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행 일기 - 무한한 땅 저 너머로!
2nd day
마치 세우면 자동으로 눈을 뜨는 인형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스르르 눈이 떠졌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꿀잠을 잘 줄 알았건만, 갑자기 바뀐 밤낮에 몸은 어리둥절해했다. 휴대폰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2시. 침대 왼쪽에 누워있던 셀린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재빨리 휴대폰 화면을 껐다. 다시 잠을 청하려고 눈을 꼭 감았다. 감은 눈을 뚫고 의식이 점점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의식은 아까 통과했던 입국심사대, 비행기에서 보았던 영화와 두 번의 기내식, 인천 국제공항에서 달러를 찾았던 은행 환전소 순으로 시간의 역방향으로 흘러갔다. 갑자기 환전한 돈을 어디에 두었는지가 떠오르지 않자 당장 가방을 열어 돈을 찾아보고 싶은 욕구가 끓어올랐다. 돈이 어디로 도망갈 리 없다고 자신을 안심시켰다. 이후 시계를 서너 번 더 확인했다. 화장실도 한 번 다녀왔다. 카톡을 조회하고 인스타를 묵음으로 설정한 상태로 영상 수십 개를 보았다.
현지 시각으로 새벽 5시가 되자 마침내 잠을 포기(?)했다. 미리 내려받았던 전자책을 보며 셀린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7시가 되자 셀린이 부스럭거리며 깨어났다. 셀린은 내가 밤새 뒤척거리는 소리에 잠을 잘못 잤다고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했다. 나는 좀 무안하고 미안한 마음에 나 역시 너의 코 고는 소리를 들었다고 응수했다. 시차로 나의 몸이 받아들이고 있는 고통도 실제보다 많이 부풀려서 들먹거렸다. (감동의 재회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지만, 현실의 친구는 역시 서로를 자근자근 물어뜯어야 맛이 산다)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셀린이 이 호텔은 숙박비에 조식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었기에 우린 바로 조식을 먹으러 1층으로 내려갔다. 하룻밤 묵기에 손색이 없는 호텔이었지만, 고가의 호텔은 아니었기에 조식 뷔페 메뉴가 단출했다. 배가 출출했던 나는 토스트 하나, 계란프라이 둘, 정체를 알 수 없는 햄 하나, 사과 하나, 우유 한잔, 커피 한 잔, 블루베리 요구르트를 먹었다. 계란프라이와 햄은 매우 짰으며, 커피는 쓴맛이 가미된 물과 같았다. 다 먹고도 배가 차지 않아 계란프라이와 모닝빵을 더 가져왔다.
모닝빵에 버터를 바르기 위해 일회용 버터 한 팩을 같이 가져왔는데 덮개를 읽어보니 식물성 버터라고 쓰여있었다. 덮개를 뜯으며 셀린에게 식물성 버터가 뭐냐고 물었다. 싸구려 가짜 버터라는 셀린의 대답에 잠시 멈칫했지만, 곧 포크로 떠서 빵에 치덕치덕 발랐다. (셀린의 말로 더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푸석거리는 빵에 버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식용유 맛이 가득한 빵을 먹는데 목이 막혔다. 얼른 커피를 한 잔 더 가져와 빵과 함께 꿀꺽 삼켰다.
그렇게 테이블을 몇 번 더 들락날락하는 동안 셀린은 단지 빵 한 조각과 딸기 요구르트 하나, 커피 한 잔을 귀족 부인처럼 기품 있게 마셨다. 아침을 다 먹은 우리는 곧바로 방으로 올라가 짐을 싸고 나왔다. 체크 아웃을 하는데 호텔 측에서 주차비를 정산해 주었다. 숙박객에게 주차비를 물리다니. 주차비를 결제하고 호텔을 나오며 우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고 투덜거렸다.
