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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Designeer Nov 26. 2019

아버지 세대와 다른 우리 세대의 '일'

독서노트 #6 <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

'잉여짓'은 왜 일이 아니란 말인가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 이 책은 내가 꽤 괜찮았던 두 번째 회사를 그만둔 직후 혼자 휴식을 떠나 읽었던 책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느 책보다도 가슴 깊숙이 공감했던 유일한 책이다. 저자는 일을 그만둔 후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구구절절 저자가 하는 일을 설명하기 뭣할 때, 즉 상대가 '진짜 대답'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을 때 세상의 프레임에 따라 대답하는 것을 그리 꺼리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따라 다시 읽어보니 유독 이 구절이 눈에 밟힌다. 자신의 이직을 자랑하고 싶어 내게 안부를 묻는 척 연락해 온 이전 회사 선배의 전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아마도 읽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놀이처럼 즐길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더 이상 현재를 희생하며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이 무익하듯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는 조언도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 일자리를 구할 때가 돼서야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면 그 좋아하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좋아함'을 강요받는 것이다.
- p42

  너무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었다. 최근 너도 나도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스물몇 살 까지도 계속 '해야 하는 일'만 배워온 우리에게 이것만큼 무책임하고 잔인한 말이 어디 있으랴. '난 좋아하는 게 없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바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은 복 받은 것이다.



그때는 내가 옳은 이야기를 하니, 상대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것이라 믿었지만 직장 생활을 몇 년 더 하다 보니 깨닫게 되었다. 옳은 이야기에 옳은 논리라고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당해줄 마음이 있는 사람만 설득할 수 있는 법이다.
- p70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경우를 자주 본다. 돌이켜보면, 나도 같은 경험을 했다. 사회 초년생 때, 나의 옳고 그름으로 승부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 설득할 수 없는 상대라면, 어떠한 이성으로도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중에는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일을 위해 이런저런 가면을 쓴다. 상황에 맞춰, 사람에 맞춰 상냥해져야 하고, 화난 연기를 해야 하고, 쑥스러움을 숨긴 채 느물느물 굴어야 한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비애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무엇이 진짜 나의 얼굴인지, 온전한 나인지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 가면들이 결국은 모두 나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중에 진짜인 것과 가짜인 것은 없다. 사실 모든 인간에게 여러 역할이 있는 만큼 얼굴도 여러 개가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역할과 상황에 따라 적절한 얼굴을 꺼내 보이는 것이 어른스러운 일이다. "나는 원래 이래" 또는 "나는 솔직한 사람이야" 같은 말로 자기의 '진짜' 얼굴만을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일이 아닐까.
- p75

  가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데, 환경이 나를 이렇게 추하게 만든 거야.'라는 생각을 예전에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방어기제에서 비롯한 나의 자기 합리화에 불과했던 것이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추한 모습도 '나'인 것이고, 지금 이대로의 현재 모습도 '나'인 것이다. '나'를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가면과 그 뒤의 진짜 얼굴이라는 이분법은 오히려 일에서 상처 받지 않으려는 하나의 방어기제다. 보여야 했던 얼굴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위에서 시켜서' 혹은 '먹고살아야 하니까' 같은 말 뒤에 숨는 것이 차라리 안전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식의 자기연민은 현실에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쓸 수 있는 가면이었다면 아무리 불편했다 해도 내 얼굴 중 하나였던 셈이다.  그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거듭되다 보면 언젠가는 불편함이 사라지거나 도저히 더 이상은 그 얼굴을 보일 수 없거나, 둘 중 하나에 이르게 된다. 그 지점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나 감당할 수 있는지가 정확히 드러난다. 불편함을 극복할 수 있다면 한때 불편했을지언정 그 일이 주는 반대급부를 향한 욕망이 더 컸던 것이다. 결국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면 그와는 다른 얼굴로 살고 싶은 마음이 그 일자리가 주는 안온함보다 큰 것이다. 계속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반대급부를 향한 자신의 욕망을 흔쾌히 인정하는 편이 낫다. 참을 수 없다면 스스로 원하는 얼굴을 보이면서 일할 수 있는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설사 버려야 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 p77

