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분 만에 긍정 끝내기
※주의※
브런치에서 보기 힘든 20분가량의 글입니다.
퇴근길, 출근길 버스 안이나 자기 전, 똥 쌀 때나 읽으시길 바랍니다. 최대한 진실만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오로지 긍정론과 자기 최면, 오로지 낙관론을 믿는 사람들도 있죠. 이 글은 쉽게 맹신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 아닙니다. 쉽게 맹신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분명 생산성도 높을 겁니다. 사람마다 긍정을 적용하는 법이 반드시 다릅니다. 반드시요. 저는 그중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이루는 긍정을 말하고자 합니다. 더불어 무언가를 열렬히 맹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입니다.
바쁘신 분들 위해 밑줄 쳐진 부분만 읽어도 충분히 문맥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찾아다닐 필요 없이 이걸로 끝냅시다.
나는 긍정을 좋아한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긍정이 마법의 특효약과 신비주의를 말하는 사람들 무한긍정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기꾼을 싫어할 뿐이다.
다들 이런 말 들어 봤을 겁니다.
이상 - 삶은 말 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현실 - 하지만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다.
현실 - 나는 시험에 떨어질 거라 믿었는데 붙었다.
현실 - 말하는 대로 시험에 정말 붙을 것처럼 하고 다녔는데 떨어졌다.
이상 - 괜찮아, 모든 일이 잘될 거야
현실 - 아무것도 잘 되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성인이 되고 난 뒤까지 나는 긍정이라는 단어를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저 좋게 생각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긍정이란 믿음의 뿌리는 나의 머릿속에 뿌리 박혔다. 그 말의 뜻, 오해조차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태 수많은 전문가들 그리고 주위 사람들까지 긍정적인 말의 의미는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자기계발서에는 더더욱 그랬다. 어쩌면 당연하고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알 필요 없었다고 생각한 걸 지도 모르겠다. '긍정'이라는 이 자그마한 단어가 사람의 인생의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도 모른 체. 긍정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안다고 해서 삶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긍정을 잘못 이해해서 삶이 불행한 사람들은 줄곳 봐왔다. 긍정적인 사람이 불행한 모순적인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참 이상하다.
긍정(肯定) 긍정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긍정은 객관+낙관이다. 논리학 사전에는 <그러하다고 생각하여 인정하는 일. 또는, 적극적으로 의의(意義)를 인정하는 일>이라 이야기한다. 어렵다. 무슨 말이냐면 논리학이 그렇듯 이성적인 학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객관적이여야한다 긍정이란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낙관적으로 보는 태도다. 객관적으로 인정한다는건 현실을 직시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긍정적이라 하면 마냥 좋은 방향, 좋은 생각이라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객관을 가진 체 낙관하는 것 일반적인 정의이고 나는 이것을 조금 다르게 정의했다. 사실 일반적인 정의만 알아도 엄청난 성과긴 하다.
1. 긍정심리학에서부터 삶까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참혹한 배경, 세상은 무너질 대로 무너졌고 사람들은 지쳐갔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을 시기였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참전 후유증도 많았다. 참담한 시대적 배경이었다. 심리학자들은 행복해지기 위한 심리학보다 불행을 막는 대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 속에 다리를 잃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행복한 삶을 제시하는 건 나와 그 사람을 동시에 죽이는 획기적인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1946년 퇴역군인 지원법이 제정되었다. 1947년 국립 정신 보건원이 창립되었다. 이에 따라 정신적 치료에 대한 지원이 대대적으로 시작된다. 행복이나 성장을 전달하지 못했다. 그건 금기였다. 불행을 걷어내는데 급급했던 심리학자들은 정신질환을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부정적인 면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셀 수 없이 많은 정신질환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어느 하나 정상적인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 정신질환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말처럼 말이다. 이렇듯 전쟁 이후 정신질환이라는 부정적 면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를 해결하다 보니 인간이 행복해지는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질환은 14가지였다. 그중 완치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이 작업은 무려 반세기 동안 이루어졌다. 그저 불행을 걷어내는 작업을 할 뿐이었다.
