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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Nov 28. 2023

요즘 내 심장을 차분하게 하는 것

최근에 좀 낯선 취미에 빠졌다. 원래 ‘취미’란 가슴이 설렐 정도로 좋아하는 일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취미는 내게 정반대의 현상을 가져온다. 이걸 하는 동안 내 마음은 잠시 잔잔한 호수가 된다. 그 취미는 바로 왼손 필사. 어느 날 라라크루의 희수공원 작가님의 왼손 필사를 보고 막연한 호기심이 들었다. 마침 지인에게서 선물로 받은 윤동주 시 필사책이 꽤 오랫동안 책꽂이에 묵혀 있었다. 이번이야말로 그 책을 제대로 활용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에 첫 왼손 필사를 시작했다.  

    

평소에는 글씨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매우 심각한 악필이라는 감출 수 없는 사실에 있다. 어릴 때부터 글씨를 쓰면 많은 놀림을 받았다. 첫 비평가는 엄마였다. 엄마는 내 글씨의 가장 큰 문제는 못 쓰는 게 아니라 글씨 자체가 너무 작은 것이라고 했다. 글씨를 작게 쓰면 소심하고 속이 좁은 사람처럼 보인다며 잘 쓰지 못하더라도 가능한 한 크게 쓰려는 노력이라도 하라고 나무라듯 말했다. 그 결과 큰 글씨는 내 악필을 더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학교 친구들은 내 글씨를 볼 때면 종이 위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다고 놀리고는 했다. 그 밖에도 살면서 타인에게서 글씨에 관련된 많은 혹평을 들었다. 그중 가장 최악의 반응은 언제나 말보다 표정에 있었다. 입가에 깃든 비웃음이 아무리 미세하더라도 나는 금세 알아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언제나 멋쩍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다른 말로 관심을 돌렸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무덤덤해질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글을 써야 하는 일이 생기면 어디론가 잠시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그랬던 내가, 그것도 주도적인 쓰임이라고는 없는 왼손을 사용한 필사에 재미 들였다는 건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왼손을 사용하며 우뇌를 발달시켜보려는 의도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왼손으로 글을 쓰는 그 시간이 좋아서 계속하게 된다.      


왼손으로 연필을 쓰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어릴 적 배웠던 연필 잡는 법을 상세히 떠올리며 왼손으로 연필을 잡는다. 추위에 발발 떠는 것 같은 글씨를 최대한 고정하기 위해 오른손으로 살짝 들떠있는 페이지를 누른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가며 천천히 써 내려간다. 나도 모르게 왼쪽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면 한 번씩 어깨를 끌어내리고 다시 정자세로 돌아온다. 오로지 지금 쓰고 있는 글자의 모양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잡념이 사라진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딴생각이 들면 글씨는 금방 보기 싫게 휘어진다. 휘어진 글씨를 보고 자신의 집중력이 이탈했음을 깨닫는다. 다시 연필을 꽉 잡는다.      


힘들었던 일이 나를 괴롭혔던 날에도, 타인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받았던 날에도, 내일 할 일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할 때조차. 왼손으로 글을 쓰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일시에 멈춘다. 마음은 평화 속에 고요히 잠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왼손을 쓰는 재미를 느낀 것이 아니라 생각을 멈추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흔히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며 살라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나처럼 평생을 감정의 노예로 살아 노예근성이 영혼의 뼛속까지 박힌 사람이 돌연 감정은 네가 아니라는 에크하르트 툴레의 책을 읽는다고 곧바로 설득당할 수는 없다. 불안정한 감정의 힘은 거대한 바다만큼 강하니까. 나는 여전히 화가 나면 맥박이 거세게 뛰고 혈액의 압력은 순식간에 솟구치는 아주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이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내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아주 드물지만 짧은 순간이니까. 무언가에 몰입하는 행위 자체가 기쁨이므로. 내가 사랑하는 시인의 글을 읽으며 이해하기보다 쓰면서 감상하는 순간이 그저 좋아서. 게다가 왼손으로는 글씨를 아무리 못 써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나는 당분간 계속 왼손 필사에 빠져있을 예정이다.


내 첫 왼손 필사와 최근 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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