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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Dec 04. 2023

온정주의

얼마 전 행정을 총괄하는 분이 병원에 새로 부임하셨다. 수장이 바뀌면 조직의 문화가 바뀌는 법. 이후로 병원 단톡방에 수시로 각종 공지 사항 및 바뀐 지침들이 연이어 올라왔다. 병원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공식화된 방침이 필요하며, 어떤 일은 문서로 확실히 명시해야 업무처리가 더 정확해진다는 걸 알지만, 한편으로는 근무 중 행하는 사소한 움직임까지도 통제받는 느낌 역시 지우기 어려웠다. 그에 반해 일부 지침에 대해서 환영하는 MZ세대 간호사들을 보며 남몰래 약간의 세대 차이(?)를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지난 금요일에도 새 알림이 올라왔다. 현재 맡은 업무에 대해 최고의 전문가가 되길 바란다는 말을 시작으로 근태, 휴게, 용모 복장, 전화 응대, 직원 상호 간 호칭 등에 대한 철저한 지킴이 필요하다는 당부와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직원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까지 다양한 지시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간 올라온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쭉 읽어 내렸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 줄의 문장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져 나지막이 소리를 내 한 번 더 읽었다.


‘온정주의는 부서를 망가지게 하는 근원임을 명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온정주의라니…. 처음 듣는 말이었다. 문맥상 어떤 의미인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더 정확히 알아보고자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온정주의 [paternalism, 溫情主義]

노사관계를 대등한 인격자 상호 간의 계약에 의한 권리 ·의무 관계로 보지 않고, 사용자의 온정에 따른 노동자 보호와, 이에 보답하고자 노동자가 더욱 노력하는 협조 관계로 보는 것이며, 합리적인 계약 관계 대신에 서로의 정감(情感)에 호소함으로써 노사관계를 원활하게 하려는 노무관리 방법이다.

유럽에서는 상여(賞與) ·복지시설 등을 충실하게 함으로써 협조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독점자본의 노무관리 정책으로서 중시되어 왔다. 한국에서는 8 ·15광복과 6 ·25전쟁 이후로 주종(主從) 간의 정의(情誼), 가족주의 등의 형태로 온정주의가 노무관리의 기조(基調)로 되어 있어, 온정주의가 노무관리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근래에는 세계적으로 온정주의 대신 파트너십(공동의 사업추진자) 사상이 점차 강조되고 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쉽게 말하면 사주 또는 관리자가 집단 구성원을 가장이 자녀를 대하듯이 하는 가부장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집단에서 이러한 온건주의는 힘을 가진 쪽의 권위에 힘을 실어줄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할 개념이 맞다. 그러나 나는 온정주의라는 단어를 본 후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자꾸만 슬픔이 한 움큼씩 올라왔다. 그 말이 여태껏 내가 가지고 있던 ‘온정’이란 단어에 관한 이미지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원래 온정이란 사람의 따뜻한 정을 뜻하는 말이다. 가끔 온정이란 단어를 기사나 책에서 만날 때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구세군이나, 연탄 봉사자들을 떠올리며 흐뭇해하곤 했다. 타인에게 자신이 가진 사랑을 나눠주는 그런 훈훈한 마음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따뜻한 말조차 인간의 주장이나 방침, 이론을 뜻하는 ‘주의’와 결합하면 처음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한다.     

 

물론 나도 기업의 온정주의에는 반대한다. 고용주와 고용인은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며 주종관계는 더더욱 아니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온정이란 말에 그런 어두운 철학을 넣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 있어 따뜻한 인간의 정이란 그 어떤 고난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일종의 핵심적인 인생 가치니까. 어쩌면 이런 생각을 가진 나란 사람이야말로 조직에서 배척해야 할 위험한 일원일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인간의 정을 계속 그리워하다 보면 자칫 직장 내에서도 온정주의에 빠질 위험의 소지가 다분하다. 새 사칙에 들어간 단어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아 혼자 분개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아무래도 나는 조직과 맞지 않는 사람일까. 어째 결론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한 줄 요약 : 온정주의는 배척해야 할지라도 온정은 영원히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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