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바운더리가 건강한 사람은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있다. 바운더리가 희미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은 상대방의 생각. 감정. 주장을 그대로 흡수하고 말지만, 바운더리가 발달한 어른은 필터 기능이 있다. 무조건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걸러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인 다음 필요 없는 것을 다시 내보내는 ‘정신적 소화능력’이 있다.
출처. 관계를 읽는 시간. 문요한 지음
2. 문장에서 시작된 내 삶의 이야기
며칠 전 엄마와 크게 싸웠다. 서로 언성을 높이며 충돌한 건 아주 오랜만이다. 생각해 보니 싸웠다는 말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싸움’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주어가 되려면 문장 속에 함께 하는 상대와 대등하거나 적어도 힘의 불균형이 크지 않다는 미묘한 뜻이 들어가야 한다. 정확하게 다시 고치자면 내가, 엄마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순종적인 딸은 사라졌다. 마흔 넘은 자식의 반항은 마치 자그마한 마을에서 정부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 사건과 비견될 만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관계가 있다면 나는 그것이 가족관계라고 말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엄마와의 관계는 그 어떤 관계와도 비교가 어렵다. 기억 속에 엄마는 집에서 언제나 절대군주였고, 나는 왕을 신봉하는 일개 백성이었다. 세월이 흘러 세상이 변했다. 왕권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역사 시험의 단골 질문이 되었으며, 나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엄마도 어느덧 할머니라는 이름에 익숙해졌다.
엄마가 노인이 되는 동안, 나도 성인이 되었는데 우리의 관계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사회 물을 먹으며 체화된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 두기는 엄마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너무 가까워서 피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이 없으니 작은 말에도 금세 상처받았다. 내 상처가 쓰라려 나도 날을 세웠더니 이번에는 엄마가 상처받았다.
그 일이 있고 지난 며칠간 투사와 자기 비난, 죄책감 사이를 왔다 갔다가 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내뱉지 말았어야 할 말들을 수정테이프로 덮듯이 지우고 싶었다. 아무리 애써도 한 번 벌어진 일을 없앨 방법은 없었다. 산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미 일어난 상황을 되돌린 순 없어도 피해를 복구할 수는 있다. 이후 말 대신 관계 회복을 위한 행동에 나섰다. 장을 잔뜩 봐와서 요리하는가 하면, 뇌에 좋다는 영양제를 사서 불쑥 엄마에게 내밀었다. 시일이 걸리겠지만 무너져 내린 흙더미가 도로에서 치워지듯 이 일도 결국에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희미하게 남을 것이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인간의 불완전성은 어쩌면 매번 흔들리는 감정이 출발점이 아닐까? 엄마도 사람이기에 한 번씩 뭉쳐진 감정을 풀어야 한다. 엄마의 유전자를 50% 가진 나도 똑같다. 작은 바람에도 일렁거리는 촛불처럼 나 역시 딸에게 숱하게 화를 냈다. 어떤 사람은 가족에게 화가 나면 남한테도 못할 말을 마음이 데일 정도로 심하게 하기도 한다. 그날의 우리가 서로에게 그랬다.
혈연관계란 단지 핏줄만 이어진 게 아니라 감정까지도 긴밀하게 연결된 특별한 인연이다. 가족의 정서를 돌보는 일은 가족과 맞닿아 있는 나를 보살피는 일과 마찬가지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적당히 흘려들어야겠다. 감정이 상할 때 들은 말을 곱씹었다가는 상한 음식을 삼키고 탈이 났을 때처럼 마음이 힘들 수밖에 없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옳고 그름보다도 서로를 위하는 배려가 더 중요하다. 나 또한 엄마에게 말할 때는 촘촘한 체에 거르듯이 삐쭉 빼쭉한 언어를 최대한 빼야겠다. 어른이라면 부모와의 관계에도 성숙한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