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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Designeer Feb 19. 2020

누구 중심의 시대에 갇혀 살아가는가

독서노트 #68 < 다가오는 말들 >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
- 니체


이 책 <다가오는 말들>을 쓴 은유 저자는 누구나 살아온 경험으로 자기 글을 쓸 수 있을 때 세상이 나아진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자, 시민단체 활동가 등과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 내는 일을 돕는다고 한다. 펴낸 책이 다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책 <다가오는 말들>은 '편견 많은 사람'이라도 자칭하는 은유 저자 본인이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에게 공감하려 애쓰는 모습을 담았다고 한다. 저자의 자기 성찰을 통해 타인의 세계를 접하며 자기 세계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이 책은 그동안 만났던 그 어느 책보다 감성적으로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한 장 읽고 내 경험을 돌이켜보고, 한 장 읽고 한참 사색에 빠지길 반복하다 보니 진도가 쉽게 안 나가는 책이었다.



인권강의에서 만난 한 청소년은 이런 말을 건넸다. "누가 작가님에게 여성이 글도 쓰고 대단하다고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강의 중에 나는 청소년들을 직접 만난 경험을 얘기하면서 요즘 친구들 정말 생각이 깊고 훌륭하더라고 말했는데, 그 내용을 문제 삼았다. 듣고 보니 그랬다. 그건 청소년을 자기 생각과 의견을 가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기보다 훈육의 대상으로 낮추어보는 시선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기성세대의 말이었다. 그날 이후 내 책상 위에는 미학자 양효실의 말이 붙어 있다. "단언컨대 아이들은 미숙한 게 아니라 예민할 뿐이고, 어른들의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외국인일 뿐이다."

- p7

책의 가장 초반부를 읽으면서도 쉽게 책의 진도를 뺄 수가 없었다. 자꾸만 나의 삶에, 나의 과거에, 나의 생각에 책 내용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청소년을 통해 돌아보듯, 나 역시 어린 아이나 청소년, 더 나아가 대학생과 사회초년생들까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더 성숙해야만 하는 존재로 생각해온 것은 아닌지 깊이 돌아보게 되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나를 보면서도 똑같이 훈육의 대상으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삶의 경험치가 넓고, 많고, 깊고, 높게 쌓이는 과정 속에서 더 많은 지혜를 얻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모두 존경할만한 인격을 갖춘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이가 어릴수록 단지 아직 더 넓은 지평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낮추어보거나 반드시 훈육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 역시 편견일 것이다. '여자인데 OO도 해서 대단하다'라는 편견 가득한 전제 속에서 살아왔던 나 역시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이 같은 사고의 패턴이 자동 적립되었는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아름답거나 아릿하거나, 날카롭거나 뭉근하거나.
 타인의 말은 나를 찌르고 흔든다.
 사고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몸에 자리 잡고 나가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숙성되고 연결되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은유 작가의 어휘와 표현은 사뭇,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 마력이 있다.

글자 하나하나를 읽고 또 읽고,

음미하고, 생각하고,

그 뜻이 맞는지 다시 읽어보게 만드는,

그 무엇.

자신만의 '정제된 언어'랄까.

겸손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나도 20~30대엔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다. 표류보다 안착을 원했다. ...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건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뜻이겠구나.
이제 나는 확신에 찬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목표다. 확실함으로 자기 안에 갇히고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싶다. 40대 후반이면 그걸 두려워해야 할 나이다. '글쓰기는 이런 거야' '사는 건 원래 그래'라고 의심하기보다 주장하는 사람이 된다는 건 서글프다.

- p19

확실함을 동경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불확실함 속에 늘 표류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생의 경험치와 능력치가 올라간 40대 이후가 되면 자신만의 인생철학이 생기기도 하고, 어느 분야에 확실히 쌓인 인지도와 능력을 인정받아 자신만의 인생 노하우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그것을 인지하고 조심하려고 하는 저자의 인품에 역시 또 한 번 놀랐다. 자신의 생각으로만 확신에 차서 주장하는 사람이 일명 '꼰대'로 불려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사실 40대까지 갈 필요도 없이, 10대, 20대 역시 자기 자신만의 삶의 법칙이 있고, 이것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인생관이 자신도 모르게 자리 잡아가기도 한다. 그것이 어느 특정한 나이가 지나 자신만이 옳다라는 표현의 '꼰대'라는 말로 분류될 뿐 20대에도 '꼰대'와 같은 마인드를 가진 경우를 종종 보았다. 어쩌면 나이와 상관없이 불확실함과 어정쩡함이 결국 우리 삶의 본질과 닿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놓고 여전히 생일날 온전한 식사를 위한 외출권과 효행 미역국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는 심정으로 살았으리라.
이러한 내 부산스러운 행동과 생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낳을 자유'다.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는 아이들의 평등을 지켜주는 공적 자원"과 "아이를 낳지 않고 싶은 여성이 비난받지 않을 자유"가 확보된 상태. 특정 상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헌신하지 않는 관계 맺기가 가능하도록 가족제도가 개선될 때까지, 나는 무한한 모성을 강요하는 세상의 모든 면접관들에게 말씀드릴 작정이다. 엄마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 p57

