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30분, 아침이 주는 신성한 공기의 혜택을 맛보며 오늘도 일어났다.
이 집 어디에도 나만을 위한 공간이 없어 나는 대신 나만을 위한 시간을 만들기로 정했다.
여전히 캄캄한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세상에서 가장 들기 무겁다는 눈꺼풀을 제법 번뜩이며 든다.
째깍거리는 시곗바늘의 움직임조차 쿵쾅거리듯 크게 들리는 침묵 속에서 유유히 유령처럼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세면대 거울로 퉁퉁 부은 초점 없는 눈을 한번 쓱 바라보고는 찬물로 세수한다.
그리고 거실로 나가 커피를 내린다.
조용한 어둠 속에 커피 내려오는 소리가 폭포수가 되어 떨어진다.
폭포수를 뒤로 하고 아이 방으로 들어와 요가 매트를 깐다.
최근 시작한 아침 요가를 하며 감사의 마음을 주입한다.
차분한 동작들은 서서히 의식을 깨운다. 요가는 역시 마음 수양에 좋다.
다음으로 한 편의 시를 필사하고 주문을 외듯 소리 내어 읽어본다.
주문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날의 마음에 따라 때로는 활달하고, 때로는 비장하며, 때로는 처량하다.
모든 건 마음에 달려있으며 그 마음으로 내가 하는 말이 딸려감을 느낀다.
텁텁한 아침 공기를 정화하고자 창문을 열었더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다.
비와 함께 촉촉하고 신선한 아침 공기가 거대한 활기가 되어 한순간에 이 방을 바삐 돌아다닌다.
책상에 앉아 요즘 읽고 있는 책 '빨간 머리 앤' 원서를 펼친다.
원서를 읽는 것은 참 쉽지 않다.
30분 동안 기껏해야 2~3페이지 정도를 읽는다.
그 대신 사전을 찾아가며 한 단어 한 단어씩, 뜨거운 죽을 호호 불며 한 입씩 먹듯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글을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다.
언어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잠시 아무도 없는 그 어딘가에 혼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등 뒤 열린 창문으로 들이치는 빗소리와 차들이 지나가며 만들어내는 물 마찰음이 마치 폭풍우 치는 날 바닷가의 파도 소리처럼 들린다.
그때 비를 관통하고 길 건너편 어느 집으로부터 개 짖는 소리가 들어온다.
다들 잠든 암흑 사이로 혼자 울고 있는 그 개의 감정을 그려본다.
약간의 심심함과 약간의 애달픔, 약간의 외로움, 약간의 배고픔이 뒤섞인 총체적인 감정이다.
빗소리와 차들의 파도 소리, 새벽 개가 짖는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화음을 만든다.
그 음악을 감상하며 이런저런 잡념에 빠진다.
갑자기 사람의 말소리가 저 아래에서 훅하고 올라온다.
고개를 돌리고 창문 밖을 바라본다.
길 건너 24시간 해장국집 앞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다. 그중 한 사람의 절제되지 않은 소리는 정제 없이 내 귀까지 들려온다. 밤새 술을 마신 듯 아직 취기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소리는 언어가 아닌 새벽 음악을 방해하는 날카로운 소음인 것만 같다.
그 소음을 막을 방법이 없어 나는 차라리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한다.
마지막으로 밤새 술을 마셔본 지가 언제였던가.
술에 의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내뱉어본 지는 또 언제였던가.
창밖 누군가의 새벽을 깨는 웅얼거림은 방아쇠가 되어 미숙하고 어렸던 시절을 폭발시킨다.
이윽고 두 사람은 떠났다.
나는 다시 나만의 상념 속으로 잠긴다.
지난밤 머릿속을 휘젓던 사람과의 과거는 비극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런 비 오는 날 아침에는 그런 비극이 어울리지 않는다.
잿빛 하늘 아래 떨어지는 비로 머리와 가슴이 같이 깨어나는 날이다.
그것은 방황으로 얼룩진 시간과는 분명 다르다.
오늘은 도종환 시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 영감을 받아 글을 하나 써본다.
나는 꽃이다
-안희정-
바람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반갑게 맞이하자
흔들흔들
바람은 나를 품는다
머리칼은 흩날리고
두려움은 부서진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정겹게 바라보자
빗속에 마음을 녹여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자
흔들리고
젖어야
날리고
나아간다
바람과 비는
나를 향한
하나의 줄기다
옥상 햇살 아래 말려 해의 냄새를 가득 품은 옷을 입은 듯 의식은 보송보송한데, 마음은 비에 젖어 촉촉하다.
비 한 방울에 담긴 유구한 서사가 잔잔하게 내 마음을 울린다.
비 오는 날 아침, 나는 지금 값진 순간을 발견했다.
어느새 마음은 편안해지고 나의 평안은 평범한 하루를 비범한 운명의 날로 변신시킨다.
지금 당신의 시간을 기적의 순간으로 바꾸고 싶다면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빗물이 품고 있는 영별한 순간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라.
오늘도 기적의 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