반세기가 지나자 심리학자들은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자신들이 심리학자가 아닌 병리학자가 되는 것을 느낀 것, 평범한 삶에 대한 망각, 인간의 병, 약점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물론 불행을 걷어내는 성과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심리학의 본질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21세기가 되자 인간의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을 추구하는 자세로 변했다. 행복을 위해선 정신질환의 부정적 면만 연구할게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같이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간의 부정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춘 반쪽짜리 심리학에서 변하기 시작했다. 긍정심리학은 그동안 어두운 면과 문제 해결에만 있는 반쪽짜리 심리학, 다시 말해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출발했다. 앞서 말한 그것이 심리학의 본질인 인간의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관점의 전환이 일어나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 마틴 셀리그만, 칙센트미하이의 긍정심리학(1999)은 희망을 안고 출발했다. 그리고 그 파장은 엄청났다. 생각의 전환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긍정의 창시자 중 하나이며 학습된 무기력의 연구자 마틴 셀리그만의 실험을 소개하겠다. 개를 대상으로 한 전기 충격 실험이다. 개에게 전기충격을 주고 높은 울타리를 만들었다. 보통이라면 전기충격을 맞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가겠지만 울타리가 높아 포기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러자 울타리가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개는 도망을 가지 않게 되었다. 말 그대로 학습된 무기력. 무기력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일화를 잘 안다. 자신보다 100배 넘게 뛸 줄 아는 벼룩을 작은 유리컵에 넣어 무기력을 학습시킨 것. 그리고 어릴 때부터 다리를 묶어놓은 체 길러진 코끼리가 있다. 그 코끼리는 성체가 되어서 자신의 다리에 묶인 밧줄을 충분히 끊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꼼짝 못 하게 된다. 이것이 무기력이 학습된다 하여 학습된 무기력이다. 기존의 심리학은 왜 학습된 무기력이 생길까? 에 초점을 맞췄다. 전쟁 후 질병을 치료하듯 말이다. 이건 개들의 2/3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1/3은 무기력을 학습하지 않고 도망쳤다. 여기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부정적인 면이 아닌 긍정적인 면을.
학습된 무기력이 왜 생기는 걸까? → 왜 학습된 무기력이 생기지 않는 걸까?(어떻게 극복했는가?)
이로서 긍정심리학의 목표는 세 가지였다. 덜 불행하게 만큼 더 행복하게 만들자, 환자들을 돌봤으니 평범한 사람도 돌보자, 약점에만 연구했으니 약점만큼 강점도 연구하자였다. 정리하면 이런 모습이 된다.
심리학자들 중에는 긍정심리학에 대해 마냥 '좋은 것만 바라보는 것'이라 설명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셀리그만은 크게 즐거운 삶, 좋은 삶, 의미 있는 삶을 강조했다. 이는 모두 경험하고 능동적이고 움직이는 삶이다. 긍정심리학의 출발점은 반쪽짜리 심리학의 문제를 삼고 출발했다. 심리학에서 인간의 어두운 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문제였다. 긍정심리학자들은 심리학으로 인간의 밝은 면을 통해 치료를 보여주려고 한다. 물론 그들이 부정에 대해서 배척하진 않는다. 다만 좋은 면에 대부분의 초점을 맞춘 나머지 부정적인 면은 다소 고려하지 않는 불균형의 모습을 보인다.
긍정심리학은 부정적인 면만을 고집하던 시기인 반쪽짜리 심리학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또다시 긍정에만 매몰된 반쪽짜리 심리학으로 전락해버린 비판을 낳았다. 성공한 사람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성공한 사람들을 아무리 평범한 사람에게 주입해도 달라지는 게 없듯 이로서 평범한 사람을 고려하겠다는 목표에도 어긋났다. 약점만큼 강점도 연구하자는 목표에도 어긋났다. 그들은 강점만 연구했다. 심리학자들은 긍정과 부정 모두를 이해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긍정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대중들이 전해 들은 지식은 긍정과 부정을 이해한 상태가 아닌 긍정만을 받아들이는 상태였을 것이다. 이것이 문제였다. 충분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대중은 균형을 컨트롤할 줄 몰랐다. 이래서 나는 비관적 긍정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들은 낙관적이 여야 하는 이유는 줄곳 말해주지만 비관적이 여야 하는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긍정에 다소 심취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긍정과 부정을 같이 아우르는 연구결과는 줄곧 무시당하곤 했다.