밑줄을 박박 그은 부분이다. 생일에 가족과 함께 해야 한다는 거의 불변의 법칙과도 같은 상식을 깨버린 부분이다. 은유 저자는 자신의 생일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외출권을 행사한다! 머리가 멍했다. 이 얼마나 신박한 일인가. 나는 왜 그토록 단 한 번도 이러한 관습적인 문화에서 빠져나와도 된다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는가. 그럼 다가오는 내 생일에 나는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을 쭉 읽다 보니, 내가 생각만 했지, 사회적 비난을 받을까봐 두려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들을 매우 세련된 언어로 저자가 마음껏 표출해주고 있음을 느꼈다. '낳을 자유', 그렇다. 여자로 살아가면, 가족의 굴레 즉 시가로부터, 혹은 사회적 굴레 즉 회사로부터 자녀 계획에 대한 답변을 강요받기 쉽다. 낳을 자유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낳을 자유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내가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전에 어느 강연에서 한 여성이 물었다. 내가 '엄마'에 관한 글을 많이 썼는데 혹시 엄마로서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해달라는 거다. 애들이 커가는데 워킹맘으로서 고민이 크다고 했다. ...
얼마나 멋진 문제 설정인가. 엄마로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정리한다는 건. 이 세상에는 온통 '이렇게 키워라, 저렇게 해줘라' '좋은 엄마라면 명심하라'라는 소위 전문가의 목소리가 공기처럼 떠다니는데, 그것은 개개인의 구체적인 처지를 감안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육아 지침은 그 자체로는 온당한 말이지만, 엄마가 왜 아이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는지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인 지침이다.

- p76

다양한 육아 서적을 통해 나름 엄마로서 잘하려 애쓰는 나를 보며, 이 부분 역시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음을 알았다. 아이에게 화를 내는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부모 스스로가 더 많이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화는 결국 아이의 잘못이 아닌, 부모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 실패로 인한 결과이며, 그만큼 바쁜 삶 속에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그런데 나는 저자의 글을 통해 내가 남들과 똑같이 결국 '개인'만 혼자 변화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다는 사실 깨달았다. 저자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말하는 부분이 바로, 어떤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사회적 문화'가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적 문화와 통념을 쉽게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내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그 높은 장벽을 허물지 못할 게 뻔하니 그냥 있는 위치에서 나 스스로만이라도 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변혁을 일으킨 사례들을 보면 결국 목소리를 밖으로 낸 사람들이었다사실이 떠오르니, 나의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었던 사고방식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뮤지션의 사회적 구실을 생각한다. 학생은 공부만 하라는 말처럼 뮤지션은 음악만 하라는 요구는 꽤나 정치적이다. 예술과 정치, 아이와 어른, 공과 사, 무대와 일상 등을 나누는 분리 기획은 권력자에게 유리하고 약자들이 고립된다는 면에서 위험하다. 직업, 나이, 성별에 무관하게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목소리를 낸다면 세상이 좀 더 좋아지리라는 믿음이 내겐 있다.

- p155

현명한 사람들의 생각을 책으로 접하기 전, 그리고 내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름의 생각을 확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타인의 말을 너무 쉽게 필터 없이 수용했던 것 같다. '학생은 공부만 잘하면 된다'라는 말, '가수가 노래만 잘하면 되지'라는 말, '공과 사가 명확해야 해'라는 말, '어른은 어른스러워야 해'라는 말 등.

학생 때는 정말 공부만 잘하면 되는 줄 알고, 공부만 했더니 사회를 모르는 바보가 되어 더 큰 자괴감이 들었다.

노래 잘하는 가수를 더 높이 평가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단순히 노래 스킬만 가지고 좋은 가수라고 평할 수 없다는 것을 후에 느꼈다.

공과 사가 명확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봤는데, 공 속에 사가 항상 있고, 사 속에 공이 침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몸으로 부딪치며 깨닫고, 공사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에서 현명한 태도를 갖추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른은 모두 어른스러운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어 보니 어른이 되는 시점이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나의 아이 같은 면을 발견하며 혼란스러웠다.