호텔에서 마셨던 커피가 실망스러웠던 터라 그 어느 때보다도 커피에 목말랐다.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보이는 스타벅스 드라이빙 스루로 들어갔다. 차가 주문받는 기계 앞에 멈추자 주문을 요청하는 직원의 음성이 들렸다. 셀린이 초콜릿 폼 콜드블루 (Chocolate Cream Cold Brew)를 주문하는 동안 그들의 대화 속도를 따라잡기 바빴던 난 마이크로 흘러나오는 직원의 질문 세례가 내게도 쏟아질까 봐 두려웠다. 내가 주문할 차례가 오자 나는 재빨리 같은 걸로 하겠다는 말로 대화를 종결시켰다. (어쨌거나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초콜릿 폼에 홀딱 반한 나는 이후 매일 같은 커피를 마시게 된다)
스타벅스를 나온 우린 본격적으로 목적지인 캐나다로 출발했다. 오늘 중으로 국경을 넘을 예정이었기에 갈 길이 멀었다. 셀린은 운전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 틀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셀린이 선곡한 팝송을 들으며 차 창밖을 보았다. 날씨는 화창했고 구름은 하늘에 깔린 하얀 이불처럼 선명했다. 도로에 세워져 있는 간판이며 거리를 지나다니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 흘러나오는 음악까지 전부 내가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문득 그 모든 풍경에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2시간쯤 지나자 이내 무뎌지며 점점 익숙해졌다. 나는 셀린에게 그나마 내가 아는 가수인 브리트니 스피어스 노래라도 틀어달라고 말했다. (지금 세대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팝송을 잘 알지 못하는 나조차도 한두 번은 들어봤을 만큼 90년대 중반 팝 음악계의 아이콘이었다)
이 나라에 올 때마다 느꼈는데(누가 들으면 대단히 많이 왔었던 줄 알겠다) 여기는 땅이 끝없이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어디에서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3~4시간은 기본이다. 가는 길에 스타벅스 커피와 챙겼던 물 한 병을 다 마셨다. 그로 인해 화장실에 가느라 길을 멈추고 맥도날드에 세 번이나 들려야 했다. 시간을 아끼려 밥도 맥도날드 햄버거로 해결했다.
마침내 캐나다 국경 검문소를 넘어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에 예약했던 호텔에 도착했다. 장장 7시간의 대장정이었다. 셀린은 내가 화장실만 덜 갔어도 더 빨리 걸렸을 거라며 다음에는 성인용 기저귀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고로 절친이란 서로를 적당히 달달 볶아야…)
바로 프런트 데스크에서 체크인했다. 호텔 직원은 언뜻 봐도 키가 170cm가 넘는 20-30대의 흑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다소 과장된 미소를 지은 뒤 부자연스러운 하이톤으로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그건 바로 생활 편의 시설 사용료(amenities fee)가 추가로 부가된다는 말이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영어 단어의 요금에는 우리가 전혀 사용하지 않을 예정인 호텔 수영장 사용료와 방에 제공되는 물품인 샴푸나 린스, 심지어 물 2병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묵었던 호텔처럼 주차비도 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카드키를 받고 방으로 올라가는 셀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셀린이 처음 대행사를 통해 호텔을 예약했을 때 해당 사이트에는 그 모든 추가 요금에 대한 명시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관광지의 바가지요금은 미국인도 피해 갈 수 없나 보다) 카드키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퀸사이즈 침대 하나와 창가에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다른 쪽 벽에는 다소 오래된 모델로 보이는 TV가 장식장을 채우고 있었고 그 옆으로 모형 벽난로가 나란히 서 있었다. 테이블에는 500ml 용량의 생수 2병이 놓여있었는데, 물병의 브랜드를 확인한 셀린은 달러샵(우리나라 다이소 같은 곳이다)에서 파는 물이라고 말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장거리 여행에 우리 둘 다 많이 지쳐있었다. 곧바로 샤워하고 잘 준비를 마쳤다. 휴대폰을 충전하려고 내가 자는 침대 쪽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았는데 충전이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셀린이 자는 쪽 콘센트에 연결하고 핸드폰을 충전했다. 우린 말할 기운도 없어 그대로 다음 날 아침까지 숙면했다. (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숙면한 건 나뿐이었다. 잠귀가 밝은 셀린은 그날도 자면서 내가 몇 번이나 발로 차는 소리를 들으며 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