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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Designeer Jan 21. 2020

어떻게 '용기'를 실천할 것인가?

독서노트 #62 < 미움받을 용기2 >

아들러 심리학을 '사용의 심리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라네.
 과거가 '지금'을 정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의 '지금'이 과거를 정하는 것이지.


 <미움받을 용기1,2> 시리즈는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굉장한 열풍을 일으켰다. <미움받을 용기>이 "이론"에 가까운 내용이라면, 오늘 소개할 <미움받을 용기2>에서는 어떻게 행복해질 '용기'를 "실천"할 수 있을지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제시해 준다.



철학자 : 이 삼각주는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네. 지금 자네가 앉은 자리에서는 세 면 중 두 면만 보일 거야. 각 면에 뭐라고 적혀 있지?
청년 : 한 면에는 '나쁜 그 사람', 다른 면에는 '불쌍한 나'라고.
철학자 : 그래. 카운슬링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둘 중에 하나의 이야기를 내내 하다 가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하소연하거나, 자신을 탓하는 다른 사람에 대한, 혹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증오를 털어놓지. 카운슬링뿐 아닐세. 가족이나 친구와 이야기할 때, 고민거리를 털어놓을 때,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자각하기란 그리 쉽지 않네. 하지만 이렇게 시각화하면 결국 이 두 가지밖에 말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네. 분명 자네도 마음에 짚이는 데가 있을 거야?
청년 : ......'나쁜 그 사람'을 비난하느냐, '불쌍한 나'를 어필하느냐.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철학자 : 그런데 우리는 이에 관해 서로 이렇다 저렇다 논할 필요가 없다네. 자네가 아무리 '나쁜 그 사람'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불쌍한 나'를 알아달라고 해도, 그리고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일시적인 위로는 될지언정 본질을 해결하지는 못하니까.
청년 : 그럼 어떡하라고요!

...
철학자는 마침내 그 가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삼각주를 돌려서 마지막 한 면에 적혀 있는 말을 보여주었다. 청년의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그 말을.

청년 : ......!!
철학자 : 자, 소리 내어 읽어보게.
청년 : ......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철학자 : 맞아. 우리가 의논해야 할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뿐일세. '나쁜 그 사람' 같은 건 필요 없어. '불쌍한 나'도 필요 없고. 자네가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봤자 나는 흘려듣겠지.

- p83

사람들은 보통 힘든 일을 겪고 위로가 필요할 때, 혹은 흥미로운 잡담을 통해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등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나쁜 그 사람' 혹은 '불쌍한 나'로 귀결되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한다. 자신의 감정을 누군가와 나눔으로 인해서 잠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가장 간편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 경험해봤겠지만, 상담을 통해 내 이야기를 늘어놓든, 수다를 통해 잠시 기분전환을 하더라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되지 않는다. 결국, 철학자의 말처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건설적인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그 문제와 연관된 감정은 늘 제자리걸음만 할지도 모른다.


'나'의 가치를 남들이 정하는 것.
 그것은 의존일세.
 반면 '나'의 가치를 내가 결정하는 것.
 이것은 '자립'이지.


남의 시선, 남의 생각, 남의 말로부터 자유로워질 용기가 필요하다.

나의 관점, 나의 마음, 나의 행동으로 행복해질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 혹은 어딘가에 의존하는 삶은, 그 의존 대상이 없어지면 나의 삶이 무너진다.

나의 삶을 온전히 지탱해주고, 더 튼튼하게 만드는 것은 정신적인 자립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청년 :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죠. 먼저 아이를 야단쳐서는 안 된다. 야단치는 것은 서로의 '존경'을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화를 내고 질책하는 것은 그만큼 값싼, 미숙하고 폭력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그렇죠?
철학자 : 그래.
청년 : 그리고 칭찬해서도 안 된다. 칭찬하는 행위는 공동체 안에서 경쟁원리를 낳고, 아이들에게 '타인은 적이다'라는 생활양식을 심어주게 된다.
철학자 : 그대로네.
청년 : 나아가 야단치는 것과 칭찬하는 것, 즉 상벌은 아이의 '자립'을 방해한다. 상벌이란 아이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는 행위이고, 여기에 의지하는 어른들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아이의 '자립'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 아이들이 언제까지나 '아이'로 있어주기를 바라지. 그래서 상벌이라는 형태로 아이들을 옭아매는 것이고. "다 너를 생각해서", "네가 걱정돼서"라는 핑계거리를 준비하고 아이가 더는 자라지 못하도록 붙잡아둔다네....... 이런 어른들의 태도에는 일말의 존경도 없을뿐더러 그런 어른들과는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없네.
청년 : 그뿐 아닙니다. 아들러는 '인정욕구'까지 부정한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자기가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자 : 그래. 이것은 자립의 맥락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라네.
청년 : 압니다. '자립'이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반면 자신의 가치를 타인이 정하게 하는 태도, 즉 인정욕구는 그냥 '의존'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 p176

