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68 < 다가오는 말들 >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
- 니체
인권강의에서 만난 한 청소년은 이런 말을 건넸다. "누가 작가님에게 여성이 글도 쓰고 대단하다고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강의 중에 나는 청소년들을 직접 만난 경험을 얘기하면서 요즘 친구들 정말 생각이 깊고 훌륭하더라고 말했는데, 그 내용을 문제 삼았다. 듣고 보니 그랬다. 그건 청소년을 자기 생각과 의견을 가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기보다 훈육의 대상으로 낮추어보는 시선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기성세대의 말이었다. 그날 이후 내 책상 위에는 미학자 양효실의 말이 붙어 있다. "단언컨대 아이들은 미숙한 게 아니라 예민할 뿐이고, 어른들의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외국인일 뿐이다."
- p7
아름답거나 아릿하거나, 날카롭거나 뭉근하거나.
타인의 말은 나를 찌르고 흔든다.
사고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몸에 자리 잡고 나가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숙성되고 연결되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나도 20~30대엔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다. 표류보다 안착을 원했다. ...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건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뜻이겠구나.
이제 나는 확신에 찬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목표다. 확실함으로 자기 안에 갇히고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싶다. 40대 후반이면 그걸 두려워해야 할 나이다. '글쓰기는 이런 거야' '사는 건 원래 그래'라고 의심하기보다 주장하는 사람이 된다는 건 서글프다.
- p19
그래 놓고 여전히 생일날 온전한 식사를 위한 외출권과 효행 미역국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는 심정으로 살았으리라.
이러한 내 부산스러운 행동과 생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낳을 자유'다.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는 아이들의 평등을 지켜주는 공적 자원"과 "아이를 낳지 않고 싶은 여성이 비난받지 않을 자유"가 확보된 상태. 특정 상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헌신하지 않는 관계 맺기가 가능하도록 가족제도가 개선될 때까지, 나는 무한한 모성을 강요하는 세상의 모든 면접관들에게 말씀드릴 작정이다. 엄마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 p57
일전에 어느 강연에서 한 여성이 물었다. 내가 '엄마'에 관한 글을 많이 썼는데 혹시 엄마로서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해달라는 거다. 애들이 커가는데 워킹맘으로서 고민이 크다고 했다. ...
얼마나 멋진 문제 설정인가. 엄마로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정리한다는 건. 이 세상에는 온통 '이렇게 키워라, 저렇게 해줘라' '좋은 엄마라면 명심하라'라는 소위 전문가의 목소리가 공기처럼 떠다니는데, 그것은 개개인의 구체적인 처지를 감안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육아 지침은 그 자체로는 온당한 말이지만, 엄마가 왜 아이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는지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인 지침이다.
- p76
뮤지션의 사회적 구실을 생각한다. 학생은 공부만 하라는 말처럼 뮤지션은 음악만 하라는 요구는 꽤나 정치적이다. 예술과 정치, 아이와 어른, 공과 사, 무대와 일상 등을 나누는 분리 기획은 권력자에게 유리하고 약자들이 고립된다는 면에서 위험하다. 직업, 나이, 성별에 무관하게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목소리를 낸다면 세상이 좀 더 좋아지리라는 믿음이 내겐 있다.
- p155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 말 뒤에는 으레 '어차피 후회할 거면 결혼하는 게 낫다'는 말이 덧붙여진다. 여기엔 함정이 있다. 결혼은 누구의 좋음이고 누구의 후회인가, 주체가 생략됐다. 결혼생활로 덕을 보는 사람이 지어내고 결혼제도의 유지를 바라는 이들을 중심으로 확산됐으리라 짐작한다. 저 '말씀'이 효력을 잃어간다. 결혼해서 후회한 사람들, 아마도 여성들이 작성한 후회의 목록이 널리 공유되며 생긴 변화 같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결혼을 이렇게 정리했다. '현대 여성은 결혼하거나 결혼했거나 결혼할 예정이거나 결혼하지 않아서 고통받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여성의 입장을 반영한 정확한 현실 진단이다. 후회할 게 빤하면 안 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상식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 p230
평범함이 행복이고 평범하지 않음이 불행이 아니라,
평범의 기준이 나에게 있으면 행복하고
남에게 있으면 불행한 것 같다.
에리히 프롬은 <사람의 기술>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원칙과 사랑의 원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의 급류에서 부서진 삶을 복구하는 사람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사랑의 원리를 깨우쳤다. "삶은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은 무시되고, 개개인은 고립된 채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두"도록 세상이 우리를 길들이고 있기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에 무모하게 시간을 보낸 것들만 남아 있다. 무던한 사람, 철 지난 노래, 변치 않는 신념, 짠 눈물 같은 것들.
- p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