그렇다면 누가 긍정을 망쳤을까?
긍정을 망친 사람은 그렇다고 해서 심리학자들은 아닐 것이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부정적인 면도 고려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리고 그들은 객관성과 행동을 이야기했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칙센트미하이는 명확한 목표와 제대로 된 피드백으로 메타인지인 객관성을 높였다. 행동까지 하는 하도록 했으며 달리기를 중요시 여겼다. 마냥 이상적이진 않다. 정말 긍정을 망친 사람들은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고 글을 쓴 작가이며 인플루언서들, 사업가, 선동꾼들과 정치인이었으며 결정적으로는 종교인이다. 그리고 말하는 긍정이 만연 해지는 시기는 불황으로 힘든 시기였다. 그들은 불황속에서 긍정을 소비시켜 돈을 벌었다. 그들은 긍정을 세속화(건강, 성공학은 긍정에 있다) 시켰다. 불황속 사람들을 최면했다. 1%만이 아는 비밀, 시크릿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알겠다. 그럼 자세히 심리학자가 아닌 종교인들이 긍정을 어떻게 망쳤을까?
신사고 운동에서부터 시크릿에 이르기까지
긍정을 창시하고 동시에 망친 사람들
신사고는 인간의 문제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18세기 신비주의 신학자 스웨덴 보리의 뿌리에서 에서 출발한다. 모든 건 정신이 제일이라 믿는다. 모든 건 정신과 마음의 문제라 진단한다. 몸을 다스리는 건 마음이라 믿는다. 18세기 말 신사고 운동(The New Thought Movement)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꽃을 피게 된다. 긍정심리학보다 먼저 태어났으며 긍정심리학은 신사고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신사고 운동이란 신사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말한다. 생각의 힘이 물질에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으로 마음을 바꾸면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는 게 바로 신사고 운동이다.
신사고 운동의 핵심은 부정을 싫어하고 기피한다. 왜냐하면 나쁜 생각을 하면 그것을 끌어당긴다고 믿는다. 이것을 유인력의 법칙(끌어당김의 법칙)이라 한다. 부자가 된다는 상상을 하면 부자가 된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모든 건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이는 신사고 운동의 핵심원리다. 반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실패한다와 같다. 부정적이거나 나쁜 이야기를 하면 재수 없다며 말이 씨가 된다고 말하는 것 또한 신사고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마음을 통해서 몸을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 좋은 생각만이 성공을 부르고 질병을 고친다고 믿는다. 이는 점점 확장되어 믿음으로 병을 치료하는 크리스천 사이언스로 발전되었다.
신사고 운동은 1920년에 정점을 찍고 1930년에 대중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사람들을 낙관주의로 컨트롤해 나갔다. 때로는 사람들을 해고하고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며 강요하기까지 했다. 무한긍정으로 대중을 컨트롤하려 했다는 비판 여론도 존재한다. 의문을 품는 것을 금기시한다. 금기시는 아니더라도 굉장히 부정적 시선을 가진다. 의문을 품는다는 건 컨트롤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물리 세계를 바꾸기보다 뇌내 세계를 바꾸려는 운동이었다. 1970년에는 뉴에이지 사이언스와 결합된다. 뉴에이지는 1960년 환각제 전성시대인 히피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히피들은 환각을 통해 기이한 의식상태를 경험했다. 답을 알고 싶었던 그들은 동양으로 간다. 서구에서 볼 수없었던 명상, 요가, 초월명상과 같은 것들에 매료된다. 사이언스의 이름답게 과학을 끌어온다. 아직 증명조차 하기 힘든 양자물리학은 반드시 등장한다. 동양의 신비주의, 힌두고, 불교, 철학적 이상주의가 모두 융합한 마음 치유 운동과 같다.
