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62 < 미움받을 용기2 >
아들러 심리학을 '사용의 심리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라네.
과거가 '지금'을 정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의 '지금'이 과거를 정하는 것이지.
철학자 : 이 삼각주는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네. 지금 자네가 앉은 자리에서는 세 면 중 두 면만 보일 거야. 각 면에 뭐라고 적혀 있지?
청년 : 한 면에는 '나쁜 그 사람', 다른 면에는 '불쌍한 나'라고.
철학자 : 그래. 카운슬링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둘 중에 하나의 이야기를 내내 하다 가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하소연하거나, 자신을 탓하는 다른 사람에 대한, 혹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증오를 털어놓지. 카운슬링뿐 아닐세. 가족이나 친구와 이야기할 때, 고민거리를 털어놓을 때,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자각하기란 그리 쉽지 않네. 하지만 이렇게 시각화하면 결국 이 두 가지밖에 말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네. 분명 자네도 마음에 짚이는 데가 있을 거야?
청년 : ......'나쁜 그 사람'을 비난하느냐, '불쌍한 나'를 어필하느냐.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철학자 : 그런데 우리는 이에 관해 서로 이렇다 저렇다 논할 필요가 없다네. 자네가 아무리 '나쁜 그 사람'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불쌍한 나'를 알아달라고 해도, 그리고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일시적인 위로는 될지언정 본질을 해결하지는 못하니까.
청년 : 그럼 어떡하라고요!
...
철학자는 마침내 그 가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삼각주를 돌려서 마지막 한 면에 적혀 있는 말을 보여주었다. 청년의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그 말을.
청년 : ......!!
철학자 : 자, 소리 내어 읽어보게.
청년 : ......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철학자 : 맞아. 우리가 의논해야 할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뿐일세. '나쁜 그 사람' 같은 건 필요 없어. '불쌍한 나'도 필요 없고. 자네가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봤자 나는 흘려듣겠지.
- p83
'나'의 가치를 남들이 정하는 것.
그것은 의존일세.
반면 '나'의 가치를 내가 결정하는 것.
이것은 '자립'이지.
청년 :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죠. 먼저 아이를 야단쳐서는 안 된다. 야단치는 것은 서로의 '존경'을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화를 내고 질책하는 것은 그만큼 값싼, 미숙하고 폭력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그렇죠?
철학자 : 그래.
청년 : 그리고 칭찬해서도 안 된다. 칭찬하는 행위는 공동체 안에서 경쟁원리를 낳고, 아이들에게 '타인은 적이다'라는 생활양식을 심어주게 된다.
철학자 : 그대로네.
청년 : 나아가 야단치는 것과 칭찬하는 것, 즉 상벌은 아이의 '자립'을 방해한다. 상벌이란 아이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는 행위이고, 여기에 의지하는 어른들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아이의 '자립'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 아이들이 언제까지나 '아이'로 있어주기를 바라지. 그래서 상벌이라는 형태로 아이들을 옭아매는 것이고. "다 너를 생각해서", "네가 걱정돼서"라는 핑계거리를 준비하고 아이가 더는 자라지 못하도록 붙잡아둔다네....... 이런 어른들의 태도에는 일말의 존경도 없을뿐더러 그런 어른들과는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없네.
청년 : 그뿐 아닙니다. 아들러는 '인정욕구'까지 부정한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자기가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자 : 그래. 이것은 자립의 맥락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라네.
청년 : 압니다. '자립'이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반면 자신의 가치를 타인이 정하게 하는 태도, 즉 인정욕구는 그냥 '의존'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 p176
인간의 가치는 '어떤 일에 종사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닐세.
그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지.
철학자 : 자립이란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라네.
...
철학자 : 인간은 변할 수 있어. 생활양식을,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바꿀 수 있어. 사랑은 '나'였던 인생의 주어를 '우리'로 바꿔주지.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 '나'로부터 해방되어 자립을 이루고,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네.
청년 : 세계를 받아들인다고요?!
철학자 : 그래. 사랑을 알고 나서 인생의 주어가 '우리'로 변하는 것. 이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일세. 단 두 사람으로 시작된 '우리'는 머지않아 공동체 전체로 그리고 인류 전체로까지 그 범위를 확대해가겠지.
청년 : 그것이.......
철학자 : 공동체 감각이라네.
청년 : ...... 사랑, 자립, 공동체 감각! 어라, 아들러가 제창한 모든 이론이 연결되고 있잖아!
철학자 : 그래. 우리는 지금 위대한 결론에 거의 다 다다랐네. 그 심연까지 함께 내려가세나.
철학자가 말한 '사랑'은 청년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달랐다. 사랑이란 '두 사람이 달성하는 과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행복도 '너'의 행복도 아닌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우리는 '나'로부터 탈피할 수 있다.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되어야 진정한 자립을 이룰 수 있다. 자립이란 어린 시절의 생활양식에서 탈피하는 것이며,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청년은 지금 자신이 커다란 문을 열기 직전임을 직감했다. 이 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환한 빛일까, 칠흑 같은 어둠일까....... 아는 것이라곤 그저, 자신이 운명의 문고리에 손을 댔다는 사실뿐이었다.
- p268
운명이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자, 나는 이 이상 자네의 과제에 개입할 수 없다네.
하지만 만약 자네가 조언을 구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네.
"사랑하고 자립하고 인생을 선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