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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Designeer Feb 20. 2020

좋음과 옳음, 그 어설픈 경계

취향에 대하여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누구냐?"

대학원에서 디자인 경영을 공부할 때였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교수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뜨끔했다. 나는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늦깎이 새내기인데, 좋아하는 혹은 존경하는 디자이너라니. 있을 턱이 있나. 한국 여느 교실의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침묵이 흘렀다. 특정 학생을 지목하고 나서야 답변이 나왔다. 일본과 미국 유명 디자이너 이름이 나왔다. 좋아하는 디자이너도 없는 나는 디자인에 대해 공부하겠다고 도전장을 내민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일까?


"좋아하는 브랜드가 뭐예요?"

마케팅의 실무, 디자인 경영 공부, 비즈니스 전반의 경험, 그리고 브랜딩과 관련된 일을 한 사람들과의 커뮤니티 모임 등 브랜딩이라는 주제 근처에 요 몇 년간 자주 머물러 있었다. 자연스럽게 만난 '브랜딩'을 오래 한 사람으로부터 향후 브랜딩을 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에게 요구하는 자질을 발견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브랜드가 무엇인지'를 묻는 이 질문을 통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간파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질문을 받으면 말문이 막힌다. 심지어 '어떤 브랜드에 푹 빠져본 사람만이 브랜딩을 잘할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을 듣고는 상심이 컸다. 크고 작은 수많은 소비활동을 해왔지만 좋아하는 브랜드가 없는 나는 브랜딩을 전문적으로 담당하기에 역량이 부족했던 것일까?


항상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누구이며, 좋아하는 브랜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속에 확답을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의기소침했던 시절이 꽤 길었다. 없는 걸 어떡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다 예전에 어느 괜찮은 스타트업 면접을 가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역시 면접 중 질문 하나는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느냐'였고, 나는 늘 생각해온 대로 자주 애용하는 IT 쪽 브랜드와 좋아하는 사유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치품에서는 없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실무팀장은 내게 '아직 브랜드 경험이 적어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라는 의견이었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옆에 있던 임원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건 성격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라는 것이다. 뭐라고?? 성격?? '성격 자체가 특정한 것을 좋아하기보다 다 수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성격이라 좋아하는 브랜드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질문의 판을 뒤집어엎는 통찰을 만났다! 이 임원은 나를 정확히 간파했다. 심지어 내 이력서도 대충 읽은 거 티가 팍팍 났었는데 말이다. 본인이 그런 성격이거나 나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있었으리라 추측해봤다. 면접에서 그 질문에 대한 내 답변 때문에 두 면접관의 의견이 갈려서 면접의 당락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추측했지만 다행히 합격했었다.




나의 성격은 어떠한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극히 좋아하거나 극히 싫어하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음식도 징그러운 것 빼고 다 먹고, 친구를 사귀는 데에 있어서도 정말 극한으로 상대하기 힘든 정도가 아니면 모두 잘 지내고 특히 사람을 잘 싫어하질 않는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도 웬만하면 다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고, 옷이나 신발과 같은 패션에서도 신체 특성상 어울리지 않는 것만 제외하면 색상과 디자인 측면에서 다양성을 매우 추구하는 편이다. 정규분포 종모양 그래프로 말하자만 양 끝 합쳐서 5%만 제외하면 난 모두 그 중간을 모두 수용하는 것을 훨씬 선호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나의 성격이 디자인과 브랜드 영역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던 것이다. 남들이 말하는 애플이 그렇게 좋게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애플은 이런 강점이 있고, 이런 약점이 있다고 생각이 든다. 무인양품의 디자인 철학을 듣는다 하더라도 내 눈엔 이런 장점이 있고, 이런 단점이 있음이 분명하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각기 다른 특성을 모두 수용하고 내 상황에 맞게 더 잘 이용할 수 있는 제품 위주로 골라 사용하다 보니 좋아하는 특정 브랜드가 생길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내가 사용한다고 해서 그 브랜드를 찬양하진 않는다. 어느 제품이나 허점은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완벽한 제품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이유는 '그냥' 일 것이다. 이유는 주장과 같이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영역에서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영역이 아닌 감정으로서 '좋음'을 느끼는 영역에 수만 가지 이유를 댄다 하더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건 '그냥' 좋아서일 가능성이 더 크다.

면접관의 그 한 마디를 들은 이후, 나는 생각의 시야를 한 번 크게 확장시켰다고 생각했다. 내가 더 이상 작아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취향에 이유를 묻고 그 이유가 본인 생각에 합당하지 않거나 취향이 본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문화에서, 왜 그동안 나는 질문의 전제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한 번도 의심해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취향이라는 게 아예 없는 사람인가?

또 그건 아닌 것 같다. 단지, 취향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강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내 취향대로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 타인에게 내 취향을 강요하거나 굳이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크게 들지 않는 것 같다. 말 그대로 성격인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대부분 다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있고,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 있고,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 있고, 가장 좋아하는 옷 스타일이 있다. 그 좋아하는 것들을 잘 만들고, 잘 제공하는 브랜드를 이용할 뿐인 것이다. 그 브랜드가 정체성을 잃으면 더 이상 이용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브랜드도 유기체와 같아 철학과 생명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한 번 좋은 게 끝까지 좋다고 보장할 수 없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왜 아이폰을 써야만 'Geek'스럽고 더 감각적인 사람처럼 생각하고 삼성폰을 쓰면 무시당해야 하는 걸까.

왜 자신의 취향과 다르다고 상대를 무시하는 것일까.

물론 특정 분야를 좋아해서 파고 파고 또 파다 보면 많은 지식이 쌓이고, 보는 눈이 길러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전문가의 안목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초보자에게 그러한 지식과 노하우를 공유해주면 되는 것을, 왜 자신과 동일한 취향이 없는 것을 문제 삼아 평가의 잣대로 휘둘러야만 하는 것일까.


사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말 그대로 '취향'을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취향의 사전적 의미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이다. 그런데 대학이나 대학원 공부를 해본 사람들은 어느 정도 공감할지도 모르겠지만, 특정 전문지식을 가르치고 교양을 함양하는 학교에서, 사실 배우는 사람의 취향이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의 취향을 '강요'받는 경우가 더 많다. 취향이란 나에게 좋은 것이 상대에겐 별로일 수 있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옳고 그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든 회사든 사회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의 취향이 모두 옳은 것인 양 맞추도록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실무를 하는 입장에서 면접관이 브랜드의 가치관을 확인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특정 브랜드의 경우, 회사와 결이 맞지 않으면 처음부터 배제하는 것이 현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브랜드를 키우기 위해 취향이 강한 사람들만 선택하는 것 역시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취향이 강한 사람은 본래의 철학에 맞게 더 좋은 아이디어를 통해 브랜드 정체성을 강하게 확립해나갈 수 있다. 반면 취향이 약한 사람은 아마 경쟁사나 자사 자체의 분석을 통해 리스크를 최소화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재고 따지고 비교하면서 더 나은 브랜드로 키우고 싶을 테니까 말이다.


취향을 존중하는 것이 디폴트가 되어가는 세상이지만, 그 와중에 자신의 취향이 곧 정답이며 옳음이라 주장하는 사람과 상황을 종종 맞닥뜨리곤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는 더 이상 주눅 들지 않는다. 대신 좋음과 옳음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대를 수용하는 넓은 아량을 갖추게 되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내적으로 깊이 고민했던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조금은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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