21세기에 들어서자 시크릿에서는 극적인 효과를 보여 대중을 선동한다. 암이 나았다. 시력이 고쳐졌다고 말한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극의를 보여준다. 생각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정신력이 몸을 지배한다. 반드시 좋은 생각을 하라고 조언한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과학선생님이 시크릿이라는 다큐멘터리 DVD를 보여주셨다. 그로 매번 수업마다 명상을 10분하고 시작하는 괴이한 일을 겪기도 했다. 가끔은 1시간 동안 강제로 했다.
그들이 말하는 긍정은 긍정심리학이 아닌
순도 100% 종교철학이었다.
그들은 긍정을 외친다. 그런데 긍정이기보다 신앙에 가깝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성공한 사람들의 예시와 실제로 암을 치료하고 꿈을 이룬 일반인 있다. 그 사람은 아주 좋은 마케팅 대상자였다. 그들을 앞세워 긍정의 힘은 강하다고 목소리를 내게 했다. 그리고 강단에 내세웠다. 신기하게 표지부터 1%만 아는 비밀이라 마케팅한 시크릿. 실제로 시크릿을 통해 성공한 사람은 1%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실패했다. 영성적이고 무한 긍정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게 아니다. 대게 초두에 이야기했던 무언가를 진정으로 쉽게 믿는 열성적인 종교인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들에게 시크릿은 통할 것이다. 이들에게 비관적이란 것은 나쁜 것이다.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죄를 짓는 것처럼 불안해했다.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긍정의 배신 작가는 긍정에 대한 의문을 품고 어느 병원 커뮤니티에 병을 치료하는 것에 제대로 된 치료가 되는지에 대해 부정적인 글을 남겼다. 그곳에 달린 댓글은 "너의 그런 생각이 병을 키운다." "그런 생각으로 절대 병을 치료할 수 없다" "의심하지 마라"는 사람들의 댓글이 이어졌다. 그때 작가는 '이거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를 느껴 긍정의 배신을 쓰기 시작했다. 무한 긍정을 추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철학자들이 주었던 긍정의 위험성
긍정은 대부분 위기의 순간에 힘을 발휘했다. 긍정은 위기의 순간에 눈을 감게 만들고 미래를 상상할 뿐 대비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방법은 고사하고 눈을 감게 만들었다. 실패의 책임 또한 그건 긍정적이지 못해서야.라고 일단락 짓기까지에 이르렀다. 긍정으로 성공한 사람은 정말 극히 일부분이었다. 긍정으로 실패한 사람은 대다수였다. 그건 내가 믿지 못해서야. 나쁜 생각을 했기 때문이야. 나쁜 생각이 운을 나쁘게 해서야.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실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위기를 대처할 생각도 없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라고 강요할 뿐 그들은 생각을 통해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 약 1% 정도였다. 무한 긍정으로 성공한 1%가 다시 긍정을 믿으라고 순환하는 고리였다. 일반 대중들은 현실은 바꾸지 못한 체 썩어갈 뿐이었다.
된다 무조건 된다를 외쳤던 무한 긍정주의자들의 실체
위대한 사업가 무한 긍정의 아이콘 철강의 앤드류 카네기 → 정경유착, 매점매석, 폭력, 노조탄압
암을 이겨낸 무한 긍정 랜스 암스트롱 → 몇 년간 몰래 7회 금지약물 도핑
역경을 이겨낸 긍정의 아이콘 김새해 → 유튜브 내 돈 내산 뒷 광고
긍정이라 해서 윤리까지 따지자는 건 아니지만 그들 대게 사람을 속이는데 익숙하다. 긍정적인데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사람은 사랑하지만 수단과 도구로 이용한다.
왜 종교철학인지 앞서 말한 역사와
그들이 쓴 책을 보면 안다.
심리학자들이 말했던 긍정과 신사고 운동을 바탕으로 말한 긍정은 사뭇 다르다. 종교철학자들은 상상하면 이루어진다. 감사하면 이루어진다는 말들은 쉽다. 쉽고 희망적이다. 희망적이고 너무 편안하다. 만족스럽다. 생각만 해도 이루어진다니 얼마나 좋은가? 이것은 심적으로 힘든 대중들의 마음에 정확히 꽂혔다. 특히 한국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일회용 밴드였다. 썩어가는 현실과 부패하는 마음을 막는 일시적인 항생제였다.
