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명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명록 May 28. 2023

거절받기 싫은, 모두의 제인

“저는 태어날 때부터 진실하지 않았어요 제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네 제 노래는 거짓 역사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진실이라고 믿죠 그렇게 제 존재는 언제나 거짓이었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의 구취가 난다고 손가락질받았죠 저는 어찌할 줄 몰랐어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 곁에 머물 수 있는지 방법을 몰랐죠 특히나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제 곁을 떠났어요 그들 중 몇 명은 제게 이렇게 말하러 다고요 넌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거야 왜냐면 넌 사랑받고 싶어서 누군갈 사랑하거든 그렇게 저는 여전히 혼자인 채로 살고 있습니다 제 진심이 언젠가는 전달될 거라고 믿으면서요 물론 이 외로운 삶은 쉽게 바뀌지 않겠죠 불행도 영원히 지속되겠죠 그래도 괜찮아요 오늘처럼 이렇게 여러분과 즐거운 날도 있으니까 말이에요 어쩌다 이렇게 한번 행복하면 됐죠 그럼 된 거예요 자,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그리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만나요 불행한 얼굴로”
꿈의 제인, 2017


“죽지 말고 또 만나요”


오랜만에 만난 나의 주치의는 악담인지 안부일지 모를 굿바이 인사를 이렇게 전했다. 나는 퍽 어이가 없고 기분이 좋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로서는 정말 죽지 말라는 건지 다시는 이 병원에 오지 말고 알아서 죽으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병을 고치는 의사이자 믿고 의지할 대상이라 생각했던 내 오만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는 내가 죽던 날 이전에 위로의 문자를 보내주어 기도하겠다는 말을 전했고 위험할 때면 언제든 병원으로 오라고도 했다. 내가 응급실을 나선 후 그의 병원에 들렀을 때 그는 “여기는 입원 병동이 있는 병원이 아니라서 원래는 요나님과 같은 중증 환자를 받을 수 없어요.”라고 선을 그었고, 입원의뢰서를 주면서 큰 병원에 가기를 제안했다.


알고 있다. 개인 병원의 밀려드는 환자를 보고도 나만 아프다고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을. 오랜 기간 의지하면서 약물치료를 받았지만 치료에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오래 찾아 헤맨 끝에 드디어 찾은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라는 안도감도 잠시 의사의 그 한 마디는 존재적 거절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받아들여지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두 번째로 거절을 당했다. 일전에 그의 말대로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입원도 했다. 몇 달 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찾았던 만남은 칭찬은커녕 비아냥 거리는 실소가 난무했다. 의사에게 들고 간 고통은 거절로 돌아왔고, 거절이 고통의 일부가 되었다.


또 알고 있다. 의사에게 환자는 수많은 케이스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환자에게는 하나의 대상이지만 의사에게는 점심시간 몰려들어 밥대가 끝나면 밀려나가는 손님과 같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증과 공황장애 환자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던 건 지나친 기대일까. 두 번의 거절 이후 말로는 내뱉지 못할 슬픔과 배반의 고통에 마음이 쓰다. 병의 고통보다 사람이 주는 고통이 더 아프다.


“어떻게 지내셨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의사가 자판기처럼 뱉어내는 이 질문 한 마디를 듣지 못해 슬픔은 쌓이고 단 한 사람에게라도 내 이야기를 할 데가 없어 고통은 곪아간다. 내가 치러야할 계산서인가, 심판대 앞에서 펼쳐 읽을 내 인생의 결과인가 싶어 서글퍼진다. 말 한마디 할 곳 없어 죽기를 선택하는 이들의 장례는 오늘도 열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아직도 내가 낯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