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6 <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
'잉여짓'은 왜 일이 아니란 말인가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이 무익하듯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는 조언도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 일자리를 구할 때가 돼서야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면 그 좋아하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좋아함'을 강요받는 것이다.
- p42
그때는 내가 옳은 이야기를 하니, 상대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것이라 믿었지만 직장 생활을 몇 년 더 하다 보니 깨닫게 되었다. 옳은 이야기에 옳은 논리라고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당해줄 마음이 있는 사람만 설득할 수 있는 법이다.
- p70
나는 여전히 일을 위해 이런저런 가면을 쓴다. 상황에 맞춰, 사람에 맞춰 상냥해져야 하고, 화난 연기를 해야 하고, 쑥스러움을 숨긴 채 느물느물 굴어야 한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비애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무엇이 진짜 나의 얼굴인지, 온전한 나인지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 가면들이 결국은 모두 나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중에 진짜인 것과 가짜인 것은 없다. 사실 모든 인간에게 여러 역할이 있는 만큼 얼굴도 여러 개가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역할과 상황에 따라 적절한 얼굴을 꺼내 보이는 것이 어른스러운 일이다. "나는 원래 이래" 또는 "나는 솔직한 사람이야" 같은 말로 자기의 '진짜' 얼굴만을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일이 아닐까.
- p75
가면과 그 뒤의 진짜 얼굴이라는 이분법은 오히려 일에서 상처 받지 않으려는 하나의 방어기제다. 보여야 했던 얼굴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위에서 시켜서' 혹은 '먹고살아야 하니까' 같은 말 뒤에 숨는 것이 차라리 안전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식의 자기연민은 현실에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쓸 수 있는 가면이었다면 아무리 불편했다 해도 내 얼굴 중 하나였던 셈이다. 그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거듭되다 보면 언젠가는 불편함이 사라지거나 도저히 더 이상은 그 얼굴을 보일 수 없거나, 둘 중 하나에 이르게 된다. 그 지점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나 감당할 수 있는지가 정확히 드러난다. 불편함을 극복할 수 있다면 한때 불편했을지언정 그 일이 주는 반대급부를 향한 욕망이 더 컸던 것이다. 결국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면 그와는 다른 얼굴로 살고 싶은 마음이 그 일자리가 주는 안온함보다 큰 것이다. 계속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반대급부를 향한 자신의 욕망을 흔쾌히 인정하는 편이 낫다. 참을 수 없다면 스스로 원하는 얼굴을 보이면서 일할 수 있는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설사 버려야 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 p77
정체성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이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을 둘러싼 한 가지 괴로움이 여기서 생겨난다. 세상은 내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를 준거로 나를 바라보는데, 나는 그 일로 나를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것.
- p157
일이 없음에도,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장소에 내 몸을 가져다 둬야 한다는 사실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일의 대가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시간을 판 대가, 즉 내 자유의 일정 부분을 포기한 대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 둘은 스스로 내 일상을 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다. 내 자유에 아무리 비싼 값이 매겨진다 해도 그걸 팔아서 살고 있다는 실감은 뼈아팠다.
- p168
현재를 견딤으로써 미래에 더 큰 과실을 누리라는 교훈은 안정적 토대 위에서만 빛을 발한다. 오늘의 만족을 뒤로 미루는 것은 언젠가 더 큰 대가로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을 수 없는데도 현재를 희생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내가 놓인 환경의 어떤 측면도 견실히 지속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시대, 오늘을 견디라고 부르짖는 노동 윤리는 결국 당신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지연된 만족에 이자를 붙여 돌려줄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 p180
세넷은 자율이 "타인에 대해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불투명한 평등"이라고 말한다. 상대의 다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름을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해할 수 있어야 받아들이는 관계는 평등한 관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해해주는 자와 이해받아야 하는 자의 위계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 p227
삶을 통해 그 값을 기꺼이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스스로 주인인 회사에서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좇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