긍정을 싫어하는 사람은 대부분 긍정심리학보다 종교철학을 싫어하는 것이다. 긍정을 좋아는 사람들 또한 대부분 종교철학을 좋아하는 것이다. 오해는 여기서 출발했다. 그래서 긍정심리학은 비교적 잘못이 없다 한 것이다.
사람들은 긍정을 욕하면서 긍정에 대해 알려하지 않는다. 또는 사람들은 긍정을 원하면서 긍정에 대해 알려하지 않는다. 지엽적이지만 무한 긍정의 덫과 해빙은 판매지수 1만 배나 차이가 난다. 희망을 원한다면 절망 또한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꿈꾸는 다락방, 해빙이 주는 긍정의 힘은 강하다. 난 이것을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긍정심리학에서 그렇듯 균형이 잡히지 않은 긍정은 위험하다. 당신이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반인이라면 긍정의 부정적인 면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긍정적일 수 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긍정은 다르다. 하지만 버려야 할 긍정은 같다. 마치 디자인에 정답은 없지만 오답이 존재하듯 그렇다. 그래서 버려야 할 긍정은 객관성을 잃어버린 긍정, 행동을 잃어버린 긍정, 부정(비관)을 잃어버린 긍정이다. 반대로 객관, 비관, 행동 셋이 있는 긍정이라면 어떠한 긍정을 해도 좋다. 그 어떤 긍정이라도 찬성이다. 다만 객관성을 확보하고 행동을 하면 된다. 하지만 이것을 하지 않아 사람들의 삶이 망가지기도 한다. 긍정적인 사람이 현실 속에 발을 딛고 있지 않으면 그 상태만으로 위험하다. 신기하게도 사람은 자신의 꿈이나 비전을 생각할 때 실제로 이루어진 듯한 느낌에 만족해버린다. 이것을 <무한 긍정의 덫>에서 심리적 성취라 한다.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더러 발생한다. 그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꿈을 성취했기에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주변에 감정적인 사람을 살펴보자. 영화를 보고 우는 사람들, 쉽게 감동받고 달라질 거라 외치는 사람들, 심금을 울리는 영상을 보고 이제 부모님께 잘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 유튜브 광고에 야 너도 할 수 있어, 누구나 가능하다는 말에 집중한 나머지 오케이! 나도 할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난 성공할 수 있어. 그러니 나중에 해야지. 나도 월 천만 원벌수 있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놀자. 대부분이 언제 그랬냐는듯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어제 있었던 일은 잊어버린다. 그 감정대로 만족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심리적 성취다. 하지만 현실에 부딪히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무나 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건 존재하기 어렵다. 용기를 주기엔 탁월하다.
긍정적인 삶에 객관성과 행동, 비관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그것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추상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은 체 끝난다. 이미 심적으로 포만감을 느껴버린 상태에서 더욱 만족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꽤나 단기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하다. 사람 여럿 망친 긍정은 감정적이다. 열정처럼 빨리 식는다. 긍정의 본질을 잊은 체 지속가능성이 없다. 현실에 안주하고 최면을 할 뿐이다. 무한긍정은 당신이 불면증 치료나 잠자기 전에 사용하는 게 나을 것이다. 만족하고 잠이라도 들어야 할 테니까
<무한 긍정의 덫> 작가 가브리엘 외팅겐의 실험
실제로 무한 긍정의 덫의 작가 가브리엘 외팅겐은 실험을 한다. 체중 조절 프로그램이었다. 25명의 비만 여성을 대상으로 했다. 프로그램 시작 전 감량 목표, 성공 가능성에 대한 기대치를 물었다. 그리고 열린 결말의 시나리오를 요청했다. 한 부류에는 감량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을 상상하도록 했다. 마치 꿈꾸는 다락방의 저자처럼 말이다.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만두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상황을 상상하게 했다. 실험 결과가 어땠을까? 놀랍게도 감량에 대해 긍정적으로 공상한 경우가 미래를 부정적으로 상상한 경우보다 11 킬로그램이나 덜 감량하는 일이 벌어졌다. 부정적인 상상을 한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다. 가브리엘 외팅겐은 이와 같은 실험에 놀랬다. 사실인지 아닌지 다른 수십 개의 실험을 통해 검증했다.
