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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Feb 22. 2024

구멍 난 고무장갑

휴일의 아침은 집안의 먼지마저 나른하다. 햇살에 떠다니는 먼지는 요즘의 내 상태와 닮아있다. 평일에야 출근을 위해 늦어도 6시 전에는 일어나지만, 더는 할 일 많은 사람처럼 새벽 4시 반에 기상해 부산을 떨지 않는다. 원래부터 새벽형 인간이 아니었다. 일 년 넘게 새벽 시간에 눈뜨기를 고수한 이유는 단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팽팽했던 마음은 시간이 지나자 성장하는 아이와 함께 느슨해졌다. 특히, 일요일에는 희미하게 남겨진 습관마저 버릴 때가 많다.     

 

오늘도 그런 아침이었다. 새벽을 가르는 알람 소리에 잠깐 눈을 떴다가 조금 더 자고 싶어 재차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감은 순간이 찰나로 느껴질 만큼 숙면했다. 다시 일어나니 시계가 어느덧 9시를 넘기고 있었다. 예전이었더라면 훅하고 올라오는 속상함 뒤로 일말의 자책이 꼬리처럼 따라왔을 테다. 신기하리만치 그 기분은 사라진 지 오래다.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비비며 껌뻑거렸다. 화장실에서 손만 씻고 주방 앞에 섰다.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는 동작은 거의 기계에 가까웠다. 계란프라이를 하고 김치와 밑반찬도 꺼냈다. 어릴 적에는 한국 사람이 김치 없인 못 산다는 말을 들으면 이해하지 못했다. 요즘에는 유명한 맛집을 가더라도 김치부터 맛본다. 민족이란 태어나며 얻어지는 혈통이 아닌 자라면서 위장에 흡수되는 음식으로 결정된다. 피자와 햄버거를 좋아하던 X세대 소녀는 학창 시절 보던 교과서와 함께 영원히 떠났다.      


밥을 다 차리고 가족을 불러 간단히 아침밥을 먹었다. 식탁 가장자리에 패드를 세워놓고 의자에 앉은 딸은 백날 봐도 왜 웃기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유튜브를 틀고 혼자 킥킥거리며 밥을 코로, 아니 입으로 먹었다. 그마저도 입맛이 없다며 반은 남기고 식탁을 떠났다. 이변이 없는 한 그녀의 잔반 처리반은 바로 나다. 혼자 남아 마지막 음식 처리까지 마치고 설거지하려고 고무장갑을 꼈다. 고무로 갈라진 막이 손에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      


퐁당퐁당 그릇을 물에 담그고 퐁퐁을 수세미에 묻히고 비비자 거품이 퐁퐁 올라왔다. (퐁퐁이란 이름에 담긴 깊은 뜻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하는 40대가 여기 있다) 거품에 김칫국물, 기름때, 끝까지 그릇에 매달려 있던 밥풀까지 몽땅 쓸려 내려갔다. 그 모습이 시원해 내 기분도 포로롱(?) 날아올랐다. 접시가 뽀득뽀득해질 때까지 물로 몇 번 더 헹궜다. 깨끗해진 접시를 건조대에 하나씩 올릴 때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갑자기 느낌이 좀 이상했다. 어라? 분명 고무장갑을 꼈는데 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 축축해지지? 접시를 헹굴수록 들어오는 물이 조금씩 불어나 손가락이 물속에 잠겼다. 마지막 접시까지 씻고 고무장갑을 벗었다. 왼쪽 고무장갑을 거꾸로 세웠다.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무장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네 번째 손가락 끝부분에 실오라기 같은 미세한 찢어짐이 있었다. 찢어진 부분이 어찌나 작았는지 바로 찾지 못할 정도였다. 언제 찢어진 걸까? 겉은 이렇게 멀쩡한데 구멍이 났다니, 순간 아쉬움이 올라왔다. 고무장갑은 손을 보호하고 물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아무리 탄력이 강하고 신축성이 좋아도 구멍 난 고무장갑은 자신의 수명을 다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 자리에서 미련 없이 왼쪽 고무장갑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고무장갑을 바라보니 슬픔이 찾아왔다.      


구멍 난 고무장갑에서 남몰래 찢어진 내 마음을 보았다. 지난 며칠간 내 속에는 누군가를 향한 작은 미움 바늘이 생겼다. 미움 바늘로 뚫린 마음 구멍은 조금씩 커졌다. 겉으로는 전혀 안 그런 척, 괜찮은 척하며 지냈지만, 뚫린 구멍으로 시도 때도 없이 시린 바람이 들어왔다. 나는 상대를 비난하는 궁핍한 마음을 합리화하려는 심리로 갈라진 마음을 봉합하려고 했다. 그건 고무장갑을 꿰매려는 노력처럼 헛되고 부질없는 방편이었다.     


남을 미워하는 감정은 구멍과 같다.

사람이 미울 때 미운 상대만 바라보면 내 마음의 구멍이 절대 메워지지 않는다.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일이 생겼을 때 대상이 아닌 나를 보았어야 했다. 괜찮은 척하기보다 자신의 아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좀 더 빨리 상처받은 마음이 회복되었으리라. 내 아픔이 혼자만 겪는 특별한 아픔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하는 편이 낫다. 아무리 힘든 일도 알고 보면 흔하게 오는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장에 예사롭게 생각하긴 어렵지만, 어떤 일도 결국 내 인생을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때까지 흔들리는 마음을 가만히 안아주고 위로하면 그뿐이다. 비록 구멍 난 고무장갑은 메우지 못했지만, 내 마음의 구멍은 그렇게 메우며 살리라. 미워하는 감정 따윈 오래 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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