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희정 Sep 11. 2022

왜가리가 준 가르침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태풍이 경로를 급격히 바꿔 한반도로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이미 지난 주말부터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차였다. 내가 사는 동네는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지는 않았지만 간밤부터 내린 비는 여전히 그칠 줄을 몰랐다.


답답한 사무실 안에서 종일 일할 때는 밖의 상황에 대해 생각할 겨를 조차 없다가 퇴근길이 되어서야 비로소 창문 너머 날씨를 살폈다. 역시나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얼마 전에 장만한 우비를 걸치고 장우산을 들고 퇴근했다.


비바람을 헤치고 곧장 직장 근처에 헬스장에 도착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집 창문 틈으로 비가 계속 흘러 들어온다고 집으로 빨리 오라는 엄마의 전화였다. 10년 넘은 빌라라 최근 들어 부쩍 집 여기저기 돈 들어갈 일이 늘어가고 있다. 목소리로 전해지는 노여움을 눈치챈 나는 얼른 가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 길가에 쭈욱 늘어져 있는 커다란 나무들이 비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우비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우산을 펼쳤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그렇게 우산을 위가 아닌 바람에 저항하는 앞 방향으로 펼치고는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동화 '해와 바람'에서처럼 내기에 이기려고 흥분한 바람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날려버려고 하듯 거세게 불었다. 길가에는 이미 내기의 폐해로 나무로부터 떨어져 내린 잔 나뭇가지들과 잎사귀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상태였다.


평소에는 걷는 걸 좋아하지만 오늘처럼 거대한 자연의 위협 속에서 걷는 기분을 즐기기는 힘들었다. 나는 걷는 내내 올라오는 두려움을 끌어안았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까짓 태풍이 내 길을 막게 두지는 않겠다. 어느새 방패로 변신한 우산을 손에 꼭 쥐고 비장하게 행군을 이어갔다. 이윽고 두려움은 사라지고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마냥 걸었다.


그렇게 계속 걷다 보니 동네 하천 주변까지 다다랐다. 하천 다리를 건너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빗물로 하천이 불어나 길은 자취를 찾을 수 없었고 오직 넘쳐흐르는 물에 간신히 머리를 내밀고 있는 자전거길 이정표만이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힘겹게 버티며 이곳이 원래는 자전거 길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 순간. 범람한 하천 한가운데에서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왜가리 한 마리가 비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고하고 의연하게 그곳에서 우뚝 서 있었다. 나는 잠시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리는 비바람에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냥 그 자리에 하릴없이 있는 모습에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에게 가르침을 안겨준다. 하찮은 인간들이 태풍을 막아야 하고 물리쳐야 하는 일종의 적으로 인식할 때 동물들은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시기로 인식한다.


재해는 항상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아무리 둑을 쌓고 만반의 준비를 해도 자연은 늘 가장 약하고 생각지 못한 곳을 무너뜨린다. 그럼 그때마다 뉴스에서는 미리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정부나 지방 단체들을 탓한다. 우리는 그런 뉴스를 보며 천재 충분히 조정하고 막을 수 있는 예상 가능한 상황으로 믿는다.


불행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 예기치 않은 불행이 갑자기 찾아오면 우리는 적중하지 못한 일기 예보를 원망하듯 미리 준비하거나 막지 못한 스스로를 탓한다. 그러나 어디 불행이 그러한가.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불행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 때에는 그저 나에게 찾아온 불행을 이기거나 피하려는 노력을 하기보다 불행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지금 주어진 일을 계속하는 방법밖에 없다. 마치 비바람을 속을 걸어갈 때 하늘을 원망하기보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행군을 이어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보면 언젠가는 비가 그치고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햇살이 다시 찾아오게 된다. 우리는 그  따스한 햇살 속에서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 오는 날도, 바람 부는 날도, 태풍이 치는 날도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는다. 캄캄한 밤이 지나면 여명의 새벽이 오고, 겨울의 가장 추운 날이 지나면 어느새 봄은 성큼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왜가리가 전해 순간의 가르침을  위해 나는 사진을 찍으려고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새는 그 낌새를 눈치챈 듯 눈 깜짝할 새에 저 멀리 하늘 위로 날아가버렸다. 마치 지혜의 신이 자연의 교훈은 포착하는 것이 아닌 그냥 깨닫는 거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집에 도착해 보니 창틀에 서서 줄줄 들어오는 빗물을 걸레로 연신 훔치바닥에 놓인 대야에 물을 짜고 다시 닦기를 반복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에휴 몇 시간째 이러고 있다. 이렇게 비바람이 창문으로 새기는 또 처음이네. 무슨 수가 없나."


" 별 수 있나요.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죠 뭐."


나는 엄마 손에 있던 걸레를 건네받아 물로 흥건한 창틀을 닦으며 말했다.

작가의 이전글 욕과 나에 대한 고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