취업에 긍정적인 공상을 한 사람과 부정적인 이미지를 공상 사람으로 실험했다. 2년 뒤 실험 결과 긍정적 공상을 열심히 할수록 취업 성공률이 낮았다. 데이트도 같았다. 긍정적인 마음의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우울감을 낫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이었다. 한 순간이었다.
가브리엘 외팅겐은 대통령 취임 연설 속에서도 낙관주의를 발견했다. 취임연설이 긍정적일수록 임기 동안의 GDP는 낮았고 실업률이 높아졌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행동경제학에도 이야기하듯 사람은 이익을 좋아한다 하지만 손실은 더 싫어한다. 그래서 손실이 싫어 더 행동한다. 무언가를 잃기 싫어서 행동하고 움직인다. 그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 손실이라는 것은 긍정을 통해 나올 수 있는 생각은 아니다. 객관적이거나 비관적인 생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무한 긍정을 한다면 행동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비관적인 생각을 하자는 건 아니다. 긍정의 힘은 강하다 상상력의 힘도 강하다. 그것을 컨트롤하기 위해선 비관적인 상황과 객관적인 생각은 필수다. 방향은 긍정적이어야 한다. 긍정적 결과를 위해 최악을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심리적 대조라는 방법을 고안했다. WOOP(우프)라는 것으로 W(wish소원), O(Outcome결과) 장애물(Obstacle), 계획(Plan)의 약자다. 이로서 균형 있는 꿈 꾸기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원의 힘은 강하다. 하지만 손실의 힘도 강하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건 위험하다. 하지만 장애물을 비관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봄에 실제로 행동할 수 있다.
자주 버려야 할 긍정 - 객관성과 행동을 잃어버린 꿈 꾸는 낙관적 긍정
자주 가져야 할 긍정 - 객관성과 행동을 가진 지속하는 비관적 긍정
긍정이 필요한 시점은 실질적인 행동을 할 때다. 운동할 때를 생각해보자 그중 달리기 할 때를 생각해보자 특히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면 머릿속이 온통 복잡해진다. 군대를 다녀와본 남자라면 공감이 특히 갈 것이다. 괴롭다. 때려치우고 싶다. 그만하고 싶다 등등 이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자신과 타협하는 수십수만 가지 생각들이 교차된다. 긍정은 이때 힘을 발휘해야 한다. 왜일까? 꿈이라는 것은 계속 만져주어야 하고 동기 부여시켜주어야 한다. 꿈은 근육과 같고 마치 요리를 하는 반죽과 같다. 계속 주물러줄수록 맛있고 좋은 요리가 된다. 지속적으로 꿈을 상기시키고 목표를 상기시켜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기는 실질적인 행동을 할 때가 가장 많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금방 포기해버릴 것이다. 누군가 강제로 시키는 군대나 회사가 아닌 경우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직접 모든 것을 개척해나가야 하는 정글 위에 놓인 한 명의 타잔이라면 말이다.
직접 실험해봐라. 내가 달리기를 하는 시점에 나의 짱짱한 몸, 안 했을 때의 뚱뚱한 몸 그리고 목표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운동한 것과 시키지 않은 것의 차이를 하루만 실험해봐라 확연히 다를 것이다. 긍정은 이렇듯 실질적 행동을 할 때. 좀 더 자세히 말해서 실질적 행동 중 고난과 역경을 만났을 때 사용해야 한다. 그럴 때 빛을 발휘한다. 자기 전, 매일 아침도 좋다. 하지만 나지막한 오후 잠이 솔솔 오는 낮잠을 자야 하는 타이밍에는 좋지 않아 보인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지만 꿈의 힘은 강력해서 내가 비전을 생각하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마저도 그냥 그 상태로 만족해버린다. 꿈을 이룰 생각을 안 한다. 게으른 상태에서의 비전은 오히려 독이 된다. 하지만 성실하지만 불안정한 상태에서 비전은 약이 된다. 행동은 비관적 긍정에서 나온다.
