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글을 쓰고 있는데 딸아이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왔다.
딸 : "엄마 뭐해?"
나 : "응, 엄마 글 쓰고 있어."
딸 : "엄마 글 쓰는 거 나 한번 볼래."
나 : "어.. 어?.. 그.. 그래."
엄마가 요즘 틈만 나면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으니 뭘 쓰는지 꽤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글을 보여달라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많이 당황했었다. 나중에 딸이 크면 언젠가 보여주려고는 했지만, 그날이 생각보다 너무 일찍 다가왔다. 어차피 영원히 숨길 수는 없으니 그냥 보여주자. 뭐 이상한 걸 쓴 것도 아닌데 감추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핸드폰으로 지난 몇 달간 쓴 글 목록을 보여 주었다.
쭈욱 눈으로 훑어보던 아이가 한 곳에서 눈을 멈췄다.
딸: "어? 복숭아를 먹은 죄? 여도지죄? 이거 내가 아는 건데?!"
미쳐 말릴 새도 없이 아이는 글을 클릭해서 열어 보았다. 그 상태로 제법 진지하게 몇 분 동안 손으로 스크롤을 내려가며 읽었다. 1초가 1분 같았고 1분이 1시간 같았다. 경연대회에 출전한 무명 가수가 심사위원 앞에서 노래를 부른 후 심사를 기다리는 심정이 이해되었다.
나 : "뭘 그렇게 오래 봐? 재미있어?"
집중해서 읽던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딸 :"이거 우리 아침에 퀴즈 낼 때 했던 내용이잖아?...!ㅋㅋㅋ. 맞아. 나 엄마 못 가게 막으려고 장난친 건데 알고 있었네...? 어? 내가 이렇게 대답했었어? 나 기억 안 나는데?"
애들이 읽기에는 지루한 내용이라 대충 읽고 그만둘 줄 알았던 내 예상이 무색하리만치 아이는 내용을 꽤 자세하게 파악하고 그날의 상황을 되새겨가며 읽어 내려갔다. 그런 모습을 보며 글 속에 담긴 내 속마음을 아이가 어떻게 생각할지 살짝 애가 타기 시작했다. 아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후에도 몇 개의 글을 더 읽었다. 그러다가 자신에 대한 대목이 나오면 여지없이 자기가 이랬냐며 신기한 듯 묻고 또 물었다.
결국 나는 핸드폰을 빼앗듯 가져온 후 인제 그만 씻고 잘 준비하자고 화제를 돌렸다.
미안해 딸. 엄마의 못난 마음을 다 보여주기엔 아직 엄마가 좀 부끄럽고 창피해.
이윽고 화장실에서 씻고 나온 아이와 잘 준비했다. 나란히 누웠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잠이 오지 않는다며 옛날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나 : "음... 엄마가 그럼 옛날얘기 하나를 들려줄게."
그런데 이어진 딸의 조금 황당한 대답.
딸 : "엄마, 근데 이것도 글로 쓸 거야?"
나 : "어? 아니,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왜? 엄마가 글로 썼으면 좋겠어?"
딸 : "아니 그냥 궁금해서.."
나 : "흠.. 아까 엄마 글.. 어땠어?"
딸 : "재밌었어"
나 : "진짜?"
딸 : "응"
나 : "뭐가 재밌었어?"
딸 : "내가 글 속에 나오니까 마치 책 속의 위인이 된 기분이었어"
아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내가 친구들과 단톡방에서 했던 얘기를 그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올렸을 때도 친구들이 마치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된 기분이라고 은근히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같이 운동하던 언니에 대한 글을 썼을 때도 그녀도 자신에 대한 얘기에 꽤 만족하는 눈치였으며, 직장에서 유일하게 나의 글 쓰는 이중(?)생활을 아는 한 사람도 자신이 글에 등장했을 때 그 부분을 더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그건 바로 우리 모두는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는 진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실제 인생에서는 주인공이 될 기회가 별로 없다는 현실이 된다.
요즘에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적에 학교에서는 소수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이 주로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관심의 선 밖에 서 있었다. 사회에 나가서도 별로 변하는 건 없었다. 대부분 사람은 시스템 내에서 하나의 옵션으로 일하며 월급쟁이로 살아간다. 집에서조차 마음 편히 발 뻗고 눕기보다 가족의 눈치를 살피기 다반사이다. 살면서 자신을 조연으로 만들 기회는 가득 차고도 넘친다.
그래서 모처럼 주인공이 되었을 경우에는 기쁨이 배가 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남이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왜 우리는 남의 평가에 그렇게 의존하고 살아야 할까? 만약 그 누구도 나를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자신을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기용해보면 어떨까?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기적이 만들어낸 생명체들이다. 태어날 때 1/400조의 확률을 뚫고 세상에 나왔고, 이 세상에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모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는 유일무이의 존재들이다.
우리는 인생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한 사람들이다. 동시에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역시 손가락에 긁히는 상처만 생겨도 집에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누군가가 있음을 명심하자. 이건 우리가 서로 존중하고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을 깎아내리거나 남과 비교하며 인생이란 연속극에서 스스로 조연이나 단역으로 정하지 말자.
아무도 나를 보살피지 않는다고 단정 짓지 말고 자신의 가치를 먼저 인식하고, 인정하고, 보살피며 살자.
진정한 주인공이 되고 싶다면 자신을 주인공으로 대접하자.
당신의 인생의 주인공이 될 권리가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