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을 할 줄 모른다. 삼십 대 초반, 운전 학원에 등록하고 면허를 땄다. 면허증이 나오고 엄마와 첫 도로 연수를 나갔는데 결과가 참담했다. 도로의 현실은 면허시험을 봤을 때와는 아주 달랐다. 운전 중에는 전방을 주시해야 할 뿐 아니라 백미러와 사이드미러까지 동시에 놓치지 않고 봐야 했다. 여기저기 보다가 보면 앞차와 간격이 점점 벌어지거나 갈수록 좁아졌다. 도로에서 옆 차선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자 옆을 달리던 자동차가 경적을 울려 깜짝 놀란 일도 있었다. 차 뒷유리에 붙어 있던 ‘초보운전’ 스티커를 본 뒤차들이 계속 치고 나와 급한 마음에 브레이크를 몇 번이나 밟았다. 정작 유턴할 때는 속도를 줄이지 않아 하마터면 차가 뒤집힐 뻔했다. 그때 조수석에 앉아있던 엄마는 본능적으로 손잡이를 꼭 잡았다. 그 뒤로 두어 번 더 도로를 나갔지만, 그럴수록 그나마도 미약했던 자신감마저 잃어버렸다. 결국 운전을 깨끗이 포기했다. 몇 년 전에는 면허증도 갱신했으니 어림짐작해도 장롱 면허가 된 지 족히 10년이 넘었다.
서울에 살 때는 운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불편한 점이 없었다. 가고 싶은 곳이 어디에 있든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경기도로 이사를 온 이후부터 생겼다. 원래도 집순이였지만, 차를 기반으로 움직여야 할 일이 많은 경기도에 살면서 나가지 않는 경향이 더 심해졌다. 행여나 남편이 약속으로 주말에 나가면 십중팔구는 딸과 종일 집에만 박혀있었다. 자연스레 딸도 나의 성향을 닮아갔다. 어쩌다 타인과 만나는 약속을 할 때면 장소를 전철역 근처로만 잡았다. 가끔 사람들이 물었다. 그럴 거면 왜 면허를 땄느냐고. 운전하면 얻어지는 자유에 대해 언급하며 꼭 운전을 다시 배우라고 설득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든 말에도 내게 면허증의 정의는 여전히 비싼 값을 주고 산 신분증에 불과했다.
처음 면허를 땄을 때조차 운전에는 큰 욕심이 없었다. 심각한 방향치라 평소에도 초행길을 갈 때는 많이 헤매는 편이었다. 걱정이 많아 운전하는 상상만 해도 벌어질 위험한 일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팝콘처럼 튀어나왔다.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운전하다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괜한 공상을 하며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이쯤 되면 하등의 필요도 없는 면허증을 왜 굳이 땄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내게는 면허증이 필요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서른 살이 될 무렵부터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빠의 병색은 급격하게 짙어졌다. 우리가 아빠를 모시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우리 집 차의 운전자는 언제나 엄마였다. 아빠의 죽음이 가깝게 느껴질수록 내 근심도 불어났다. 만약에 엄마가 없는 날 아빠가 안 좋아지시면 어떻게 대처해야 해야 할까. 덜컥 겁이 났다. 물론 119로 전화해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갈 수도 있겠지만, 숨이 넘어갈 정도로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 아니라면 내가 아빠를 모시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심이 타오르자 주저함은 꺼졌다. 운전 학원에 바로 등록했다. 다행히 필기시험부터 도로 주행까지 한 번에 붙었다. 행운은 단지 거기까지였다. 나의 실력을 깨달은 이후 운전에 관한 관심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얼마 못 가 아빠가 우리 곁을 떠났다. 운전하려던 가장 큰 이유가 사라지자 의지도 함께 소멸했다.
인간이 어떤 일을 끝까지 해내려면 그 일에 푹 빠질 정도로 좋아해야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는 확고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운전에 관한 한 내겐 둘 다 없었다. 나에게 운전은 마치 읽고 싶은 영어 원서 같은 존재다. 영어로 된 책을 막힘없이 읽는다면 분명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테다. 남들의 부러운 시선도 한 몸에 받게 되고, 그전에는 꿈꾸지 못했던 분야에서 일할 가능성도 열 수 있다.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된 책을 읽지 못한다고 사는 데에 큰 지장은 없다.
앞으로 살면서 내가 운전대를 잡을 날이 과연 오려나 싶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건 운전이란 신세계에 도전하려면 나의 게으름과 두려움을 이길 정도의 간절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운전 자체를 기꺼운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라이트라이팅 #라라크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