긍정적인 마음이 사라졌을 때
본 게임이 시작된다
이때 비관과 객관이 작용한다.
현실을 지탱하는 것들이다.
나쁜 감정에 집중하는 사람들
자신도 모른 체 나쁜 감정에 집중하는 사람이 있다. 비관적 긍정은 나쁜 감정에 집중하는 게 아니다. 나쁜 상황이 나에게 어떤 손실을 줄지, 어떤 손해를 줄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나쁜 감정. 그다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집에서 혼자 지내다 보면, 관계가 단절되거나 실패를 맛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른 체 나쁜 감정에 몰두하게 된다. 자괴감과 싸운다. 열등감과 싸운다. 불안함과도 싸운다. 그냥 그곳에 계속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집중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는다. 왜 굳이 나쁜 감정에 집중해요?
힘들어서 나쁜 거에 집중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불행해서 나쁜 거에 집중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결국 나쁜 것에 집중하면 자신의 손해다. 그래서 돌아오는 대답은 “내가 왜 그랬지?”가 대부분이다. 또는 감정에 휩싸이는 게 대다수다. 이 세상 그 누구의 피해도 손해도 아닌 나에게 가장 큰 피해이며 손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해를 보면서 구렁텅이에 빠지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올라올 수만 있다면 우울감에 머무르는 것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긴 하다. 굳이 나쁜 감정에 집중하지 말자. 그것은 늪지대와 같아서 자신을 갉아먹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끝도 없는 생각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비관적 긍정은 것은 나쁜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나쁜 상황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내가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지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희망을 보는 비관적 현실주의자 = 다르게 말하면 비관적 긍정주의자.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연구가 있다. 당장 내일 죽을 수 있는 상황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오늘의 동료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사람은 누구엿을까? 이런 상황에서 "곧 나갈 수 있을 거야" "괜찮아 날 구해줄 거야"라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우린 못 나가 여기서 다 죽을 거야"라는 비관주의자도 아니었다. "여기서 나가는 건 쉽지 않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남아있다. 그때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들은 상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지만 현실을 직시했던 사람들 비관적 현실주의자였다.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라는 말에 쉽게 동조할 수 있는 세상이다. 작가 김영하는 비관적 현실주의의 태도를 가지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낙관론으로 넘쳐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늘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용소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건 낙관주의자 현실주의자도 아닌 죽음이 코앞까지 닥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면도를 했던 현실적 비관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참고 열정의 기름붓기, 김영하 <말하다>-
즉 다시 말해 비관적 긍정주의자다. 이 태도는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저 판매지수를 봐라. 사람들은 현실과 진실에 관심이 없다. 책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조차 해빙과 같은 무한긍정만 바랄 뿐이다. 물론 심리적 만족감은 느낄 것이다. 대신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진짜 현실을 바꾸는 비관적 긍정주의를 가져야 한다.
비관적 긍정주의와 비관적 현실주의는 크게 다를건 없다. 조금의 차이가 있다면 비관적 긍정주의는 희망의 힘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너무 현실적이진 않는다는 점이다. 때론 근자감으로 무장한체 행동해야할 때도있고 현실을 너무 현실처럼 바라보면 좌절할 때도 있다. 그럴땐 분명 바보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긍정적인 사람은 죽었다.
비관적인 사람은 죽었다.
비관적 현실적인 사람은 살았다.