부모와 자식 간에도, 특히 아주 어린아이에게도 '존중'과 '존경'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의 중요성은 <미움받을 용기> 책 1권을 통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실천해 오고 있었다. '벌'이나 '폭력', 일방적인 '권위'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사실 '칭찬'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키기 어려웠다. 무언가를 더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칭찬'을 하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우면서도 또한 정말 그래야 하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되도록이면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말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의도치 않게 무언가를 열심히 해낸 모습에 '잘했다'는 칭찬을 자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며, 그리고 만 네 살인 아이가 아빠와의 경쟁심리를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린 지금, '칭찬'이 왜 '인정욕구'와 '경쟁원리'를 낳는지 실감하고 있다. 어떻게 '자립'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상벌의 커뮤니케이션을 줄일지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요즘이다. 누군가는 경쟁심리를 이용하여 재능을 개발하고 잘 키울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경쟁'이라는 심리가 유용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얼마나 위험한 지도 내 일생을 통해 통감했기에, 책의 내용처럼 '경쟁원리'가 아닌 '협력원리'로 현명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인간의 가치는 '어떤 일에 종사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닐세.
 그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지.


기업에서는 직원을 채용할 때, '능력'을 판단의 기준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사람들은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는다. '이 사람과 같이 일하고 싶은가'가 더 중요해진다.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 즉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하게 임하느냐가 결국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서로 도와주고 싶은가, 함께 일하고 싶은가로 이어진다.



철학자 : 자립이란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라네.
...
철학자 : 인간은 변할 수 있어. 생활양식을,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바꿀 수 있어. 사랑은 '나'였던 인생의 주어를 '우리'로 바꿔주지.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 '나'로부터 해방되어 자립을 이루고,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네.
청년 : 세계를 받아들인다고요?!
철학자 : 그래. 사랑을 알고 나서 인생의 주어가 '우리'로 변하는 것. 이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일세. 단 두 사람으로 시작된 '우리'는 머지않아 공동체 전체로 그리고 인류 전체로까지 그 범위를 확대해가겠지.
청년 : 그것이.......
철학자 : 공동체 감각이라네.
청년 : ...... 사랑, 자립, 공동체 감각! 어라, 아들러가 제창한 모든 이론이 연결되고 있잖아!
철학자 : 그래. 우리는 지금 위대한 결론에 거의 다 다다랐네. 그 심연까지 함께 내려가세나.

철학자가 말한 '사랑'은 청년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달랐다. 사랑이란 '두 사람이 달성하는 과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행복도 '너'의 행복도 아닌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우리는 '나'로부터 탈피할 수 있다.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되어야 진정한 자립을 이룰 수 있다. 자립이란 어린 시절의 생활양식에서 탈피하는 것이며,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청년은 지금 자신이 커다란 문을 열기 직전임을 직감했다. 이 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환한 빛일까, 칠흑 같은 어둠일까....... 아는 것이라곤 그저, 자신이 운명의 문고리에 손을 댔다는 사실뿐이었다.

- p268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한 남녀 간의 '사랑'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나 혼자가 아닌 타인과 함께 하는 삶에서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하나의 공동체의 개념까지 확산되게 된다. 그것의 출발점은 바로 '나'의 '자기중심성의 탈피'라는 것. 결국은 '자립'이 가장 중요한 것일지 모른다.


운명이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운명이라는 단어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운명의 주인이 되자.

운명의 상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 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

그것은 모두 나의 손에 달린 것이다.


자, 나는 이 이상 자네의 과제에 개입할 수 없다네.
 하지만 만약 자네가 조언을 구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네.
 "사랑하고 자립하고 인생을 선택하라."




* 책 제목 : 미움받을 용기2

* 저자 :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 출판사 : 인플루엔셜

* 출간일 : 2016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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