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여전히 밤의 한가운데임을 짐작했다. 손을 뻗어 머리 위 핸드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 4분. 역시나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 남은 시간이었다. 내일 출근하려면 다시 자야 한다. 나는 편집증 환자처럼 오직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고, 어느새 밤이 주는 이런저런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시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2시 58분.
나는 그만 잠자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일어나 아이 방 책상에 앉자 불을 켜고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한다.
아까 퇴근하려는데 나와 친한 상사 두 사람이 근처에 정말 괜찮은 카페를 새로 발견했다며 오랜만에 커피나 한잔하자고 했다. 일하는 시간 외에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본 지 꽤 되었다는 생각에 오늘은 왠지 거절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말했다.
건물 밖을 나오니 잿빛의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지만 여름의 끝자락이라 주변은 여전히 밝았다.
우리는 걸어서 새로 발견했다는 카페로 함께 갔다. 카페는 알고 보니 내가 다니는 헬스장 맞은편에 있었다. 나는 전기 스쿠터를 끌고 나왔었는데 혹여 비가 와서 스쿠터가 젖을까 걱정이 되어 헬스장에 금방 갖다 놓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두 사람을 카페에 먼저 들여보냈다. 스쿠터를 헬스장 건물 안에 넣고 다시 나와 카페로 들어갔다. 예쁜 소품으로 장식된 열 평 남짓한 작고 아담한 카페였다. 카페에는 오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사장님과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이곳 커피는 꼭 맛을 봐야 한다며 이미 커피 석 잔과 조각 케이크를 하나 주문했다고 말했다.
나는 오후 서너 시 이후에는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다. 몇 번 커피에 들어있는 카페인으로 인해 밤에 잠들지 못하는 경험을 한 이후 숙면을 위해 커피 마시는 시간을 제한했다. 그런 사실을 잘 모르는 그들은 내게 커피를 맛 보여줄 생각에 기분이 들떠 보였다. "이 커피는 사장님의 얘기를 들어봐야 해." 상사 A가 말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커피를 내어오려는 사장님에게 다가가 커피가 놓여있는 쟁반을 직접 받아 들고 설명을 요청했다. 그녀는 마치 멘트를 미리 준비한 사회자처럼 커피 원두의 원산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산으로 커피 대회에서 1등한 아주 구하기가 힘든 특+ 품종 원두로 추출한 커피이며 한잔에 9000원짜리인데 우리에게는 그냥 7,900원씩만 받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두 사람이 이미 이곳에 몇 번 와서 단골 도장을 찍기 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장님의 멘트와 커피의 가격은 자연스럽게 내 손이 커피잔을 집어 들게 했다. 나는 따뜻한 커피를 천천히 한 모금 입 안에 머금었다. 한 모금의 커피가 미쳐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도 전에 테이블 맞은편 상사 A가 중요한 시험 결과를 빨리 알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하기 위해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채 커피를 꿀꺽 삼켰다. 따뜻하다 못해 약간은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본 상사 B가 웃으며 조금 기다리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일단 맛이 매우 훌륭하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커피를 혀 전체에 퍼트리며 마셔보았다. 일반 커피보다 산미가 강했으며 조금은 차 맛이 곁들여진 것 같기도 했다. 커피에 대해 무지하였지만, 사장님의 커피 이야기와 사악한 가격은 커피에 달콤한 조미료를 넣은 듯 깊은 풍미를 더 해주었다. 사장님이 케이크도 직접 만들었다는 말에 포크를 집어 케이크도 맛보았다. 크림은 부드러웠고 빵은 촉촉했다. 에티오피아산 1등 커피와 수제 케이크는 일과 후 지친 우리에게 작은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아까 일어나 커피를 직접 받아 들고 온 상사 A는 이틀 연차를 쓰고 강원도의 친정어머님이 계신 집에 다녀온 후 다시 출근했었다. 그녀는 여든이 훌쩍 넘겨 혼자 사시는 노모를 보면서 자신이 어렸을 때 엄마 친구였던 분들은 지금 하나도 안 보이고 근처에 있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사신다고 했다. 그러니 오랜 친구보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내게 제일 좋은 사람일 수 있다고 했다. 또 엄마의 삶을 보면 굳이 열심히 살 필요도 없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매일 열심히 일하고 사는 것보다 느긋하게 사는 게 더 좋은 것 같다고. 그 말이 매사에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나를 겨냥한 말임을 알기에 나는 내 나이대 사람들의 고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오직 일과 육아에만 열중하며 살다가 어느 날부턴가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며, 아직은 삶을 내려놓기보다 열정을 가지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운동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한껏 열을 올리며 오히려 그녀를 설득했다.
그러나 우리 둘 다 안다. 내가 그녀의 인생무상을 전부 이해하지 못하듯 그녀도 내가 그녀가 건강한 삶을 누리기 위해 운동을 시작하길 바라는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다.
내 신념이 강할수록 상대의 신념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은 좁아진다.
수용은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려워진다.
우리는 그렇게 2시간 남짓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사장님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났다. 카페 문 앞에서 작별을 고하고 막 돌아서 헬스장으로 들어가려는데 길 건너편에서 삶의 허무에 대해 언급했던 상사 A가 큰소리로 나를 부르더니 말했다.
오늘 우리랑 놀아줘서 고마워라고.
그 옆에 서 있던 상사 B는 손을 크게 흔들고 활짝 웃으며 함께 인사를 건넸다. 나는 비싼 커피를 사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라고 웃으며 소리쳤다.
그들과 헤어진 후 헬스장 건물로 들어가 세워두었던 스쿠터를 가지고 나왔다.
뭐 오늘 하루쯤은 운동을 거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집에 가는 길에 교통 신호를 만나 잠깐 멈추고 문득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니 어느새 먹구름은 사라지고 휘황찬란한 오렌지빛 황혼이 하늘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기 싫어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비록 의견이 맞지 않더라도 그냥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인정하는 사람들과 편안하게 잡담을 나누고, 하늘의 노을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주는 것.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행복이란 바로 이런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불을 끄고 다시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