전황을 바꾼 나치의 연설
처음으로 괴벨스는 낙관을 버리고 비관적인 상황을 인정했다. 만약 연설이 또 낙관주의를 이야기했다면 전황을 바꿀 수 있었을까? 답은 없지만 비관적 긍정(비관적 현실주의)이 대중을 움직였다. 그리고 전황을 바꿀 수 있었다. 나치를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처음으로 국가가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인정 것이었다"
"괴벨스가 처음으로 국민들에게 질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기는 방법은 모든 국민이 목숨을 바쳐 전쟁에 지원하는 것이라 했다. 이것이 비관적 긍정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본다. 이건 부정적으로 사용한 사례지만 괴벨스는 이로서 독일군의 사기를 끌어올려 전황을 바꾸었다. 그리고 수많은 선동가들이 괴벨스의 화법을 따라 하기도 했다.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느냐고 묻는 것을 질문을 바꾸어 세 번 묻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으로 되돌아보자.
긍정주의자 → 삶은 말 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 삶은 절대 말하는 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말로 꾸준히 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없다.
긍정주의자 → 괜찮아, 모든 일이 잘될 거야 무조건 될 거야 의심하지 마
→ 아니, 모든 것이 망할 수 도 있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공부하고 태연하게 대처할 거다.
긍정주의자 →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다.
→ 여기서 나가긴 쉽지 않다. 당장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끝으로.
부정적인 생각, 비관적 생각을 하는 건 죄가 아니다. 절대 나쁜 생각이 나쁜 결과를 불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무한 낙관주의가 당신의 몸을 비만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든다. 비관적 생각이 오히려 더 현실을 바꿔왔고 좀 더 나를 변화시켰다. 이는 현실주의적 생각 때문이다. 내 발은 언제나 현실의 땅을 딛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진짜 안 되겠다 싶어서 움직인 경험. 다들 있을 것이다.
에디슨이었는가 너무나도 일을 하기 싫을 때 실행한 습관이 있다. 내가 일을 안 하면 어떤 최악이 일이 생기는지 적었다. 그 최악의 상황이 나를 움직인 것이다. 나쁜 생각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오해는 제발 버리자. 생각의 방향이 긍정적이라면 괜찮다. 객관과 비관을 바탕으로 긍정을 살아가자. 그래야 행동하고 꿈을 이루는 종교철학자가 아닌 긍정주의자가 될 것이다.
그냥 긍정보다 비관적 긍정이 언제나 지속 가능한 큰 힘을 발휘했다.
현실을 비관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행동하게 만든다. 하지만 방향은 언제나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마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처럼, 다이어트에서 살을 뺐던 사람들처럼, 어떻게든 꿈을 이루는 사람들처럼, 매우 현실적이고 비관적이지만 꾸준히 제 갈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처럼.
참고 및 참조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1999) - 마틴 셀리그만
긍정의 재발견(The Hidden Power of Self-Deception)(2015) - 조셉 T. 핼리넌의 책
긍정의 배신(Bright-sided)(2010) - 바버라 에런라이크
무한 긍정의 덫(Rethinking Positive Thinking)(2015) - 가브리엘레 외팅겐
시크릿(Secret)(2006) - 론다 번
신종교와 신사고 운동의 상관 연동 연구(2014) - 김용환
말하다(2015) - 김영하
신사고에 점령당한 한국교회(2016) - 이병길
꿈꾸는 다락방(2017) - 이지성
전황을 바꾼'총력전 연설'(2020) - 내셔널지오그래픽
쓸데없는 글.
21세기에 들어섬에 따라 정보는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떠한 주장도 근거를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정말 못생긴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번다와 같은 터무니없어 보이는 주장이 있다.(정말 생각 없이 예시를 적어봤는데 실제로 연구결과가 있더라) 실험 결과 실제로 그러한다고 한다. 미국의 매사추세츠대학이 그것을 증명해냈다더라. 그리고 정말로 그러한가? 파고파다 보면 심리학적 근거나 여러수십 가지 근거를 덧붙이다 보면 마치 맞는 말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인간은 확증편향으로 믿고 싶은 것만 믿으니까 정보 또한 확증된 것을 잘 찾는다.
만약 그것이 아무리 신비주의적이더라도 과학적 근거든 역사적 근거든 실증적 실험이든 그 근거는 21세기에 들어 도서관이나 리서치를 한다면 어떻게든 제시할 수 있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긍정을 믿든 부정을 믿든 무엇을 믿고 말고는 반드시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만약 나의 가치관에 어긋난다면 과감히 무시해도 된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대조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