특정 산업군에 오래 있거나, 애초에 전문가로서의 직업을 유지하는 경우 등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다 보면 오히려 다른 분야에 대해 더 모르게 되거나 관심조차 갖기 어려워진다. 관심을 가졌을 때는 너무 늦은 것 같고, 항상 새롭게 배워야 하는 변화가 빠른 현시대의 흐름에 당황하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직업에 대해, 어떤 자리에 대해 틀에 갇히도록 분리해버리는 말과 행동, 그러한 문화는 '가진 자'들이 의도했든 안 했든 상관없이,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이용해왔다는 것을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분리를 강요받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 통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정말 중요한  아닐까.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 말 뒤에는 으레 '어차피 후회할 거면 결혼하는 게 낫다'는 말이 덧붙여진다. 여기엔 함정이 있다. 결혼은 누구의 좋음이고 누구의 후회인가, 주체가 생략됐다. 결혼생활로 덕을 보는 사람이 지어내고 결혼제도의 유지를 바라는 이들을 중심으로 확산됐으리라 짐작한다. 저 '말씀'이 효력을 잃어간다. 결혼해서 후회한 사람들, 아마도 여성들이 작성한 후회의 목록이 널리 공유되며 생긴 변화 같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결혼을 이렇게 정리했다. '현대 여성은 결혼하거나 결혼했거나 결혼할 예정이거나 결혼하지 않아서 고통받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여성의 입장을 반영한 정확한 현실 진단이다. 후회할 게 빤하면 안 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상식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 p230

후회할게 빤하면 안 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상식을 나는 실제로 후회해 본 다음에서야 알게 되었다. 가끔 대학 후배들이 묻는다. 결혼은 언제 해야 하는 건지, 어떤 사람이랑 해야 하는 건지, 하면 뭐가 좋은지 등.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가장 처음으로 이렇게 묻는다. '왜 결혼이 하고 싶냐고' 말이다. 즉, 결혼할 마음이 확실히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이게 정확하지 않다면, 첫째로 결혼하지 않을 것을 권한다. 그다음 결혼을 확실히 원한다는 전제가 성립되면 그들 상황과 생각에 따라 현실적인 조언을 제각각 해주기도 한다.

재미있는 건 나에게 질문해오는 후배나 동기가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그 반응이 매우 달라, 나 역시 답변의 적당한 위치를 찾아가는 을 많이 배웠다는 것이다.


평범함이 행복이고 평범하지 않음이 불행이 아니라,
 평범의 기준이 나에게 있으면 행복하고
 남에게 있으면 불행한 것 같다.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어느 정도는 공감하지 않기도 하는 부분이었다.

평범의 기준이 나에게 있으면 행복하다는 것은 단연 말할 것도 없이 공감한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다. 평균치, 평범함, 보통의 것이라는 말들은 모두 전체라는 모수를 평균화시켜버린 어떤 결과값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평균이나 평범으로 치부되는 삶을 온전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모든 인생은 평범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범함을 어떻게 인정하고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부터 약간은 의구심이 들어서, 이 부분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평범함과 평범하지 않음을 떠나서,

인생은 정답 찾기 게임이 아니니,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세워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이 가장 의미있지 않을까.



에리히 프롬은 <사람의 기술>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원칙과 사랑의 원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의 급류에서 부서진 삶을 복구하는 사람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사랑의 원리를 깨우쳤다. "삶은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은 무시되고, 개개인은 고립된 채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두"도록 세상이 우리를 길들이고 있기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에 무모하게 시간을 보낸 것들만 남아 있다. 무던한 사람, 철 지난 노래, 변치 않는 신념, 짠 눈물 같은 것들.

- p342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원칙과 사랑의 원칙이 양립할 수 없음을 요즘 들어 더 많이 느끼는 것 같다. 이 양립하기 어려운 원칙 사이에 나는 어디쯤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로 이동해야 할지, 얼마만큼 옮겨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서 있어야 하는 건지...




이 책은 엄청 두꺼운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들어서 완독 하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페미니즘의 성향이 강한 저자의 발언들을, 과연 많은 남자 독자들이 읽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할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겠지만, 남자이기 때문에 들 수 있는 생각을 접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만의 삶의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나와 다름을 배척하는 '나' 중심 세계에 너무 익숙해져 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나보다 더 사회적 약자로서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타인의 고민과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니, 세상을 보는 시각이 아주 조금은 더 넓어지는 것 같다.

자신만의 생각과 철학을 분명하지만 비꼬지 않는 언어적 표현으로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 기회였다. 이 책은 어떤 방식으로든 분명 개인의 삶에, 특히 쉽게 자극하기 어려운 감성적 영역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책 제목 : 다가오는 말들

* 저자 : 은유

* 출판사 : 어크로스

* 출간일 : 2019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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