  나는 안타깝게도(?) 불편함을 극복해 본 적이 없다. 그 반대급부를 향한 욕망이 결코 더 크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극한의 상황까지 가게 되면 결국 참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되려 참을성이 그렇게도 없는 것인가 나를 질책해보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토록 '끈기'와 '인내'만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사회에서 이토록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 내가 정말 유리멘탈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의 글귀를 읽으며 많은 위로가 되었다. 내가 그렇게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거나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은 아니라고 다독여 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정체성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이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을 둘러싼 한 가지 괴로움이 여기서 생겨난다. 세상은 내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를 준거로 나를 바라보는데, 나는 그 일로 나를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것.
- p157

  어느 커뮤니티에 가도, 자신을 소개하라고 하면 자신은 어느 회사에 어떤 업무를 담당하는 아무개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유치원에 갈 때부터 소속감을 중요시 해왔기 때문일까.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 누구누구. 학생과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을 빼면? 계급장 다 떼어 내면 무엇이 남을까?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것. 설명해봤자 설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겠지. 앞서 나온 '설득당해줄 마음이 있는 사람만 설득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 듯싶다.



일이 없음에도,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장소에 내 몸을 가져다 둬야 한다는 사실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일의 대가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시간을 판 대가, 즉 내 자유의 일정 부분을 포기한 대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 둘은 스스로 내 일상을 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다. 내 자유에 아무리 비싼 값이 매겨진다 해도 그걸 팔아서 살고 있다는 실감은 뼈아팠다.
- p168

  아마도 1인 기업가 또는 프리랜서로 뛰어들거나 개인이 자신만의 사업을 창업하는 경우, 이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현재를 견딤으로써 미래에 더 큰 과실을 누리라는 교훈은 안정적 토대 위에서만 빛을 발한다. 오늘의 만족을 뒤로 미루는 것은 언젠가 더 큰 대가로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을 수 없는데도 현재를 희생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내가 놓인 환경의 어떤 측면도 견실히 지속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시대, 오늘을 견디라고 부르짖는 노동 윤리는 결국 당신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지연된 만족에 이자를 붙여 돌려줄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 p180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길게 배웠지만 유일하게 부모 세대보다 더 못 살게 된 유일한 세대가 밀레니얼 세대라고 하지 않은가.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이 판국에 오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았다.



세넷은 자율이 "타인에 대해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불투명한 평등"이라고 말한다. 상대의 다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름을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해할 수 있어야 받아들이는 관계는 평등한 관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해해주는 자와 이해받아야 하는 자의 위계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 p227

  곱씹어보게 만드는 문구였다. '이해할 수 있어야 받아들이는 관계는 평등한 관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해해주는 자와 이해받아야 하는 자의 위계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렇다. 평등은 이해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머리로, 자신의 상식으로, 자신의 상황으로 이해할 수 없으면 보통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이해가 가지 않으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자율이라는 것, 상대의 다름을 받아들여 불투명한 평등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인가 보다.



삶을 통해 그 값을 기꺼이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스스로 주인인 회사에서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좇아도 좋을 것이다.


  제현주 저자의 말대로 유능의 준거가 세상의 방식이 아닌, 온전히 나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남들만큼'이 아니라 '나름대로' 먹고살며, 시장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이면서 일해야 한다는 말이 뼈아프지만 내가 맞서야 하는 현실인 것이다.




  항상 그렇듯 모든 책이 정답은 아니다. 다만,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해답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그러하듯, 나만의 관점을 가지고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 타인의 경험 중 특히 이 시대의 '일'에 대한 생각을, 책을 통해 빌려본다. 끄적끄적...

 



* 책 제목 :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 저자 : 제현주

* 출판사 :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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