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책장과 가방 이야기
지난 휴일 이케아에서 드디어 책장을 사왔다. 몇년간 미뤄오던 숙제였다. 침대 밑이나 옷장 뒤 여기저기 쳐박혀 먼지가 쌓여가던 책들을 구조해 냈다. 대부분의 책들이 새 책장 위에 진열 됐고, 어떤 책들은 검사를 거쳐 회생치 못하고 분리수거됐다. 아내에게 고마웠다. 이번에도 아이쇼핑 끝에 귀찮다며 딸아이 생쥐 인형만 사서 돌아오려던 것을 아내의 잔소리 덕분에 책장 구매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보물찾기 하듯 집안 곳곳에 숨겨진 책들을 찾아냈다. 버릴책과 간직할 책을 우선 분리했고, 세 칸으로 나뉜 책장에 나름의 구분으로 책을 꽂았다. 책을 정리하는데 어떤 책 사이에서 청첩장 하나가 툭 떨어졌다. 9년전 아내와 나의 결혼때 청첩장이었다. 반갑기도 했고, 청첩장에 찍힌 또렷한 결혼 날짜를 보며 시간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기도 했다.
어떤 책 사이에서는 아내가 '오빠'에게 쓴 엽서가 나오기도 했는데, 그 오빠가 이 오빠냐 딴 오빠냐 잠시 옥신각신하며 웃었다. 몇년 전 대학원 다닐때 쓰던 교과서도 있었고, 그동안 어디있나 줄곳 찾던 영문법 책도 찾아냈다. 먼지쌓인 책들을 한곳에 정리 하자는게 최초의 목표였다면, 추억의 소환과 담소는 예상 못한 소득이었다.
소설이나 운동, 경영 관련 책도 있었지만, 정리해 보니 내 책들은 크게 영어공부, 재테크, 자기계발 세가지로 나뉘었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최근 몇년간 재미를 붙여 사들인 책들이 꽤 양이 됐다. 영어공부는 그렇게 수십년 했는데도 늘 헝그리 했고, 결국은 돈이라며 재테크 재테크 했었음이요, 그래도 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몸부림 친 자기계발서들은 측은하다. 그래, 그런 것들에 나의 관심은 향해 있었다. 그래도 최근에 사고 있는 책들은 위 세가지를 벗어나고자 함인지 의미 있는 삶을 쫓는 주제로 발전하고 있다. 책을 정리하다 보니 지난 나의 삶도 한번 먼지를 털고 가는 느낌이다.
내가 매일 출근할때 들고 다니는 서류 가방이 있다. 가방이 원래 좀 무거운 소재지만 뭘 그리 넣고 다니는지 늘 내 가방은 무겁다. 지하철 짐 선반에 올리기라도 하면 쿵 소리가 날 정도다. 언론정보학 부전공자라며 그날그날 신문 구독에, 교양을 쌓는다고 책도 한권 넣어야 하고 아무튼 늘 무겁다. 그러고보니 학창시절에도 그랬다. 능력에 비해 의욕은 왕성하여 시험은 못 볼 지언정 매일 가방에 교과서며 참고서며 꽉꽉 채워 다니던 그런 스타일이었다. 최근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많다. 그래서 그랬는지 몇일전 출근길엔 무거운 가방에 갑자기 화가 나기도 했다. 왜 내 가방은 이렇게 팔이 아프도록 늘 무거워야만 하는가.
책장에 가지런히 책을 정리해 놓으니 생각보다 기분이 좋다. 정리정돈의 의미를 떠나, 나의 지난 시간과 삶을 작으나마 존중받는 느낌이다. 먼지쌓인 나의 노력, 흩어져 있던 나의 열정, 내 삶의 작은 흔적들을 가지런히 모아 새 책장에 정리한다. 내일 하루는 가방 없이 가벼운 손으로 출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