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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Jul 24. 2022

밥그릇, 라면, 그리고 할머니의 젖가슴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남편과 아이와 함께 CGV 극장으로 만화 '미니언즈 2'를 보러 갔다.

귀여운 노랑 생명체들의 이야기가 한 주동안 스트레스로 얼룩진 기분을 상쾌하게 씻어줄 것만 같아 나는 가기 전부터 조금 들떠 있었다.

팝콘과 콜라를 두 손 가득 들고 본 스크린 속 들은 변함없이 귀엽고 앙증맞은 자태로 우리를 반겼다.


그렇게 한참을 그들의 여정에 함께 호흡하며 몰입해서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극 중반 새로운 캐릭터인 쿵후 고수인 중국인 할머니가 등장했다.

악당을 물리치고 그들의 보스인(동시에 친구인) 루를 구하기 위해 그들은 그녀에게 무술을 가르쳐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나는 엉뚱하게도 그 장면에서 그만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를 떠올리고 말았. 의도치 않게 귀에 들어온 '할머니'라는 단어는 타임머신이 되어 순식간에 나를 지금 앉자 있던 극장 의자에서 할머니와 살던 내 유년시절로 보내주었다.


타임머신 과거에서 가지고 온 세 가지 단어.


라면, 밥그릇 그리고 젖가슴.


<제1화 라면 >

우리집. 나도 라면을 박스로 쟁여놓는다.

어릴 적  부모님은 일 때문에 수시로 늦게 들어오셨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학교가 끝나면 우리는 할머니만 계신 집으 돌아왔.

기억 속 우리 집에는 항상 라면이 몇 박스씩 쌓여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담낭절제 수술을 받으셨던 우리 할머니의 최애 음식이 라면이었기 때문이었다. 


"쓸개를 뗐더니 소화가 잘 안돼. 라면을 먹으면 속이 편하더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할머니와 달리 나중에 엄마는 밥하기 귀찮다며 매일 자식들에게 라면만 끓여주시던 할머니 때문에 많이 속상하셨다고 했다.

그런 속사정을 몰랐던 우리는 매일 라면을 맛있게 먹었었다. 그리고 라면 한 개로 주린 배를 채우기 부족해서 남은 국물에 찬밥을 말아서 총각김치를 함께 베어 물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심지어 라면을 매일 먹는다고 친구들에게 으스대며 뽐내기도 했었다.

그렇게 몇 년거의 매일 라면을 먹었더니 나중에는 정말 라면이 려 중학교 때 몇 년간 라면을 입에도 었다.

지금은 할머니와 얽힌 추억의 음식이 되어 가끔 먹는다.


<제2화 밥공기>

우리집 제사용 스테인리스 밥그릇. 문제의 그 밥그릇으로 추정됨.

할머니는 부모님이 오시는 저녁 시간이 되면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는 제사상에나 올라옴직한 커다란 은빛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하나 꺼내 가득 퍼담고 밥뚜껑으로 꾹꾹 눌러 덮은 다음 밥솥 안 한쪽에 다시 넣어두셨다.

갓 지은 밥을 굳이 주걱으로 퍼서 밥그릇에 담고 다시 밥솥에 넣는 할머니의 행동이 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안다.

할머니는 셋이나 되는 손녀들 때문에 일하고 돌아온 아들의 밥이 혹여나 부족할까 염려가 되어 따로 담아두었던 것이었다. 어머니의 아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할머니의 아빠를 향한 일편단심의 깊이를 알리 없는 우리는 다 같이 밥을 먹을 때면 경쟁심에 하나라도 더 먹겠다고 상 위에 있는 반찬이란 반찬은 남김없이 싹쓸이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옆에서 못마땅한 듯 "어이구야, 가스나들이 뭐 그리 많이 먹냐."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타박했다. 나마 동생들보다 한 뼘만큼 키가 더 컸던 나는 눈치를 보고 고기 한 점을 향해 뻗던 손을 슬그머니 다시 거두곤 했었다.


<제3화 할머니의 젖가슴>

검정고무신 할머니

"아휴 다 큰 게 언제까지 찌찌를 만질래? 간지럽다고마." 


어릴   우리 가족은 방 2칸짜리 작은 빌라에 살았었다.

큰방에는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들이 자고 작은 방에는 나와 할머니가 잤다.

나는 어릴 적 '전설의 고향(그 시절 귀신 드라마 시리즈)'을 똘망똘망한 눈으로 즐기던 동생들과 달리 매우 겁이 많고 예민한 아이였다.

매일 밤이면 어둠이 무서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머리끝까지 이불을 고 상상 속 귀신과 괴물들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막을 펼쳤다.

잠들 때까지의 시간이 천년처럼 느껴졌고  괴물들은 수시로 내 발끝이나 머리칼 끝을 툭툭 건드리며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나는 공상의 세계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매일 밤마다 찾아오는 온갖 유령들과 혼자만의 사투를 벌였는데 그중 최고의 방법은 할머니 겨드랑이 속으로 파고들어 젖가슴을 만지는 거였다.

그것은 마치 성스러운 마법의 의식과 같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단지 젖을 만지기 위한 변명을 열심히 꾸며낸 것이었지도 모르겠다.

내겐 할머니의 젖가슴이 일종의 애착 인형이었던 셈이었다.

여하튼 그런 나 때문에 늘 잠을 설치시던 할머니는 종종 짜증 섞인 말투로 손을 빼라고 말씀하셨는데, 말과 달리 조그마한 손이 자신의 가슴팍에서 조물딱 조물딱 거릴 때마다 가만히 아주시던 기억이 있다.


이켜 보면 남편 없이 혼자서 아들 둘, 딸 하나 키우다가 작은 아들은 어릴 때 집을 나가서 비명횡사하고, 딸은 미국으로 이민 가서 평생 얼굴이라고는 몇 번 못 보고, 유일하게 바라볼 수 있던 큰 아들인 우리 아빠에게 자신이 가진 사랑을 맹목적으로 주신건 당연한 일이다.

엄마는 그런 시어머니 때문에 많이 힘들었겠지만 말이다.

맨날 라면만 주셨어도, 반찬 많이 먹는다고 구박하셨어도, 밤이면 어김없이 품을 내어주신 할머니를 나는  많이 사랑했다.


"어라 엄마 운대요..ㅋㅋㅋ"


미니언즈를 보다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내쪽을 향해 돌아보던 딸이 그렁그렁한 눈물을 막 떨어뜨리는  다보고는 놀리며 말했다.


"우는 거 아니거든?"

하고 우겨보며 다시 발랄한 미니언즈의 세계로 돌아왔다.


할머니 보고 계세요?

젖 만지겠다고 떼쓰던 철딱서니가 어느덧 딸을 낳아서  이렇게 사네요. 근데 이건 창피하니까 우리만의 비밀인데요. 저는 아직도 밤이 되면 할머니 품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ㅎㅎ 그러니까 한 번씩 제 꿈으로 놀러 오세요. 이번에는 젖 만지겠다고 안 보챌게요. 속해요.


사랑해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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