보고 저것도 찾아보고 이것도 찾아본다. 자신의 꿈을 찾는다. 꿈이라는 감투에 숨어, 20대는 당연히 방황한다는 전제에 숨어서 그 과정을 허송세월로 보낸다. (해외에서 좋을지 몰라도 한국에선 이것이 통하진 않는다.) 20대 후반이 된다. 낭만주의자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 그러자 똑같은 패턴을 가지는데 남들이 다 하는 길로 간다는 것이다. 출발은 개성, 다양성을 중요시 여기다 막상 중요한 도착지점이 남들 다하는 길에 접어든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 되는 것들, 요즘 트렌드 한 돈벌이, 경제적 자유와 돈벌이들이 그런 것들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오마르의 삶에서 말한다. "이 헤매는 과정을 진지하게 임하지 않아서"라고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늦깎이 공시생, 공기업 준비생 만약 이들이 낭만주의자가 아니었더라면, 이 과정을 진지하게 임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힘든 길이라도 분명 자신의 꿈에 다가갔을 것이다. 그러나. 발만 담그거나 바람만 맞았지 몸에 스며들지 않았다. 거의 취미 정도로만 했지 전공급으로 파지 않았다. 이것을 싱클레어와 연결시켜보자. 그렇다면 낭만주의자들과 싱클레어를 가르는 그 무엇은 뭐랄 말일까? 그것은 '자기실현적 태도'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느끼는지 깊게 파지 않고 피상적으로 시간이 흐른다면 결국 남는 건 없다. 남은 생각은 남 탓, 사회 탓, 부정적 생각밖에 없으며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자기실현 적태도를 가지기 위해선 오마르에 삶에서 말했든 이 과정을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 오로지 낭만만 있고 즐거움만 있지 않다. 자신의 내면의 악마와도 마주해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찾을 거라면서 좋아하는 것만 바라봐선 안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자기실현적 태도다. 깊게 파야한다. 그리고 견고해져야 한다. 표면의 알을 부수고 내면의 단단함을 채워야 한다. 그러려면 물러 터진 태도는 금물이다. 낭만주의자가 될 것인가 싱클레어가 될 것인가? 둘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내면을 따라나섰지만 도착지는 달랐다.


이러한 상황은 더 커져나갈 것이다. SNS, 유튜브가 보급됨에 따라 자기실현적 태도는 올라가겠지만 그것에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그렇다. 그래서 수많은 정보를 유튜브를 통해 얻으려고 하지만 진짜 가치 있는 정보는 책이나 경험에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터넷에 쓸만한 정보는 없다고 한다. 방송 프로그램 책 읽어드립니다의 데미안을 들어봐야 결국 실제 데미안을 읽지 않으면 남는 게 적다. 오죽하면 책을 읽지 않는 전현무가 그토록 데미안을 읽지 않는 것에 대해 그토록 후회를 했단말인가. 짧은 요약본으로 반다는 것은 오히려 자위하기 좋다. '나는 책 한 권 읽은 느낌이야'라고. 양질의 콘텐츠가 많이 나올수록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요약본, 5분 정리 10분 정리가 나올수록 세상은 오피니언을 위해 돌아간다. 다시 말에 이 오피니언은 자유의지가 높은 사람들이다. 나르시시트들, 자기를 표출하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들 지금 글을 쓰는 나 조차도 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기실현적 태도를 진지하게 임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세상의 권력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타인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견고하고 깊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먹잇감이 되어 생각을 세뇌당하거나 그들은 증오하게 될 것이다. 세상엔 쓸데없는 정보와 가짜 뉴스가 너무 많다.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이었나?

핵심 키워드는 #견고함 #깊음 #자기실현적 태도


가장 큰 질문은 어떤 것이었나?

데미안을 읽으며 핵심적인 질문은 내가 부숴야 하는 알은 무엇인가? 이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마음의 선과 악을 통합할 것인가도 될 것이다. 나는 후자가 뭔가 본질에 더 가까운 질문이면서 어려운 질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끝으로

5년 전에 읽은 데미안은 이해할 수 없는 소설이자 만화책이었다. 그때 당시 읽은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성장하는 이야기네~ 결국 인생은 혼자야라는 단편적인 생각이 떠올랐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영화를 보고 풍부한 생각보다 존나 재밌었다. 그냥 존온나~ 재밌네! 다시 보고 싶네 로 평가를 끝내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지금에 들어서 더 많은걸 알아들은 것 같아 자만하는 것 같아 거북할지도 모르겠지만 모르는 것 또한 많다. 아직 부족하며 한 번밖에 읽지 못했다. 지금 읽은 데미안은 종교, 심리, 철학을 초월하는 고전으로 느껴진다. 그만큼 잡지식이 조금 늘었기에 그런 거 같다. 생각의 깊이가 깊어졌다 해서 깨달음의 깊이가 늘어난 건 아닐 수도 있다. 지식의 저주에 걸려 분석을 위한 분석을 할지도 모르고 문학을 즐기지 못하는 태도가 될지도 모른다. 이 부분을 항상 경계해야겠고 생각한다. 다음 목표가 있다면 융의 분석심리학과 진화심리학을 배운 다음 데미안을 읽어보아야겠다. 그렇다고 해서 헤르만 헤세의 철학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어쩌면 그것이 배운 것을 잊지 못해 피스토리우스처럼 다시 알에 갇히는 행위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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