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연재]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2020년 10월호 - 인생단상 #5
얼마 전 저는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림은 고등학교 미술 시간 이후로 본격적으로 그려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공대를 졸업하고 엔지니어의 삶을 살았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하는 일을 해온 저는 직접적인 ‘그림’과의 인연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나름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누구보다 똑같이 그려내는 일에 자신 있었고, 각종 그림과 관련된 상을 자주 받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창의성을 강요하는 현실에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친한 친구가 예술중학교로 일찌감치 진로를 정한 반면, 저는 가장 좋아했던 과목인 수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을 택했더랬죠. 중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이 당시 미술교사였는데, 예술고등학교로의 진로를 권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저는 일반적인 진로를 택했습니다. 이미 예중으로 진학한 많은 학생들과 실력이 벌어졌을 것이고, 예고에 진학해야 할 이유가 저에겐 없었기 때문이었죠.
10대 이후로 제대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던 저는 15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야 펜을 다시 잡아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모방이라는 기술이 창의성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빨리 단정 짓고 가능성을 스스로 짓밟고, 더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한 어리석음에 대해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모방 능력을 아무나 보유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고,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것도 그때는 몰랐습니다.
<아웃라이어> 책에 1만 시간의 법칙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책을 통해 제가 깨달은 말콤 글래드웰의 주장은 단순히 시간을 많이 채운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스템과 환경에 의해 우연히 누군가에겐 1만 시간에 좀 더 일찍 다가가게 도와주는 것이 현실이며, 그런 기회가 찾아왔을 때 기회를 잡을 힘과 마음자세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뒤늦게 펜을 잡고 하루에 몇 시간씩 몰입하던 와중에 이 책은 정말 저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갖고 있던 재능을 좀 더 일찍 개발했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과 ‘내게는 주어지지 않은 기회와 환경’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 하나의 재능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동안의 시간과 노력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과거에 인정받고 빛나던 재능은 대부분 애매한 재능으로 몰락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예술을 하면 배고프다는 인식과 능력 대비 형편없는 사회적 처우 때문에 예술 관련 전공자들이 진로를 바꾸기도 합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전공 불문, 이유 불문하고 그간의 노력과 성과를 뒤로 한 채, 진로를 바꾸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뒤늦게라도 자신의 적성을 찾거나 정말 하고 싶은 분야를 알게 되어 도전하게 된다면, 축하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알지 못한 채, 당장 해야 하는 일과 돈이 되는 일로 향하곤 합니다.
현실은 너무도 쉽게 재능의 싹을 싹둑 잘라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반대로 나보다 못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찍 포기해 버립니다.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라는 착각으로,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로 스펙 쌓기에 열중하는 기계로 전락해 버립니다. 개인의 무지로 인해 가능성을 스스로 제거해 버리기도 하고, 관심사가 분산되어 재능을 집중적으로 계발시키지 못하기도 합니다.
10대에 자신의 재능과 적성을 찾아 길러낼 수 있도록 하는 교육 방식이 아닌, 정해진 커리큘럼대로 성적순으로 개인을 평가해 버리는 우리의 문화가 개개인의 재능을 모두 묵살해 버린 것은 아닐까 싶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재능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제때 그 능력을 개발하지 못하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김연아, 손흥민 선수처럼 독보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유명해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재능을 방치하지 않는다면 삶을 좀 더 의미 있게 만드는 데 활용할 수 있습니다. 선천적인 재능이 없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꾸준한 노력으로 탁월함을 얻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수많은 책을 통해서도 알려져 있지요. 저 또한 그 부분에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꼭 1등을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의 기준이 자신에게 있다면, 재미와 흥미 목적으로 충분히 재능을 활용하여 삶을 충만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나이에 상관없이 재능은 언제든 개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다시 시작한 그림이지만, 저는 언젠가는 이 재능을 살려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혹은 자식과 그다음 세대를 위해 개인의 재능을 찾고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의 삶에 분명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도 저만의 특별한 재능을 가꾸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