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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Sep 08. 2022

욕과 나에 대한 고찰

창문을 여니 사늘하다 못해 알싸한 가을 내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어스레한 새벽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기분 좋게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았다. 요 며칠 내 안에 있던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오늘같이 산산한 날이라면 왠지 없었던 초능력도 생겨나서 손이 움직이는대로만 따라가면 생각의 뭉치들이 글이 되어 사르르 풀릴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머릿속을 스치던 생각들 중 지난날 태풍이 몰아쳤던 날에 겪었던 일이 떠올라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 열린 창문으로 젊은 남자의 악에 받친 외침이 들렸다.

"야 이 개새*야!"

나는 깜짝 놀라 그대로 얼어버린 듯 멈추고 몇 초동안 가만히 앉아 귀를 바짝 곤두세웠다.

우리 집은 4층이다.

그러니 설령 내가 바로 내려다보았더라도 욕을 한 사람이 결코 나를 발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치 그가 금방이라도 여기로 찾아와 해코지를 할 듯 두려운 마음에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가만히 몇 초를 더 흘려보내고 조심스럽게 일어나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창문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길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환청을 들었던 것일까? 아니다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던 육담이었다. 다행히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기고 간 욕의 잔상이 여전히 내 머리를 억누르고 있었다.


욕이란 정말 대단한 힘이 있는 언어이다.

단지 한 두 마디 단어일 뿐인데 한 번 던져지면 그 속에 응축되어있던 엄청난 분노와 화, 노여움이 한 번에 터지며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반경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기분을 동시에 상하게 한다. 상쾌한 공기가 순식간에 냉기로 돌변하는 순간이다. 요컨대 욕이란 내 화를 전달하거나 타인을 모욕할 의도가 분명한 언어 폭탄이다.


나는 평소 욕을 잘하지 않는다. 욕 뿐만 아니라 매사 신중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혹여 이 말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하여 말을 하기 전 미리 상황에 맞는 단어를 고르고 조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쩔 수 없이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는 하루 정도 시간을 두고 최대한 감정을 없앤 다음 당사자에게 말할 때 사람이 아닌 잘못된 점에만 초점을 맞추어 말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나의 성향은 타인의 눈에 말수가 적고 속을 잘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비치게 만들었다.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사회에 나와 20여 년 동안의 직장 생활 속에서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이렇게 훈련이 되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하다.


그랬던 내가 요즘에 와서 조금은 변한 것 같다. 생각하기 전 말이 먼저 나오기도 하고, 작은 일에도 크게 감동하는가 하면,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불쑥이 올라와 당황하는 일도 적잖이 생겼다. 며칠 전에는 직장 상사로부터 “요즘 사람이 왜 그렇게 느물 느물 해졌어.”라는 말을 들었다. 글을 쓸 때마다 내면을 둘러쌌던 단단하고 강했던 포장지들이 자꾸만 벗겨진다. 나는 이 변화를 두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아니면 버텨내야 할지를 두고 한동안 고심했다. 결정 장애를 가진 나는 결국 뭐 어때, 그냥 이대로의 나도 좋다고. 문제를 물음 하지 않고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 듯 그냥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여 버렸다.


물론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그런 감정들이 전부 세상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나 내 못난 감정을 들어주는 사람들을 만날 때는 서슴없이 미숙한 나를 드러내는 경우가 조금씩 늘어간다. 견딜 수 없이 화가 날 때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던 동화 속 복두장처럼 대나무 숲으로 달려가 개가 짖듯이 시원하게 욕을 뱉어 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대해 나쁘거나 틀리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버티는 것보다 방법을 모르겠다면 차라리 욕을 해서라도 푸는 게 좋다. 그렇지만 더 좋은 건 평소에 조금씩 스스로에게 솔직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욕 폭탄을 던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응어리진 감정을 풀어주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그림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노래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나처럼 글이 될 수도 있다. 한 번 시작해보면 왜 이걸 이제야 시작했을까 후회가 될 정도로 좋을 것이다.


무엇이든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하나 정도는 시도해 보자.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감정은 그렇게 떠나보내자.


문득 욕을 남기고 간 그가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던지고 후련해졌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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