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중 제일 바쁜 시즌이었던 연말이 검진센터에서 일하는 일개 간호사의 역사 뒤로 사라졌다. 새해가 왔다는 건 곧 검진 비수기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드디어 휴가를 낼 수 있는 시기라고도 일컫는다. 일 년 내내 이날만을 기다리던 남편은 이미 6개월 전부터 여행계획을 짰다. 이번 휴가지는 인도네시아의 발리섬. 발리는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로 이번에 방문하면 벌써 4번째가 된다. 우리는 발리에서 3박, 배를 타고 길리 트라왕안(Gili Trawangan)이라는 섬으로 더 들어가서 4박을 하기로 했다.
처음 3박을 한 발리의 호텔에서는 매일 10시간씩 잤더니 3일이 하루처럼 지나갔다. 말 못 하는 몸이 그동안 피로했다고 온몸으로 아우성을 표출했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조식을 먹고 풀장으로 뛰어 들어가 낮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면 주변 식당과 야시장을 돌아다녔다. 나흘째 아침이 밝아오자 우리는 묵었던 호텔에 체크아웃하고 길리섬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왼쪽은 우리가 묵었던 호텔 메종 아우렐리아 사누르(Maison Aurelia Sanur) 풀장. 오른쪽은 야시장에서. 그날은 날씨가 매우 흐렸다. 1월의 발리는 우기라 이미 하루 걸러 하루씩 비를 만난 상태였기에 흐린 날씨가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문제는 바다였다. 파도가 높고 물살이 거칠어 배가 앞쪽으로 고꾸라지듯 떨어지고 오르기를 반복했다. 중간에 비까지 내려 1시간 반 동안의 항해 내내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나는 30분이 지난 시점부터는 멀미로 거의 실신 지경이었다. 살았다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육지 땅을 밟았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부두에서 치도모(cidomo)라고 불리는 말 마차를 타고 다시 호텔까지 이동해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섬은 지역 법령에 따라 자동차나 오토바이 같은 휘발유를 사용하는 교통수단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그사이 다행히 비는 그쳤다. 좀 전에 내린 비로 길에는 수십 개의 물웅덩이가 생겼다. 물웅덩이를 지나 때마다 몇 번이나 마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고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내 사소한 통증은 우리 세 식구와 캐리어 가방 2개까지 싣고 험한 길을 달리던 말에게 미안한 마음과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빌라 펜유(Villa Penyu)라는 숙소에 도착했다. 빌라는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윤식당'의 촬영지로 한국인들에게는 꽤 알려진 곳이다. 사장님도 한국 분이라 그런지 우리를 포함해 숙박객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로비에서 몇 걸음만 앞으로 걸어가면 바로 에메랄드빛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최대 장점은 여기가 거북이를 볼 수 있는 장소(해변에 줄지어진 식당에서도 Turtle point라는 팻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로도 유명하다는 점이었다.
치도모(cidomo)와 빌라 펜유(Villa Penyu) 입구 도착한 다음 날 미리 챙겨 온 물놀이용 신발을 신고 스노클링 장비를 얼굴에 쓰고 곧장 바다로 뛰어들었다. 진짜 거북이를 만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거북이 한 마리를 만났다. 거북이는 뒤를 졸졸 따라가며 구경하는 인간들이 꽤 익숙한지 한가로이 유영하다가 깊은 바닷속으로 떠났다. 우리는 이후에도 1시간 정도 더 수영하고 딸과 함께 나왔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조식을 먹으러 가자고 딸을 흔들었는데 딸의 몸이 불덩이였다. 가져온 체온계로 열을 재보니 39도가 나왔다. 다른 증상이 특별히 보이지 않아 바로 해열제인 이부프로펜을 먹였다. 평소대로라면 30분이면 해열제 효과가 나타났어야 하는데, 1시간이 지나 열을 재보니 39.2도로 오히려 더 높이 올라가는 게 아닌가! 나는 당황해서 호텔 프런트로 달려가 상황을 설명하고 약이 있는지 물었다. 호텔 직원은 어린이용 약은 없다면서 원한다면 방문 의료 서비스를 하는 곳으로 전화를 걸어줄 수 있다고 했다. 현지에서 의료팀을 부르거나 병원에 가게 되면 비용이 많이 나온다고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발리에서도 떨어진 외딴섬이라 병원을 가려면 배를 타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편과 상의했더니 남편이 여행 출발 며칠 전까지 고민하다가 여행자보험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주저 없이 호텔 직원에게 의료팀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약 20분쯤 지났을까. 의료팀 2명이 우리 방으로 와서 딸의 열부터 쟀다. 체온을 확인한 사람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려를 쏟아냈다. 열이 많이 나는데 여기서는 해줄 수 있는 게 간단한 치료밖에 없다고. 원한다면 혈관으로 해열제를 투여하고 수액은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딸의 옷을 살짝 걷으며 피부의 살피더니 발진은 없지만, 지금이 우기라서 뎅기열의 가능성도 완전히는 배제할 수 없다고도 했다. 우리만 원한다면 수송팀의 배로 병원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고 했는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일단 여기서 치료받고 경과를 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곧바로 아이에게 주사를 놔주었고, 다행히 아이는 시간이 지나며 열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먹는 해열제와 항생제,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오심 및 구토, 지사제까지 받았다. 그들이 떠나면서 비용청구서를 주었는데 총 6,175,000루피아(=한화 523,002원)가 청구되었다. 보험 청구를 위한 영문 서류는 스냅챗(Snapchat)이란 메신저로 다음날 보내주었다. 만약 여행자보험이 없었다면 충분히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행의 필수는 여행자보험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종일 쉬고, 받았던 약을 먹였더니 다행히 딸은 다음날 언제 아팠냐는 듯이 쌩쌩하게 일어났다. 남편이 고프로 액션캠까지 대여해서 가져왔기에 우린 거북이를 찍겠다는 일념으로 바다로 다시 들어갔다. 이번에는 거북이 2마리를 동시에 찍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날 밤 딸의 열이 또 올라 해열제를 다시 먹이고 세 식구가 다음날 종일 방에 누워서 인스타와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는 건 굳이 밝히고 싶지 않다. 딸아, 사진을 찍겠단 욕심에 눈먼 어미가 미안하구나!)
그날의 바닷속에서 행운과 장수의 상징인 거북이가 해초를 먹는 모습은 거룩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한참이나 넋을 놓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올해의 시작부터 거북이를 보았으니 왠지 우리 가족에게도 행운이 찾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딸의 열은 액땜으로 치련다) 나는 거북이에게 꼭 행운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만 작은 행복이라도 놓치지 않고 많이 잡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글을 쓰는 이 순간 눈을 껌뻑거리며 숨을 쉬기 위해 수면으로 올라오던 거북이가 다시 떠오른다. 새해 첫 행복 채집은 성공적이다. 글이라는 그물로 그날의 신비로움을 온전히 건져 올렸으니까.
올해도 잘해보자.
삶도.
그리고 글쓰기도...
한 줄 요약 : 여행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여행자보험은 필수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